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화상의 비래방장
고구려 본기에 이런 말이 있다.
고구려 말기인 무덕 정관 연간에 이 나라 사람들이 오두미교(五斗米敎=도교)를 다투어서 신봉했다.
당나라 고조(高祖)는 이 소식을 듣고, 도사를 보내어 천존상(天尊像)을 부치고 도덕경(道德經)을 가져 가르치게 하니 왕은 백성과 함께 그것을 들었다.
그 때는 곧 제 27대 영류왕 즉위 7년인 무덕 7년 갑신(624)이었다.
이듬해 고구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불교와 도교 배우기를 청하니, 당나라 황제―고조를 이른다―는 이를 허락했다.
보장왕이 왕위에 오름에 이르러 또한 유교·불교·도교를 모두 일으키려 하니, 그때 총애 받던 재상 개소문(蓋蘇文)이 왕에게 말했다.
「유교와 불교는 다 성하나 도교는 성하지 못하니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구합시다.」
이 때 보덕 화상은 반룡사(盤龍寺)에 있었는데 도교가 정도(正道=불교)에 대치함으로써 국운이 위태하게 될 것을 민망히 여겨 여러번 왕에게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신력(神力)으로써 방장(方丈)을 날려 남쪽으로 완산주 고대산에 옮겨 거기서 살았다.
이때는 곧 영친 원년 경술(650) 6월 이었다. 얼마 후 나라가 망했다.
그의 제자 무상화상(無上和尙)은 제자, 김취(金趣)등과 함께 금동사(金洞寺)를 세웠고, 적멸(寂滅:의융(義融)의 두 법사는 진구사(珍丘寺)를 세웠고,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를 세웠고, 일승(一乘)은 심정(心正)·대원(大原)등과 함께 대원사(大原寺)를 세웠고, 수정(水淨)은 유마사(維摩寺)를세웠고, 사대(四大)는 계육(契育)을 세웠고,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세웠다.
<三國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