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 신라 불교의 기초를 열다
신라 본기(本記) 제 4권에 이런 말이 있다.
제 19대 눌지왕 때에 사신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 :경북 선산)에 이르자, 그 고을 사람 모례(毛禮·毛祿)는 자기 집 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고 그를 있게 했다.
이 때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시켜 의복과 향물(香物)을 보내왔는데, 신라의 임금과 신하는 그 향의 이름과 쓸 곳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향을 싸가지고 널리 나라 안을 다니면서 묻게 했다.
묵호자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향이란 것입니다. 불에 태우면 향기가 매우 강렬합니다. 정성을 신성(神聖)에게 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신성은 삼보(三寶)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만약 이것을 불에 태워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 성국(成國)공주가 병들었는데 무당과 의원이 치료해도 효험이 없었으므로 친명을 사방으로 의원을 구하게 됐다.
성사(아도)는 급히 대궐로 들어가서 기도하니 그 병이 드디어 나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의 소원을 물으니 법사는 대답했다.
「제게는 아무런 청도 없사오나, 다만 천경림에 절을 세워 불교를 크게 일으켜서 국가의 복을 비는 일을 바랄 뿐입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공사에 착수하도록 명령했는데, 그 때 풍속이 질락 검소해서 모옥(茅屋)을 지어서 살면서 불법을 강연하니 간혹 천화(天流)가 땅에 내리기도 하였다.
그 절 이름을 흥륜사(興輪寺)라 했다.
모례의 누이 동생은 이름이 사씨(史訖)인데, 법사(아도)에게 귀의하여 여승이 되었으며 또한 삼천(三川)의 갈래에 절을 지어서 살았다.
그 절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 했다.
얼마 후에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니 나라사람들이 법사를 해치려 했다.
법사는 모례의 집으로 돌아가서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서 문을 달고 세상을 떠났으므로, 마침내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리하여 불교도 또한 폐지되었다.
또 제 12대 비처왕(毗處王) 때에 와서 아도화상(我道和尙)이란 이가 시종을 데리고 역시 모례의 집으로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몇 해 동안 이 곳에 머물다가, 아무런 병도 없이 죽었다.
시종 세 사람은 남아 있으면서 경(經)과 율(律)을 가르치니, 가끔 믿는 사람이 있었다.
아도를 살펴보면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요.
그의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이다.
정시년간(正始年間)[240-248]에 조위(曹魏)사람 아굴마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령과 관계하고 돌아갔는데 그로 인하여 아기를 가지게 되었다.
아도는 난 지 다섯 살때 그의 어머니가 그를 출가시켰다.
나의 열 여섯살 때에 위(魏)나라에 가서 굴마를 뵈옵고 현창화상(玄彰和常)의 강석에 가서 배웠다.
열 아홉살 때에 또 돌아와서 어머니를 뵈오니 어머니는 그에게 말했다.
「이 나라(고구려)는 지금까지 불법을 모르지마는, 이 후 3천 몇 달이 지나면, 신라에 성군이 나서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 서울 안에 일곱 곳의 절 터가 있는데,
①은 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이요,―지금의 흥륜사(興輪寺)다.
금교는 서천교(西川橋)니 우리말로는 솔다리(松橋)라고 부른다.
이 절은 아도가 비로소 터를 잡았는데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법흥왕14년 정미년에 시작하여 22년 을묘년에 크게 착공해서 진흥왕 때에 와서 낙성되었다.
②는 3천(三川)의 갈래요, 지금의 영흥사(永興寺)니 흥륜사와 같은 시대에 착공되었다.
③은 용궁(龍宮)남쪽이요,―지금의 황룡사니 진흥왕(14년) 계유에 착공되었다.
④는 용궁(龍宮) 북쪽이요,―지금의 분황사니 선덕왕(3 년)갑오에 착공되었다.
⑤는 사천(沙川)의 끝이요.―지금의 영묘사(靈妙寺)니 선덕왕(4년) 을미에 비로소 착공되었다.
⑥은 신유림(神遊林)이요,―지금의 천왕사니 문무왕(19년)기표에 착공되었다.
⑦은 서청전(婿請田)이다.―지금의 담엄사(曇嚴寺)
모두 전불(前佛) 시대의 절터며 불법(佛法)이 길이 유행할 곳이다.
네가 그 곳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하면 마땅히 불교의 개조가 될 것이다.」
아도는 그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신라에 가서 서울의 서리(西里)에 살았는데, 그곳은 지금의 엄장사(嚴莊寺)며, 그 시기는 미추왕(味雛王) 즉위 2년 계미[263]이었다 한다.
<三國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