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몸에 깃든 영혼

다른 몸에 깃든 영혼

“여보, 주무세요? 내 말 좀 들으세요. 여보, 여보!” 왕랑은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리나는 창문가를 향해 갔다. 한밤중이었으나 반달이 어렴풋이 밖을 비취 주고 있었다. 왕랑은 혼자였다. 한밤중에 생각지도 않은 여인이 창문을 두르리며 부르는 소리에 호기심이 일었다.

한편 무섭기도 했지만 오히려 호기심 쪽이 강했다. “누구시오? 이 한밤중에 나를 부르는 여인이?” 왕랑은 자신의 말소리에 실려 나가는 두려움으로 인해 머리끝이 쭈뼛했다. “저예요, 저를 모르겠어요? 11년 전에 세상을 떠난 당신의 아내 송씨예요.” 왕랑은 죽은 아내 송씨를 생각했다. 참 좋은 사람이었다.

뜻하지 않은 사고만 아니었다면 백년해로했을 터인데, 산에 올랐다가 실족하여 그만 먼저 저 세상으로 간 것이다. 생전의 아내와 자신은 언제나 한마음 한뜻이었다. 함경남도 길주에서 오붓한 생활을 영위했었다. 그는 아내가 죽은 후에도 새 장가 들 생각을 하지 않고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홀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내가 이 외로운 밤에 창문을 두르리고 있는 것이다. “아니,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소? 당신은 이미 세상을 떠나지 않았소.” “그래요. 하지만 꼭 당부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왔어요.” “당부라니, 무슨 당부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내가 세상을 떠난 지 11년이 되었습니다만, 염부에서 아직 완전한 심판이 되질 않아 새로운 몸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아니, 아직도?” “그래요. 당신이 와야만 판결이 난다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의 목숨이 이 밤을 지나고 나면 끝나게 됩니다. 내일 아침에 다섯 명의 저승사자가 당신을 데리러 올 것입니다.” 왕랑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삶이 이 밤으로 끝나게 되었다니. 왕랑이 물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겠소?” “옛날 생각나요? 왜, 언젠가 우리 이웃집 안씨 보살님이 염불하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가기를 발원하는 것을 보고 비방하지 않았습니까?” “음, 그랬지.” “게다가 시끄럽다고 욕설까지 퍼부었잖아요? 그런데 죄 가운데는 남의 선행을 비방하는 죄가 제일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오면 나와 함께 무간지옥에 보낸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신은 지금 바로 목욕재계하고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나무아미타불’을 염불을 하십시오.

그러지 않고는 결코 그 죄를 면할 수가 없어요. 부탁합니다. 그럼 저는 가겠어요.” 그녀는 사라졌다. 왕랑은 다급했다. 즉시 목욕재계하고 방을 깨끗이 닦은 뒤 서쪽 벽에 ‘나무아미타불’을 써 붙이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향불을 피우고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불렀다.

그는 염불삼매에 들었다. 시간을 초월했다. 오로지 ‘나무아미타불’만이 이어질 따름이었다. 이튿날 여명 무렵, 과연 다섯 명의 저승사자가 왔다. 저승사자들은 염불삼매에 들어 있는 왕랑을 보자 저들끼리 수근거렸다. “말 듣기 하고는 전혀 다르군.” “그러게 말이야. 참으로 열심히 염불하고 있는 걸.” “저런 사람을 어떻게 함부로 데려갈 수 있겠나.

안 되지, 아무렴.” 그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왕랑에게 큰절을 올렸다. 왕랑이 염불삼매에서 깨어나 저승사자에게 물었다. “어인 일이시며,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저승사자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저희들은 저승사자입니다. 염라대왕의 명을 받고 당신을 데리러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이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단정히 앉아 염불삼매에 들어 계시니 함부로 다룰 수가 없군요.”

왕랑이 말했다. “나는 염불삼매를 통해서 이미 나고 죽음을 초월했소. 자 함께 갑시다.” 왈랑이 저승사자를 따라 염부에 도착했다. 염라대왕은 저승사자를 몰아쳤다. “왜, 이리 지체했느냐? 그리고 꽁꽁 묶어 오라고 했는데 어찌하여 그냥 데리고 왔느냐?”

저승사자들은 당황하면서 말했다. “사실 이 사람의 집에 이르러 보니, 이 사람이 집안을 깨끗이 정돈하고 가부좌를 한 채 ‘나무아미타불’ 염불삼매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차마 대왕의 명대로 끌고 올 수 없었습니다.” 왕랑이 말을 받아 말했다.

“염라대왕이시여, 저는 이미 생사를 초월하였소. 어디든 좋으니 마음대로 보내시오.” 염라대왕의 태도가 급변하였다. 왕랑의 앞으로 걸어 나와 정중히 목례를 하였다. 염라대왕뿐만 아니라 시왕이 모두 걸어나와 왕랑에게 귀빈의 예를 다하였다. 염라대왕이 말했다. “그대 내외가 세상에 살 때, 염불하는 이웃집 안씨 노보살을 보고 비방하면서 꾸짖고 욕설을 하였기에 우선 그대의 아내를 데려왔소.

그리고 그대의 생명이 다하기를 기다려 함께 무간지옥에 보내려고 했소. 그런데 이제 사자의 말과 당신의 말을 종합해 보니, 당신의 참회기도가 분명히 있기는 있는 듯하고, 따라서 당신의 모습에서 생사의 두려운 모습을 찾을 수 없구려.”

왕랑은 태연히 듣고 있었다. 염라대왕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당신은 염불삼매에 들어 오로지 아미타불을 염한다하니 당신의 죄를 용서하겠소. 다신 인간세상에 보내여 30년을 더 살게 하겠소. 그러니 부디 거두어 주시오.” 옆에 있던 최판관이 말했다. “왕랑은 세상에 돌아가면 시신이 아직 썩지 않았으므로 다시 살아날 수가 있겠습니다만,

송씨 여인은 죽은 지 이미 11년이나 되었습니다. 시체가 썩어 이미 흙으로, 물로, 불로, 바람으로 돌아갔으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염라대왕은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왕랑이 말했다. “길주 군수의 딸이 지금 스물 한 살입니다.

그런데 명이 다하여 이틀 전에 죽은 것을 보고 왔습니다. 아직 그 시신이 그대로 있을 터이니, 가능하다면 송씨의 혼령을 그녀에게 의탁하면 어떻겠습니까?” 염라대왕은 무릎을 치면서 좋아했다. “거 참 괜찮은 일이다.” 그리하여 왕랑과 그의 아내 송씨 여인은 다시 인간세계로 오게 되었다. 염라대왕은 왕랑에게 말했다.

“옆집 노보살 안씨는 염불을 지극정성으로 한 공덕이 있어 앞으로 3년 뒤에 목숨을 마치고는 바로 극락세계에 날 것이오. 그러니 당신이 만약 인간세계에 나가거든 부모님과 같이 생각하면서 잘 모셔 주기 바라오.” 왕랑은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

온 가족들은 왕랑의 환생을 기뻐하고 있었다. 그때 길주 군수의 딸도 함께 살아났다. 그들은 그 동안 염부에서 있었던 얘기를 길주 군수에게 말했다. 얘기를 다 듣고 난 길주 군수는 자기의 딸을 왕랑에게 시집보냈다. 왕랑은 그 뒤 30년을 더 살아 80세를 누리고 부인은 50세가 되었다. 거기서 새로운 자녀가 태어났다.

왕랑은 인간세상에 와서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며 염불삼매를 닦는 한편,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위해 자선을 베풀었다. 또한 이웃집 안씨 노보살은 왕랑이 되살아난 지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염불을 많이 한 공덕으로 평화롭게 삶을 마감했다.

어쨌든 송씨 여인은 길주 군수의 딸에 그 혼령을 의탁해서 되살아났고, 왕랑은 그녀를 맞이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그들의 그러한 삶의 모습을 보고 온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이 얘기는 함경남도 길주군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아름다운 불교설화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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