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마음의 눈을 뜨자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이다’라고 말합니다.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즉심시불이라고도 합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에 담겨 있는 만큼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봐야 할 터인데, 누가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다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불교는 모르고 마는 것인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마음 ‘심’자 한 자 있습니다. 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심자 한 자 위에 있어서, 이 한 자의 문제만 옳게 해결하면 일체의 불교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일체 만법을 다 통찰할 수 있고 삼세제불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알게 되면 부처를 알게 됩니다. 마음이 부처이므로 그래서 삼세제불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초지종이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마음의 눈을 뜨자’ 하는 것 아닙니까?

그뿐입니까? 마음의 눈만 뜨고 자기가 먼 천지개벽 전부터 벌써 성불했다는 것, 천지개벽 전부터 성불했으니 현재는 말할 것도 없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성불한 그대로임을 알게 됩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결국 자성을 보는데 그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성불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관법을 한다, 주력을 한다, 경을 읽는다, 다라니를 외우는 등등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서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 참선입니다.

참선! 견성성불하는 데에는 참선이 가장 수승한 방법입니다. 참선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신도나 스님네들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신부나 수녀도 백련암에 와서 3천배 절하고 화두 배워 갑니다. 나한테서 화두 배우려면 3천배 절 안 하면 안 가르쳐 주니까.

며칠 전에도 예수교를 믿는 사람들 셋이 와서 3천배 절하고 갔습니다. 이 사람들한테 내가 항상 말합니다.

“절을 하는데 무슨 조건으로 하느냐 하면, 하느님 반대하고 예수 욕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라고 축원하고 절하라.”

이렇게 말하면 그들도 참 좋아합니다. 이런 것이 종교인의 자세 아닙니까? 우리 종교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좋은 곳으로 가고, 우리 종교 안 믿는 사람은 모두 다 나쁜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면 그는 점잖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를 욕하고 나를 해치려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을 더 존경하고, 그 사람을 더 돕고, 그 사람을 더 좋은 자리에 앉게 하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예수교나 다른 종교인들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톨릭 수도원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왜관에 있는데, 그 수도원의 독일인 원장이 나한테서 화두를 배운 지 1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에도 종종 왔는데 화두 공부는 해볼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 와서 화두를 배운다고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신네들 천주교에서는 바이블 이외에는 무엇으로써 교리의 의지로 삼습니까?”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의 ‘신학대전’ 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아퀴나스는 그 책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자기 마음 가운데 큰 변동이 일어나서 그 책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 버렸는데, 처음에는 금덩어리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 썩은 지푸라기인 줄 알고 차버린 그 책에 매달리지 말고, 그토록 심경이 변화된 그 마음자리, 그것을 한번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화두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익히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도 화두를 배워서 실제로 참선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마음 닦는 근본 공부인 선을 알아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화두를 말하자면 또 문제가 따릅니다. 화두를 가르쳐 주면서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화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옆에서 배우라고 해서 배운다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은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은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고는 뭐라고 뭐라고 아는 체를 합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화두에 대해 또 좋은 법문이 있습니다. 불감 근 선사라는 스님의 법문입니다.

오색 비단 구름 위에 신선이 나타나서
손에 든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
누구나 빨리 신선의 얼굴을 볼 것이요
신선의 손에 든 부채는 보지 말아라.

생각해 보십시오. 신선이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빨간 부채로 낯을 가리었습니다. 신선을 보기는 봐야겠는데, 낯을 가리는 부채를 봤다고 신선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화두에 있어서는 모든 법문이 다 이렇습니다. ‘정전백자수자’니 ‘삼서근’이니 ‘조주무자’니 하는 것은 다 손에 든 부채입니다. 부채! 눈에 드러난 것은 부채일 뿐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신선을 본 사람이 아닙니다. 빨간 부채를 보고서 신선을 보았다고 하면 그 말 믿어서 되겠습니까?

화두는 암호인데 이 암호의 내용을 어떻게 해야 풀 수 있는가? 잠이 푹 들더라도 일여한 데에서 깨쳐야만 풀 수 있고 그 전에는 못 푼다는 것, 이렇듯 화두를 참구하는 자세가 근본적으로 딱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을 확실히 뜨면, 이것이 견성인 동시에 뜰 앞의 잣나무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란 것은 팔만대장경에 그토록 많고 많지만, 똘똘 뭉치면 마음 ‘심’자 한 자에 있습니다. 가장 간단합니다. 마음 ‘심’자.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 일체 만법을 다 알 수 있는 것이고, 일체 법을 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란 자성을 본다는 것인데, 견성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공부 부지런히 부지런히 하여 화두를 바로 아는 사람, 마음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냥 “견성하자” “성불하자” 하면 너무 불교 전문적인 것이 되어 일반 민중과는 거리가 멀어 집니다. “마음의 눈을 뜨자” 하면 누구에게나 좀 가깝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또 사실도 그렇고, 그래서 “마음의 눈을 뜨자”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해서 하나라도 좋고 반쪽이라도 좋으니, 실지로 마음의 눈을 바로 뜬 이런 사람이 생겨서 부처님 해면을 바로 잇도록 노력합시다.

오색 비단 구름 위에 신선이 나타나서
손에 든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
누구나 빨리 신선의 얼굴을 볼 것이요
신선의 손에 든 부채는 보지 말아라.

‘뜰 앞의 잣나무’니 ‘삼서근’이니 ‘마른 똥 막대기’니 하는 것은 다 손에 든 부채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신선을 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확실히 뜨면,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보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부지런히 공부하여 화두를 바로 아는 사람, 즉 마음의 눈을 바로 뜬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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