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집] 제1편 2장 천당(天堂)과 지옥(地獄) 06. 극락설(極樂說)

그렇다면 불교도 역시 종교인데, 영원한 행복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행복을 얻는 방법에는 불합리한 점이 없는지, 그래서 요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납득이 안되는 믿음을 강요하는 점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리 우주과학 시대라고 하더라도, 또 앞으로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가더라도 불교 자체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구애받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다른 종교는 그릇되었다 말하면서 자신의 종교인 불교만 옳다 한다고 반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불교가 펼쳐 온 사상이 허위에 차고 거짓투성이라면, 기독교가 절대신을 부정하였듯이, 불교도 마땅히 팔만대장경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터를 닦아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라고 예외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불교의 경전에도 거짓은 있긴 하지만, 그것은 방편이라 하여 무지한 중생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런 방편으로 ‘극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자꾸 가면 그곳에 극락세계가 있는데 그곳을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 하늘 위에 있다는 천당은 거짓말이고 서쪽으로 가면 있다는 극락세계는 진짜인가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극락세계가 어떤 곳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망원경을 이용하여 찾아보든지 어떻게 하든지 먼저 살펴보고 나서옳지 않으면 믿지 않아야 할 터이고, 만일에 옳다면 누구든지 그곳으로 가서 영원한 행복을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극락세계를 자세하게 설명한 불교 경전으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중에 무량수경(無量壽經)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 있으며 또 무량수의궤경(無量壽儀軌經)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량수경’에서는 저 서방세계를 지나 끝없이 가면 극락세계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이 삼계화택(三界火宅), 사생고해(四生苦海)의 사바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부지런히 염불을 하면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극락세계의 장엄은 참으로 대단하여 천당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런 극락세계에 누구든지 “나무아미타불”만 지극하게 부르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여기에 한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5역죄(五逆罪)를 지은 사람, 곧, 부모를 죽이거나 대 성인을 죽인 사람 또는 교단 화합을 파괴하거나 바른 불법을 비방한 사람 등은 아무리 아미타불을 불러도 극락세계에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에서는, 그와 달리, 극락세계를 아홉 등급(九品)으로 나누고서 5역죄를 지은 사람이나 정법을 비방한 사람이라도 극락세계에 갈 수는 있는데 그런 사람은 가장 낮은 등급인 하품하생(下品下生)에 간다고 말합니다. 또 <무량수의궤경>에서는 5역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한 죄를 지었다 해도 아미타불을 열심히 부르면 상품상생(上品上生)의 가장 좋은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 하는 극락세계에 가는 자격에 대해서 제각기 말이 조금씩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량수경>에서는 5역죄를 지은 사람은 극락세계에 못 간다고 해 놓았는데, <관무량수경>에서는 하품하생에는 갈 수 있다고 한다. <무량수의궤경>에서는 상품상생에까지도 갈 수 있다고 해 놓았으니, 어느 것이 진실인지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의 끝 부분을 보면 “서쪽으로 가면 극락세계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부처님은 법계장신(法界藏身)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계(法界)란 시방(十方)의 법계이니, 곧 부처님 몸이 시방 법계에 가득 차서 그 어느 곳이나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극락세계가 서방(西方)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동방(東方)에도 있고, 북방(北方)에도 있고, 남방(南方)에도 있고 땅 밑이나 하늘 위나 없는 곳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온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고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마음이 부처가 되는 것(是心是佛, 是心作佛)’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것이 아미타불이 아니라, 일체 중생이 모두 다 가지고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또 마음이 부처님인 것이지 마음을 내놓고 달리 부처를 구하려는 것은 마치 불 속에서 얼음을 구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처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 부처인 것입니다. 이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육단심(肉團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방에 가득차 있어 유정(有情), 무정(無情)이 똑같이 갖고 있는 그 마음을 말합니다. 곧 유정도 부처님 마음을 갖고 있고 무정도 부처님 마음을 갖고 있으니 그것이 곧 법계장신(法界藏身)이며 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부처님은 시방세계에 가득 차 있어서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고 밝히지 않고, 왜 서방(西方)에 있다고 하면서 그곳에 갈 수 있느니 없느니 하고 빙빙 돌려서 말씀했는가
?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하나의 방편설(方便說)입니다. 사람들의 지혜가 발달되기 전에는 그 지혜의 정도에 맞추어서, 그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또 그 사람의 지혜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부득이 사실과 꼭 같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서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선의의 거짓말을 해 가면서 지혜를 자꾸자꾸 향상시켜 가면 마침내 참말을 이해할 만큼 성장하게 됩니다. 그 때에는 지금까지 한 말은 참말을 알게 하기 위한 거짓말임을 일깨워 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방편설(方便說) 또는 방편가설(方便假說)이라고 합니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이대로가 극락이라고 하면, 그는 미친 소리라고 비웃거나 아니면 화를 낼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고 있는데 여기가 극락이라니 마치 사람을 놀리는 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현실 이대로가 바로 극락세계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그것은 거짓된 말이라고 부정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 “저 서방에 극락세계가 있으니 부지런히 아마타불을 외고 수행하면 그곳에 갈 수 있다”고 방편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서 열심히 아미타불을 부르며 수행에 열중하게 될 터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염불을 부지런히 외면서 수행에 힘쓰다보면, 그러는 사이에 지식이 늘고 지혜가 향상되면서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는 힘이 차츰차츰 커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얼마 뒤에 부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때에 이르면, 앞에서 일러 준 말은 방편일 따름이요, 사실은 시방세계 이대로가 극락이며 모든 중생이 바로 부처이니 유정과 부정이 모두 부처님 아닌 것이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비로소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性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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