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돈하고도 이별한 지 이미 오래 되었소
경허선사가 구한말의 불교교단을 이끌고 있던 월초스님(1858~1934)이주지로 계시던 광릉 봉선사에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불교교육기관인 명진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한월초스님은 경허선사를 반가히 맞으며 말했다.
“오늘 스님들에게 법문을 해주신다면 곡차를 실컷 대접하겠습니다.”
경허선사는 이미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는 표정으로 나직히 대답했다.
“나는 곡차를 못마실 지언정 법문은 못하겠습니다.
법문이라는 법문은 모두 흐르는 물에 다 씻어버렸소.”
선승 경허의 심정을 헤아린 월초스님은 곡차를 대접한 뒤 다음날 떠나는 경허선사에게 노자를 내밀었다.
경허선사는 월초스님의 정성이 담긴 노란 봉투를 바라보며 웃었다.
“고맙지만 나는 돈하고도 이별한 지 이미 오래 되었소.”
표표히 봉선사의 산문을 떠난 경허선사는 북쪽으로 발길을 옮겨 안변석왕사 오백나한의 개채(改彩)불사의 증명법사로 모습을 보인 것을 끝으로 함경남도 삼수, 갑산, 장진 등지에 자신을 감추고 만다.
많은 이야기들이 흘러다니고 있지만 정직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선승 경허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했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단지 우리는 그가 숱한 기행과 일화를 뿌리면서 섬광과도 같은 삶을 산 선승이었다는 사실만을 이렇게 저렇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애증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경허가 그려낸 삶의 초상은 누가 손을 댈 지라도 결국은 영원히 해독되지 않는 비밀로 남는다. 바로 고독한 인간상의 전형인 것이다.
그래서 경허의 무대에서는 지금까지 쓸쓸한 모노 드라마가 공연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승려로서의 존재가 가장 돋 보일 56세의 나이를 뒤로 하고 세간의 풍진속에 자신을 묻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경허선사가 북쪽으로 자취를 감추기 직전 들린 봉선사에서의 이야기를 10여년도 훨씬 전에 수덕사의 만허노장님께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노장님의 이야기도 빛이 바래고 너덜거리는 기억의 한조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돈과 정치의 독기로 오염되고 시들어가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법문이라는 법문은 모두 흐르는 물에 씻어버렸다’라는 그 사람,’돈하고 이별한 지 이미 오래 되었다’라는 그 사람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가슴을 저리게 하고 아프게 만드는 것인가. 그래, 가슴이 저리고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