[법어집] 제2편 1장 불생불멸(不生不滅) 02. 색공(色空)의 세계

1) 색즉공(色卽空)

반야심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色不異空 空不異色(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니라.

색(色)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이란 것은 무형(無形)을 말합니다. 유형이 곧 무형이고 무형이 곧 유형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유형이 무형으로 서로 통하겠습니까?

어떻게 허공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된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입니다.

어떤 물체, 보기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가다 보면 분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자는 또 원자들이 모여 생긴 것이고, 원자는 또 소립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
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분자→원자→입자→소립자로 결국 소립자 뭉치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충돌해서 문득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났다가 합니다. 인공으로도 충돌 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입자의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자꾸 자가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입자가 나타날 때는 색(色)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空)입니다. 그리하여 입자가 유형에서 무형으로의 움직임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연히 말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실제로 부처님 말씀 저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2) 4차원의 세계

또 요즘 흔히 4차원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 4차원(四次元)의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의 공간 세계는 3차원의 세계인데 여기에 시간의 차원을 더하면 4차원이 됩니다. 3차원의 세계에서 볼 때는 시간과 공간이 따로이 존재하지만, 4차원의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4차원의 세계에서는, 보기를 들어 금고 속의 돈을 금고 문을 열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꺼낼 수 있으며, 또한 문을 닫아 둔 채로 문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하면 해인사에 앉아서 천리만리 밖에
까지도 갈 수 있는 자유자재한 그런 세계인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4차원의 세계를 신통자재한 홍길동의 이름을 따서 ‘홍길동의 세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4차원의 세계가 처음 제창된 것은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이지만 이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완전한 체계를 세워 공식화한 사람은 소련의 민코프스키 H.Hinkowski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4차원 공식을 완성해 놓고 첫강연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났다.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시대가 온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보기를 들어 “오늘, 해인사에서…”라고 할 때에 ‘오늘’이라는 시간과 ‘해인사’라는 공간 속에서 이렇게 법문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차원의 공간과 시간
은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인데, 그런 분리와 대립이 소멸하고 서로 융합하는 세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융합하는 세계, 그것을 4차원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화엄경>에 보면 ‘무애법계(無碍法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애법계라는 것은 양변을 떠나서 양변이 서로서로 거리낌없이 통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곧 시간과 공간이 서로 통해 버리는 세계입니다. 이것
은 앞에서 말한 4차원의 세계, 곧,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로서 민코프스키의 수학공식이 어느정도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3) 초심리학

시간과 공간이 서로 융합하는 세계가 이른바 4차원의 세계인데, 이것은 결코 가공의 상상 속의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을 자꾸 개발하여 가면 실제로 그런 세계에 들어갈 수 있고 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이 방면에 대해 많은 연구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심리학에서는 초심리학 Parapsychology이라는 분야에서 이것을 연구하고 있고 또 그에 대한 많은 실증적 연구 보고도 나오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타임지에서 이에 관한 특집기사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과학이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에서는 100여 개 대학에서 초심리학에 대한 정식 강좌를 열어 연구하고 있습니다. 또 소련은 유물론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160억원이나 되는 막대한 예산을 편성하여 4차원의 과학을 연구, 개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기를 들어 군사 방면에서 잠수함이 바다 깊은 곳에 잠수했을 때 정신력으로 그 잠수함에 어떤 지시를 해보면 70퍼센트는 성공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정신력으로 무슨 지시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하겠지만, 70퍼센트의 성공율이라면 대단한 것입니다. 한편, 소련 땅의 서쪽 끄트머리인 모스크바와 동쪽 끄트머리인 블라디보스톡 사이에서 정신력에 의한 통신을 시도하였더니 서로 통하였다는 실험 결과도 나왔습니다. 더우기 이 정신력에 의한 통신이 오히려 무선(無線) 통신보다 훨씬 더 힘이 강하고 전달이 빠르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실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한한 능력이 있어서 이를 자꾸 개발하면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실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무한한 정신력

무한한 정신력을 이용한 초능력의 보기는 그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영국의 캐논 경 Sir Alexander Cannon 의 캐논보고서에서 그런 보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본디 정신과 의사인데 영국 국가에서 주는 최고의 명예인 나이트 Knight 작위까지 받은 대학자로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미국의 다섯 나라 학술원의 지도교수이기도 합니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 가운데 <잠재력 The Power Within>이란 제목의 캐논보고서에서 소개한 몇 가지 실험에 대하여 여기에서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이런 실험을, 런던과 같은 대도시에서, 때로는 커다란 홀에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거나 때로는 많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즉석에서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은 눈을 감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눈알이 빠져버린 사람은 더더구나 볼 수가 없습니다. 눈 없는 사람이 어떻게 볼 수 있으며, 눈감고 무엇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이 지닌 본디의 능력, 본디
의 시력은 눈을 뜨거나 감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눈을 떠야만 볼 수 있고 감으면 볼 수 없다는 것은 의식 세계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잠재의식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면 눈을 뜨거나 감거나, 눈이 있거나 없거나에 관계가 없습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두 눈이 빠져버린 사람도 무엇이든 다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본래의 시력이라고 캐는 경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험을 해 보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 두 눈에 철판을 대고 수건으로 겹겹이 둘러 싸맵니다. 그런데도 무엇이든 다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모두 알아 보는 것입니다. 철판을 눈에 대고 보는데 멀고 가까움이 무슨 상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천안통(天眼通)이라고 합니다. 불교 경전에서 보면 천안이 가장 뛰어난 아나율(阿那律 ; Aniruddha) 존자라는 스님이 계시는데 그는 수행할 때에 너무 졸음이 많이 와서 그것을 없애려고 전혀 잠을 안 자고 공부를 계속하다가 결국 두 눈이 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눈 곧 육안(肉眼)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에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이 열려 삼천대천세계, 백억세계를 손바닥의 구슬처럼 환히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아나율 존자의 천안에 견주면 요즈음의 200인치 망원경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리하여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서 아나율 존자는 비록 육신의 눈은 없지만 천안이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캐논 경은 눈이 없거나 시신경이 완전히 파괴되어 절대로 회복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비관하지 말고 오직 무의식의 세계를 개척하라고 하였습니다. 무의식의 세계를 개척하면 눈이 있고 없는 것에 관계없이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힘을 사용하면 남의 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타심통(他心通)이라고 합니다.

캐논 경은 이것에 대해서도 실험을 해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은 말이나 글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머리 속에서 생각으로만 하는 것입
니다. 그러면 캐논 경이 말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질문자가 머리속에서 자기의 직업이 무엇인지 물으면 캐논 경은 그 사람의 직업을 말하고 또 나아가서 현재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일까지도 내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어김없이 다 맞는다고 합니다.

결국 이로 미루어 볼 때 남의 마음뿐만 아니라 미래도 알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능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달을 향하여 쏜 로케트나 우주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고 개척한 결과 우주선을 개발하여 이전에는 엄두도 못 내던 달나라에까지 간 것이지, 미국사람만 타고 오라고, 소련 사람만 타고 오
라고 하나님이 보내준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는 얼마든지 있으니, 앞으로 또 얼마나 더 큰 능력을 개발하게 될지 우리 인간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캐논 경은 또 다른 실험으로 육체적으로는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시체를 넣는 곽(棺)처럼 생긴 나무상자를 준비하고 상자의 앞, 옆, 위, 아래의 사방으로 구멍을 뜷어 놓고 이상자 속에 피실험자가 누우면 뚜껑을 덮고 뚫어 놓은 구멍 속으로 칼을 찌릅니다. 그 상자는 보통 사람의 크기보다 약간 작게 만들어져 있으므로 그 속에 들어가 있는 한, 결코 칼날을 피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오장육부가 모두 칼날에 구멍이 생길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심지어 심장에 꽂힌 칼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 칼이 오르락내리락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칼을 빼고 상자를 열어 보면 그 안의 사람에게는 아무 상처도 없는 것입니다. 칼을 찌를 때도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칼 상자보다 더 놀랍고 사람의 초능력의 깊이를 깨우쳐주는 실험으로 생매장(生埋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실험에서는 피실험자가 죽은 듯이 삼매에 들어갑니다. 의사가 검진하여 맥박도 끊어지고 호흡도 끊어지고 뇌파 검사에서 뇌활동도 완전히 정지되었음을 확인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을 단단히 밀납 포장하여 땅을 파서 묻어 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알아둘 것은 설사 죽지 않았다고 하여도 사람은 서너 시간만 땅에 묻어 두면 누구나 죽기 마련입니다. 한 시간이 아니라 불과 수 분이 지나도 다시는 깨어 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실험에서는 시체를 묻어 놓고는 며칠, 몇 달 또는 일년 동안이나 계속 놓아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년이 지난 뒤에 미리 정해놓은 시간에 파 보면 일년 전에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정받은 그 사람이 옷을 훌훌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캐논 경은 이 생매장 실험을 사람이 많이 모인 홀에서 실시 하였습니다. 무대 위에 모래를 수십 짐을 져다놓고, 그 속에 사람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동안 기다렸습니다. 과연 미리 지정한 대로 15분이 지
나자 모래더미에 묻어둔 사람이 툴툴 털고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귀신도 탄복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실험들을 통하여 볼 때 인간의 근본 정신은 육체를 떠나 활동하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호흡이 끊어지고 맥박도 뇌활동도 완전히 정지되었는데 어떻게 시간을 알고 깨어나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의 근본적인 정신 작용은 뇌신경 세포의 활동에 관계없이 독립해 있음을 말해 줍니다. 또한 언제나 깨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본디 무의식 상태라는 것은 언제나 죽지 않습니다. 설사 몸뚱이가 죽어 화장을 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없어져도 영혼은 독립해 있어서 윤회를 하고 환생을 하는 것입니다.

5) 정신감응

인간의 정신 능력은 한 개인에게만 작용하는 것이 나니라 타인에게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브로체프스키라는 소련의 유명한 심리학자가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정신과 정신 간에 서로 통할 수도 있다는 데에 착상하여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습니다.

피실험자가 있는 곳에서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어떤 사람이 피실험자가 자기 집으로 오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만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브로체프스키의 실험에서 피실험자는 여자였는데, 그 여자는 제 집안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가 뭔가 이상한 듯이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피아노 치던 것을 멈추고 밖으로 몇 번 들락날락하더니 대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감시하던 사람들이 따라가 보니 과연 그 여자는 자기를 오도록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로 가는 것이 었습니다. 간절히 했던지 그만 정신을 잃고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맑은 날에 우산을 들고 나오라고 상대방에게 정신 반응을 보내면 그것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어 우산을 갖고 나오는 실험까지도 하였습니다. 결국 이 실험으로 한쪽에서 어떤 생각을 강하고 간절하게 하면 그 정신의 반응이 상대편에게까지 도달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이것을 텔레파시 Telepathy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정신감응(精神感應)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신감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은 일본에서 의사들이 한 실험입니다.

흰쥐 스무 마리에게 장질부사균을 치사량으로 주사해 놓고, 그 가운데 열 마리는 약으로 치료하고 나머지 열 마리는 정신 치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에 보니 약으로 치료한 흰쥐는 모두 죽었는
데 정신요법으로 치료한 열 마리 중에는 세 마리가 죽고 일곱 마리가 살았다고 합니다. 또 죽은 세마리도 해부를 해보니 회복기에 들어서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실험은 사람의 정신 작용이 동물에게도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실험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데 동물에게 최면술을 거는 것입니다. 만일에 인간의 정신 작용이 동물에게는 작용하지 않는다면 최면술이 통할 리가 없습니다. 악어나 사자, 호랑이 따위의 동물에게 최면술을 걸 수 있다는 사실은 써커스나 묘기시범에서 쉽사리 알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정신적으로 동물에게 반응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면 옛날 우리나라의 도인들이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는 것이 전혀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정신반응은 광물에도 작용을 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릴때 많이 해보던 실험이기도 합니다. 실 끝에 돌이나 쇳덩어리를 매달고서 그것에 정신을 한참 동안 집중시키고 나서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동쪽으로 움직이라 하면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앞으로, 뒤로, 원형으로 모두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이것을 관념운동이라고 합니다. 또 유리겔라라고 하는 사람이 정신반응으로 숟가락을 휘게 하고 시계를 정지시키는 실험을 하는 것이 보도된 적도 있습니다. 어쨌든 정신감응은 광물에도 작용을 한다는 것이 입증된 것입니다.

6) 분신

이 밖에도 가장 신기하게 여겨지는 것으로 분신(分身)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백, 수천의 장소에 몸을 나타내어 중생을 제도합니다. 지구에 계시면서 저 세계에도 가고 이 세계에도 옵니다. 또 신
라시대의 원효스님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6처열반(六處涅槃)을 하였습니다. 곧 여섯 곳에서 똑같이 한꺼번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분신’이라고 합니다. 보기를 들어, 해인사에 있는 사람이 분신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이 진주에도 한 사람, 부산에도 한 사람, 서울에도 한 사람씩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몸이 한 날, 한 시에 열 명도 되었다가 백 명도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실험에 의해 그런 분신에 성공한 예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요기하는 요기 Yogi들이 분신을 해보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7) 육근호용(六根互用)

불교에 육근호용(六根互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을 서로 바꾸어가며 쓴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귀는 듣는 것인데 귀로 보고 또 눈은 보는 것인데 눈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육근호용이라고 합니다.

어제 어떤 신문에는 중국 사천에 사는 열한살 된 어린이가 모든 것을 귀로써 본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눈을 아무리 가려놓아도 무엇이든지 다 보며, 또 아무리 캄캄하고 어두운 곳에서도 물체를 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아이는 귀로써 모든 것을 보는데, 이것은 밝고 어두운 것도 사실은 없음을 말해 줍니다. 눈으로 보든 귀로 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눈으로 본다고 해도 되고, 귀로 본다고 해도 됩니다. 오장육부가 다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병이 들었을 때에는 그 아픈 데가 어디고 빛깔이 어떤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주위의 한두 사람만이 본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학자들이 조사해 본 결과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의 신문마다 보도된 것입니다.

귀로써 보고 눈으로 듣는다(耳見眼聞;이견안문)는 이 말은 본래 불교에 있는 말입니다. 오조 법연 선사도 이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의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법문이지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을 품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중생이 번뇌 망상으로 육근이 서로 막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경계에 도달할수 없
을 뿐이지, 실제로 부사의(不思義)한 해탈경계를 성취하면 무애자재(無碍自在)한 그런 경계가 나타나 육근이 서로서로 통하게 됩니다. 이것이 육근호용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근호용이 되어 모든 것에 무애자재한 경계를 얻을 수 있습니다.

性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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