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정승과 세 분의 돌부처

조 정승과 세 분의 돌부처

“대감,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비록 어리고 미숙하오나 정승대감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초조한 마음으로 어떻게 국가대사를 치를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굳게 잡수시고 신표를 정하십시오.” 이성계의 조선 개국과 함께 공신으로서 정승의 자리에 오른 조공은 사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자네들은 누구며, 신표라니 무슨 신표란 말인가?” 세명의 사미는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이 주막집 뒤로 한 5리쯤 올라가면 옛날 아도화화상이 창건했다는 큰 절터가 하나 있지요. 그곳에 한 길이 넘는 세 분의 돌부처가 있습니다.

이 부처님들은 절이 폐허가 된 이후로 온갖 눈비와 바람과 서리를 맞으며 앉아 계십니다.” “그래서?” “그 부처님들을 위해 절을 하나 장엄하게 지어드리십시오. 만약 그렇게만 하신다면 그 공덕으로 정승대감님은 국가 대사를 원만히 치르시고 귀국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한시가 바쁜 몸인데 어느 하가에 절을 지어 부처님을 모신단 말이냐?” 사미들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랫사람을 시키십시오.” “아랫사람?” “그렇습니다. 대감님은 비록 어명을 받고 길을 가시기는 하지만 이 나라 정승이십니다.

황해 감사에게 명만 내리시면 곧바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겠습니까?” “허! 듣고 보니 자네들 말에도 일리가 있군 그래. 그런데 만약 명나라에 가서 죽게되면 아무리 절을 지어 부처님을 모신들 무슨 공덕이 돌아오겠는가?” “대감님꼐서는 어찌 그리 마음 좁게 가지십니까? 대감님께서는 ‘관음경’을 즐겨 읽으시지요? 거기에 보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관세음보살님을 지성으로 염하면 어떠한 환난으로부터도 다 벗어 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오니 대감님께서 절만 지으시면 살아 돌아오시는 것은 저희가 보장을 하겠습니다. 아! 물론 큰일도 무난히 마무리 지으실테고요.” 사미승들은 거듭 강조했다. “꼭 그렇게 하시면 아무일 없이 무난하게 일을 마치시고 공덕도 쌓게 되실 것입니다.

부디 명심하옵소서. 대감님” 말을 마치자 세 사미는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좌선에 들어 있던 조 정승은 선정에서 깨어나 주막집 여인을 불렀다. 그러자 여인 대신 남자가 나왔다. “여봐라. 여기 뒷산 골짜기로 5리쯤 들어가면 옛날 큰 절터가 있느냐?” 주막집 사내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예, 예. 있습죠. 거기에는 지금 세 분의 돌부처가 풍상을 겪고 있습니다. 몸의 절반은 흙 속에 파묻힌 채로요” “알았다.

물러가거라. 내 지금 당장 올라가서 뵈오리라.” 조정승 일행은 이른 새벽 이슬을 헤치고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상큼한 새벽 공기가 쏴아 얼굴을 때렸다. 기분좋은 새벽이었다. 수천만 년을 그렇게 살아왔을 숲과 바위들에게 문득 자연의 나이를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을 오르고 있는데, 문득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이 기왓장을 보십시오. 아마 이 근처가 절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 흩어져서 찾아 보도록 하라”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절터를 찾았다.

이윽고 한 곳에 다 쓰러져가는 건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붕은 움푹 꺼졌고 그 깨진 자리에 쑥대가 하늘을 높은줄 모르고 자라 있었다. 마당이고 요사채고 담장이고 온통 잡초로 무성했다. 금방이라도 구렁이 몇 마리쯤 나올 것 같은 폐허였다.

이제 날은 훤히 밝아서 주위가 완연히 눈에 들어왔다. 조정승은 쓰러져가는 건물들을 바라보며 언젠가 부처님의 경전 속에서 읽었던 구절을 생각했다. 모든 외형적인 것들은 덧없고 내면의 세계도 찾아보면 다만 공일 뿐 본질은 없다. 생겼다 스러지고 다시 생겨나는 그러한 반복들에 대해서 마음을 초월하여 집착하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즐거움 여래는 이것을 열반이라 하노라. 이 세상 어느 하나 영원한 것은 없다. 뽕나무 밭이 변하여 푸른 바닷가 되고 푸른바다는 다시 융기하여 높은 산 깊은 골짜기가 되기도 한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 덧없다는 것은 모든 사물의 끝없는 변천과 변화 작용을 의미한다. 산과 들도, 강과 바다도, 바위와 온갖 초목들도 끊임없이 변화를 계속한다. 조류도 곤충들도 날고 기는 모든 동물들도 이 땅의 역사를 함께 갈무리하면서 변화를 시도해 왔고 또 변화해 갈 것이다. 초목과 암석과 흙과 바람이 모여 건물을 이루었다가 다시 세월의 이끼와 풍상을 안은 채 스러져 버리고 또 다른 인연에 의해 건축물은 형성될 것이다.

조정승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불교 경전을 잠시도 손에서 놓은 일이 없었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무상’이라는 숙어를 이날만큼 절실히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주역)이라는 유교 경전도 따지고 보면 변화 작용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역)이란 변화의 원리다.

그 변화의 원리를 주나라 때 이미 생각하고 정리했다하여(주역)이라 하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한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무상)이란 말도 바로 변화의 원리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 이처럼 모든 가르침의 궁극적인 것은 하나로 만나는 것인가.” 조공 정승이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사신 중의 한 사람이 다가와 다소곳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대감마님! 저기 세 분의 돌부처가 있습니다 가보시지요.” 정신이 퍼뜩 든 정승 조공은 그가 안내하는 쪽으로 몇 걸음 발길을 옮겼다.

과연 거기에 흑갈색의 돌부처가 머리에 잡초와 먼지와 흙을 인 채 앉아 있었다. 이미 허리 아래로는 퇴적물들이 쌓여 입상인지 좌상인지 분간키 어려웠다. 그러나 손의 위치로 보아 좌불상이 분명했다.

조 정승은 머리를 숙였다. 무릎을 꿇고 불상 앞에서 합장을 하고 기도했다. “부처님, 풍상에 마멸되어 가시는 부처님을 뵈오니, 문득 제신세가 가여워지는 것은 어쩐 일이옵니까? 저는 지금 태조의 명을 받고 명나라로 가는 길입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길입니다.

부처님께서 자비가 있으시다면 저를 위해 가피를 내려 주시옵소서. 제 비록 미약하오나 한 나라의 정승으로서 부처님을 위해 대가람을 지어드리도록 조처하겠습니다. 만일 제가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면 그때 부처님을 아름다운 대웅전 안에서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조공 정승은 명나라로 태조의 어명을 받고 가는 길이었다. 태조 이성계(1392–1398재위)는 나라를 세운 후에 국호를 제정코자 하였다.

그는 두 가지의 국호를 생각했다. 하나는 예로부터 한민족이 고조선의 자손임을 나타내는(조선)이라는 국호였고, 다른 하나는 태조의 고향이 함흥 강령 땅이었으므로 그 고장의 이름을 각기 한자씩 따서 함령이라 지은 것이었다. 조선이라 할 것인가 함령으로 할 것인가를 태조와 그 조정에 속한 권한이 아니었다.

그 권한은 중국에 있었다. 우리나라는 고려 중엽 이후 중국의 속국으로 청해 있었다. 아니, 고려 중엽이 아니라 삼국시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부터 항상 중국의 재가를 받아 모든 국사를 처리해 왔으니, 우리 민족은 훨씬 오래전부터 비운 속에 살아왔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성계는 공민왕의 신하로 북벌에 공이 큰 장군이었다.

그는 고려 조정이 흔들리는 틈을 이용하여 창칼을 조정으로 돌렸고 자기 휘하에 있던 군대를 일으켜 쿠데타를 성공하였다. 그는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그 뒤를 이어 우왕(1374–1388제위)와 창왕(1388–1389 재위) 그리고 공양왕(1389–1392 재위) 등을 차례로 왕위에 올려 놓았다가는 폐위시켰다. 이른바 과도기적 정부에 있어서 이들 왕은 허수아비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었다.

다시 말해, 이성계의 치밀한 계획하에 놀아난 꼭두각시 왕들이었다. 공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이성계는 스스로 보위에 올랐다. 그는 그러나 한 가지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고려의 멸망을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던 수많은 기득권층들은 죽음으로써 이성계에게 항거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고려의 멸망이 안타까워서라기보다는 그네들이 지금까지 누려 왔던 부귀영화를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기득권의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성계는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전개, 새로운 정치이념과 정치질서를 주창했다.

당시 중국은 주원장이 명의 황제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주원장은 원나라 조정을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명나라를 세운 인물이었다. 그는 명의 태조였다. 명의 태조 또한 군 출신으로 막강한 군사력과 뛰어난 통솔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주원장의 정치스타일은 상명하달의 철저한 군인정신에 의해 이루어졌고 뜻을 거스르는 자는 가차없이 참수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국호를 두 가지로 압축하기는 했지만 이를 그냥 쓸 수 없었다. 중국 명제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원장은 자신도 쿠데타로 명을 세웠으면서 자신의 처지는 한 치도 생각지 않고 이성계가 역신배장이라하여 그 의견을 무조건 무시하고 깍아 내렸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공신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짐이 경들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국호에 관한 질문 때문이오. 조선으로 하느냐 함령으로 하느냐에 대해 명 황제의 재가를 받아와야 하는데 경들 중 누가 앞장 서서 이 일을 해주겠소?” 신하들은 어느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태조가 다시 말했다.

“경들은 귀가 먹은 거요? 짐이 하고 있는 말이 들리지 않소?” “황공하여이다, 전하!” 대신들은 한결같이 황공하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태조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도 경들이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소? 충신이란 나라가 곤경에 처했을 때 앞장서서 그 자신을 불사르는 사람이오. 태평성대의 충신 노릇이야 누군들 못하겠소?” 그때 정승 조공이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전하, 소신이 다녀오겠습니다. 하오니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태조는 조 정승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시오, 조 정승!” “지금까지 국호의 재가 문제 때문에 명나라에 간 사신이 한 두 사람이 아니오. 그들은 모두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소. 명제의 칼날아래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오. 경은 그 사실을 알고 있소?” “황공하여이다.

전하. 신 이미 알고 있사옵고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태조가 약간 누그러진 어조로, 그러나 힘이 담긴 어조로 물었다. “살아서 돌아올 기약이 없는데도 경은 자진해서 갈 수 있겠소? 만약 자신이 없다면 짐이 어명으로 다른 사람을 보내겠소. 사실, 짐은 조정승과 같은 인물을 잃고 싶지가 않소.”

“전하, 신이 비록 미약하오나 국사를 위해 이 몸을 바치겠나이다. 다른 사람을 보내실 양이면 신이 가겠사오니 윤허하여 주옵소서.” 그제서야 다른 신하들도 본래의 안색을 되찾았다. 그런 상황을 바라보는 태조는 정치 현실의 냉정함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평소에 임금인 자기를 위해 어떠한 일도 다 감내해낼 듯이 아부하고 충성하는 듯하더니 막상 죽음의 길을 눈앞에 두고는 서로 발뺌하는 신하들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는 자신이 왜 정치에 뛰어들어 임금이 되었는지, 스스로가 밉고 저주스럽기까지 했다.

“좋소. 그럼, 경이 짐을 위하고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이일을 반드시 성취시켜 주시오.” 그렇게 해서 조 정승은 명나라로 가는 길이었고, 황해도 서흥 땅에 이르러 하룻밤을 유숙하다가 사미들을 만나 이 절터에 까지 오게 된 것이다.

조 정승은 산에서 내려오는 즉시 황해 감사를 불러 그 절터에 새롭게 대가람을 세우고 세 분의 돌부처님을 모시도록 명을 내렸다. 황해 감사는 정승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절을 짓는 일이 시작되었다. 터를 다시 닦고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얹었다. 서까래를 걸치고 기와를 얹었다. 황해 감사가 직접 나서서 감독하였으므로 불사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한편 조 정승 일행은 명나라에 도착하여 명제인 주원장을 알현했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가 올린 친서를 전달하였다. 다 읽고 난 명제가 호통을 쳤다. “무엇이라고? 국호를 제정해 달라고? 군주를 섬기는 신하로서 그 군주를 치고 자리를 차지한 대역무도한 자가 이제 와서 국호를 제멋대로 정해 놓고 하나를 선택해 달라고? 당장 저자의 목을 베어라” 조 정승 일행은 단 한마디의 변명할 기회도 없었다. 하늘이 노래졌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이토록 쉽게 죽음을 맞이할 줄은 몰랐다. 일행은 형장으로 끌려갔다. 사방으로 탁 트인 넓은 광장의 한가운데 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층계로 이루어진 단이 있었는데 그곳은 집행관이 앉는 자리였다.

일행은 한가운데 놓여진 의자에 손을 뒤로 묶인 채 앉혀졌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렸으나 조 정승은 가리지 않았다. 50평생을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하늘은 맑게 개었으나 정승에게는 회색으로만 보였다. 오뉴월의 더위가 더욱 숨막히게 느껴졌다

. “아! 이젠 가는구나, 시운을 잘못 타서 이렇게 어이 없이 가는구나. 허나 한편 생각하면 그래도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정승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그다지 부러울 것도 없지 않으랴. 그래. 벼슬로서야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보았으니…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할까?” 조 정승은 자기보다도 일행으로 따라온 다른 사신들이 측은했다.

그들도 줄을 잘못 섰다가 죽음을 당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부처님, 저와 같이 온 다른 사신 일행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시고 가피를 내리옵소서. 이 몸 하나 없어지는 것은 괜찮사오나 저로 인하여 뜻하지 않게 죽음을 당하는 저의 일행들은 너무나도 가엾습니다.

부처님, 자비가 있으시다 하오면 저보다는 저들을 위해 나누어 주소서.” 그때 집행관이 조정승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가 거만스레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말이 있는가?” 조정승이 대답했다.

“있소. 물한사발과 자리 한 닢만 준비해 주시오.” “여봐라. 이 자에게 물 한 사발과 자리 한 닢을 갖다 주어라.” 이윽고 자리가 깔렸고 소반에 맑은 물 한 그릇이놓여졌다. 조정승이 말했다. 잠시 이 결박을 풀어 주소.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릴 곳이 있소.” “결박을 풀어라.” 조정승은 가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태조 성군이시여! 신 조공은 멀리 명나라에서 죽음을 만나이다. 국가 대사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불충을 용서하옵소서. 성군이시여, 만수무강하시옵고 조국의 대업이 만대에 이어지길 바라나이다.

어머님, 아버님! 부모님의 은혜는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사온데 늙으신 부모님보다 앞서 가는 자식의 불효를 용서하옵소서. 더욱이 막중한 임무를 띠고 와서도 그를 완수하지 못했사오니 우선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누가 됨을 어찌하겠나이까? 다시 아뢰나이다. 저와 함께 이곳 명나라에 사신으로 온 일행들 가족에게도 면목이 없습니다.

이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기야 여기서 지금 잘잘못을 따질 처지도 아닙니다. 저 사람들, 참으로 착하고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저들에게 한없이 미안함을 느낌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시여, 저는 이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는 길에 완공된 대가람에서 부처님을 뵙고자 하였습니다만 이제 이렇게 가오니, 이것이 만약 전생에 지은 업연이라면 달게 받겠나이다.”

조 정승은 말을 마치고 동쪽을 향해 네 번 큰 절을 올렸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를 흘러내렸다. 집행관이 물었다. “더 할 말은?” “이젠 없소” “다시 묶어라” 조 정승은 다시 의자에 묶인 채 앉혀졌다. 집행관이 소리쳤다. “집행하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쪽에 서있던 두 사람의 망나니가 입으로 물을 머금어 칼탈에 뿌리더니 한가운데로 뛰어나왔다. 망나니들은 칼춤을 추었다.

햇살을 받아 칼날에서 푸른 서기가 번뜩였다. 망나니들의 칼춤을 보며 오히려 조 정승은 마음이 덤덤해졌다. 옆으로 돌아보니 일행들의 표정은 이미 살아있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비록 눈은 가렸지만 피부색과 움츠린 상태로 보아 이미 그들은 죽어 있었다.

조정승은 문득 ‘과음경’의 내용이 생각났다. 설사 죽음을 당해서라도 관세음보살을 지성을 염하면 환난을 벗어나고 도적의 난을 벗어나며 자연의 재해까지도 입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조 정승은 염불을 외우기 시작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조 정승은 염불삼매에 들어갔다. 집행관의 신호에 따라 망나니의 칼이 조 정승의 목을 향해 날았다. 시간은 미시였다. “사악! 철그럭.” 망나니의 칼이 조 정승의 목에 맞자 두 동강이 나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망나니도 집행관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또 다른 망나니가 집행관의 신호대로 칼을 내리쳤다.

“사악! 철그럭.” 칼이 두 개가 부러졌다. 집행관이 이마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망나니 역시 땀을 비오듯 흘렸다. 집행관이 소리쳤다. “다른 칼을 가져오너라” 칼 두 개가 다시 망나니의 손에 들려졌다. 칼춤을 추던 망나니가 집행관의 수호신에 따라 다시 칼을 휘둘렀다.

칼은 여전히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조 정승의 목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집행관은 명제에게 사실대로 보고했다. “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그자의 목에는 상처 자국 하나 남지 않고 칼만 부러지고 있습니다. 이미 세 개나 되는 칼이 부러졌사옵니다. 통촉하옵소서. 아무래도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하옵니다.

얘기를 듣고 난 명 태조 주원장이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가서 보리라.” 명 태조가 사형장에 도착해보니 부러진 칼날 세 개가 조 정승의 옆에 떨어져 있었고 망나니는 초주검이 되어 벌벌 떨면서 엎드려 있었다. 한편, 조 정승은 여전히 관세음보살 염불삼매에 들어 있었다.

주위가 시끄럽고 사람들이 에워싸는 것을 보면서 이제야 비로서 사형을 집행하려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 옆에 부러진 칼날이 보였다. 명제가 집행관에게 명하였다

“어서, 이들의 결박을 풀지 않고 뭣들 하는 게냐?” 명제는 조 정승과 일행들의 사형 집행을 중단하고 특사로 풀어주었다. 명제는 손수 조 정승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짐이 그대를 알아보지 못하고 참하려 하였으니 참으로 미안한 일이오. 짐이 그대신 그대에게 사과하는 뜻으로 비단 5백필과 황금 1천 냥을 내리겠소. 그리고 국호는(조선)으로 하시오” 조 정승은 감개무량하기 이를 데 없없다.

그들은 명제 앞에 부복하여 감사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조 정승은 무엇보다 책임을 완수한 것이 제일 기뻤으며 그런 일들이 바로 자신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데 대해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일행은 명제가 하사하는 비단 5백 필과 황금 1천 냥을 싣고 돌아왔다. 오는 길에 압록강을 건너 평양을 거치고 황해도에 들어섰다.

서흥 땅이 가까워졌다. 연도에는 조 정승 일행이 국가대사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다는 전갈이 먼저 전해진 탓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환영을 했다. 그것은 이미 압록강을 건널때부터 줄곧 이어져 온 환영의 물결이었다.

조 정승 일행은 전에 찾아뵈었던 부처님을 참배하기 위해 산으로 올랐다. 거기에는 이미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황해 감사와 신막(신흥) 군수가 영접을 나왔다. 조 정승이 먼저 말했다. “오늘 이곳에 무슨 일이라도 있소이까?”

“예, 정승대감님. 오늘이 바로 이 절의 낙성식이 있는 날입니다. 그건 그렇고 먼 길 여로에 옥체는 여전하시옵니까? 문안이 늦어 황송하옵니다. “아! 나는 괜찮소. 낙성식이라! 거 참, 그렇다면 내가 오기는 아주 때맞추어 잘 온 셈이구료.” 조 정승 일행과 황해 감사, 신막 군수는 함께 새로 완공된 절로 올라갔다.

법당은 참으로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장엄한 건축 조형이었다. 날아갈 듯한 추녀와 마치 기지개를 켜는 듯한 늘씬한 용마루며, 드넓은 마당에 우뚝 서 있는 정중탑, 오색찬란한 단청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요사채와 범종각, 그리고 종루에 걸린 범종이며 법고도 그 육중하고도 날렵한 모습들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정승대감님, 절이 마음에 드십니까?” “참 잘 지은 건물이오. 건물이 앉은 자리도 지형으로 보아 제자리에 앉았을뿐더러 무엇보다 저 대웅전 뒤에 높이 솟은 봉우리로부터 흘러오는 맥을 잘 소통시키고 있구려. 그나저나 이 일은 며칠이나 걸린 것이오?” 황해 감사가 대답했다.

“제가 직접 감독을 했습니다만 그래도 한 달 하고도 이틀이 지났습니다.” “한달 이틀이라, 그러고 보니 우리 사신 일행이 명나라에 갔다온 시간이 한달 이틀이 걸린 셈이구료” 조 정승 일행은 법당에 들어갔다. 우선 참배를 올리고 난 조정승은 부처님 쪽으로 다가갔다.

“부처님께서 바람과 서리, 눈, 비와 이슬을 맞고 계시더니 이제 편히 쉬실 수 있게 되었나이다. 또한 저희 일행이 이렇게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옴도 바로 부처님의 가호로 알고 있나이다” 부처님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던 조 정승은 깜짝 놀랐다.

부처님의 목에, 그것도 돌부처의 목에 칼자국이 있었으며 거기서 피가 흐른 자국도 선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황해 감사, 이 부처님의 목 부분이 왜 이렇게 되었소? 이런 이런, 세분이 다 그러시네.” “예, 그러니까 지금부터 꼭 보름 전의 되옵니다.

그날 낮 미시가 되면서 문득 부처님을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법당에 들어갔었습니다. 물론 그때 신막 군수도 함께 있었습니다. 부처님을 향해 참배를 드리고 있는데 부처님 한 분이 탁자 위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허!” “그래 달려가 부처님을 다시 모시면서 살펴보니 목에 칼자국이 나 있고 피가 흘렀습니다”

“어허. 저런!” “부처님을 다시 모시고 있는데 다시 옆에 계시던 부처님이 똑같은 상태로 상처를 입으며 떨어졌고, 그 다음 부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이토록 부처님 세 분이 모두 목에 칼 자국이 있으며 피를 흘린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옵니다” 황해 감사와 신막 군수는 마치 자신들의 잘못이라도 되는 양 조 정승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벌벌떨었다.

조 정승은 손가락으로 날짜를 꼽아 보았다. 그리고 미시라고 했다면 틀림없이 그날 그 시각이었다. 조 정승은 부처님을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흘렸다. 불안해 하던 감사와 군수가 고개를 들고 조 정승에게 물었다. “어인 일로 눈물을 흘리십니까? 만일 저희들이 잘못하였다면 벌을 내리소서.” 조 정승은 눈물을 닦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감사와 군수의 허물이 아니오. 그리고 그 누구의 허물도 아니오. 이는 이 세분의 부처님이 바로 나를 위하고 우리 일행을 위해 대신 칼날을 받으신 것이오” “옛?” 조 정승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황해 감사와 신막 군수, 그리고 그 절에 참석했던 수 많은 사람들은 비로서 부처님의 신통력과 크나큰 자비를 깊이 찬양했다.

이 말이 태조 이성계에게 전해지자 이성계는 절 이름을 속명사라 하고 손수 현판까지 써주었으며, 나라에서 특별히 보호하도록 하였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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