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의 세속오계
당속고승전(唐續高僧傳) 제13권에 실려 있다.
신라 황륭사(皇隆寺)의 석원광(釋圓光)의 속성(俗姓)은 박씨다.
본디 삼한(변한·진한·마한)에 살았다.
원광은 곧 진한 사람이었다.
대대로 조선에 살아 조상의 풍습이 오래 계승되었는데, 기량은 넓고 크며 문사(文辭)를 즐겨 연습하여 노장학(老莊學)과 유학(儒學)을 널리 읽고, 제자(諸子)와 역사책을 연구했다.
문명(文明)은 삼한에 떨쳤고, 박학은 중국과 손색이 없었다.
드디어 친구들과 작별하고 해외에 가기로 분발했다.
나이 25세에 배를 타고 금릉(金陵=지금 중국의 남경)에 이르니, 이 때는 진나라(陳)시대로서 문명국이라 했다.
그러므로, 그전에 의심했던 것을 질문하고 도를 물어 그 뜻을 해득할 수 있었다.
처음에 장엄사(莊嚴寺) 민공(異公) 제자의 강의를 들었다.
본디 세간의 전적(典籍)을 익히고 배웠으므로 신비를 궁구할 만한 이치라 이르더니, 불교의 종지(宗旨)를 듣고 나서는 도리어 세간의 전적을 썩은 지푸라기처럼 여겼다.
명교(名敎)를 헛되이 찾은 것이 실로 생애에 있어 두려웠으므로, 이에 진주(陳主)에게 글을 올려 도법(道法)에 돌아갈 것을 청하니 칙명으로 허락해 주었다.
이에 처음으로 중이 되어 곧 구족계(具足殘)를 받고, 강석(講席)을 두루 찾아 좋은 계책을 다 배웠으며, 미묘한 말을 해득하여 세월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실(成實)의 열반(涅槃)을 마음속에 쌓아 간직하고, 삼장(三藏)과 석론(釋論)을 두루 탐구했다. 나중에는 또 오(吳)의 호구산(虎丘山)에 가니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은 서로 따랐으며 추사(龍思)와 세사(細思)를 경계하여 잊은 적이 없었으므로 승려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임천(林泉)에 모였다.
아울러 4아함경(四阿含經)을 널리 읽어 공효(功效)는 팔정(八定)에 들어갔으며, 명선(明善) 본뜨기를 쉽게 하였고, 통직(辯直)에 있어도 결점잡기 어려웠다.
본디 먹었던 마음과 아주 맞았으므로 드디어 평생을 이곳에서 마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인사를 아주 끊고 상인의 자취를 두루 유람하여 생각을 세상 밖에 두고 영원히 속세를 멀리 사절 하였다.
이 때 어떤 신사(信士)가 산 밑에 살고 있었는데 원광에게 나와서 강의해 주기를 청했다.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으나 끝내 맞이했으므로, 마침내 그 뜻에 따랐다.
처음에 성실론(成實論)을 진술하고 끝으로 반야경(般若經)을 강의했다.
모두 해석이 통철하니 좋은 명예가 빨리 전파(傳播)되고, 겸하여 아름다운 수사(修辭)로서 글 뜻을 엮어내니 듣는 이는 매우 기뻐했으며, 그들의 마음에 들어맞았다.
이로부터 예전의 규정에 따라 중생을 개도(開導)함으로써 임무를 삼으니 언제나 법륜(法輪) 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문득 세상 사람을 불법으로 쏠리게 했다.
비록 이역(異域)에서의 전교라 하나 도에 젖으면 문득 혐극(嫌隙)을 버렸으므로. 명망이 널리 유포(流布)되어 영외(潛外)에까지 전파되니 가시덤불을 헤치고 바랑을 지고 오는 사람이 서로 닿아 고기비늘 같았다.
때마침 수제(隨帝=文帝)가 천하를 통치하니 그 위엄이 남국(南國=진나라)에 까지 미쳤다.
그 진나라 역수(曆數)가 끝나 수나라 군사가 양도(楊都=진의 수도)에 들어오니 원장은 마침내 난병(亂兵)에게 잡히어 바야흐로 살해되려 했다.
수의 대장이 절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뛰어가 구하려 했더니, 불타는 광경은 조금도 없고 다만 원광이 탑 앞에 보이는데, 결박되어 바야흐로 죽음을 당하려 했다.
대장은 그 이상함을 괴이 여겨 즉시 결박을 풀어 놓아 주었다.
원광이 위기에 부닥치자 영감을 나타냄이 이와 같았다.
원광은 오월(吳越)에서 학문이 통했으므로 문득 주·진(周·秦=북쪽중국)의 문화를 보고자 하여 개황(開皇) 9년(589)에 제도(燾都=수나라 서울)로 와서 유학했다.
때마침 불법의 초회(初會)를 당해 섭론(攝論)이 비로소 일어나니, 문언(文)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미서(微緖)를 떨치게 했다.
또 혜해(慧解)를 달리어 명예를 수나라 서울에 폈으며, 공업이 이미 이루어지자 동방(=신라)에 가서 공업을 이어야하겠다고 생각했다.
본국(신라)에서 밀리 이 소식을 듣고(황세=수나라 임금)에게 아뢰어 돌려보내기를 자주 청했다.
황제는 칙명으로 후하게 위로하고 고국으로 돌려보내어 주었다.
원장이 갔다가 돌아온 것이 수십년이 되니 늙은이도 어린이도 서로 기뻐했다.
신라왕 김씨(=진평장)는 면대해서 공경하고 성인처럼 높였다.
원광은 천성이 허한(虛鬧)을 좋아했으며. 정은 박애(搏愛)함이 많으며, 말할 때는 상시 웃음을 머금었고 노기는 낯에 드러내지 않았다.
전표·계서(啓書) 등 오가는 국서(國書)는 모두 의 심중으로부터 나왔으니 한나라가 쏠려 받들어 모두 정치하는 방법을 그에게 맡겼으며 도법(道法)으로 교화하는 일을 물었다.
처지는 금의환향(錦衣還鄕)한 사람과 달랐으나 실정은 중국의 문물을 보고 돌아온 것과 마찬가지였다.
기회를 타서 훈계를 베풀어 오늘에까지 그 모범을 남기었다.
나이 이미 높아져서 수레를 타고 대궐에 들어갔다.
의복과 약물 식물을 모두 왕이 손수 마련해서 좌우 사람이 돕지 못하게 함으로써 혼자서만 복을 받고자 했으니 그 감복 존경함이 이러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왕이 친히 손을 잡고 위문하며 누누이 법을 남겨 백성을 구제할 것을 부탁하니 그는 상서(詳瑞)를 말하며 공덕이 바닷구석 에 까지 미치었다.
신라 건복(建福) 58년[640]에 몸이 조금 불편함을 느꼈다.
7일을 지나서 계(戒)를 남겼는데, 매우 간절했다.
거처하던 황룡사 안에서 단정히 앉아 세상을 떠났다.
연세가 99세였으며, 때는 당나라 정관(貞覲) 4년이었다.―마땅히 14년이라 해야 할 것이다―임종할 때에 절의 동북의 빈 곳에서 음악 소리가 공중에 가득하고 이상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 차니, 승려와 속인들은 슬퍼하면서 한편으로 경사(慶事)로 여겼으며 그의 영감(靈感)을 알았다.
드디어 교외(郊外)에 장사 지내니 나라에서 우의(羽儀)와 장례 도구를 내리어 임금의 장례와 같이 했다.
뒤에 속인의 아이를 묻으면 후손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했으므로, 몰래 원광(圓光)의 무덤 옆에 묻었더니, 바로 그 날에 그 사태(死皓)한 시체를 벼락이 쳐서 무덤 밖으로 던져 버렸었다.
이 일 때문에 그를 공경하지 않던 자도 모두 우러러 보게 되었다.
제자 원안(圓安)은 정신이 지혜롭고 근기(根機)가 총명하며 천성이 유람을 좋아했으며 그윽한 곳에서 도를 구하며 앙모(仰慕)했다. 마침내 북으로 환도(丸都)로 가고 동으로 불내(不耐)를 보고 또 서로 연·위(燕 魏=북쪽 중국)로 가고 후에 제경(帝京 =長安)에 이르렀다.
각지방의 풍속에 자세히 통하고 여러 경론(經論)을 구해서 중요한 줄거리를 널리 읽고 섬세한 뜻까지 환히 알게 되었다. 늦게서야 심학(心學=佛學)에 귀의했는데 세속보다 자취가 높았다.
처음 장안의 절에 있을 때도 도술로 이름이 나타나자, 특진(特進) 소우(簫瑀)가 임금에 청하여 낭전(盜田)에 지은 진량시(津梁寺)에 거주하게 했으며 의복 음식 침구 탕약(湯藥) 등의 공급이 6시에 변함이 없었다.
원안이 일찍이 원광의 사실을 썼는데 기사는 이렇다.
본국 신라의 왕이 병환이 나서 치료해도 병이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원광을 청해다 궁중에 들이어 별성(別省)에 있게 했다.
밤마다 두 시간이나 심오한 법을 말하며 계(戒)를 받게 하여 참회(懺悔)하게 했더니 왕이 크게 신봉(信奉)했다.
어느 때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를 보았더니, 금빛이 찬란하고, 일륜(日輪)같은 형상이 그의 몸을 따라 이르렀다.
왕후와 궁녀들도 함께 이것을 보았다.
때문에 승심(勝心)을 거듭 발하여 원광을 병실에 머무르게 했더니 오래지 않아 병이 드디어 나았다.
원광은 진한·마한의 안에서 정법(正法)을 널리 펴고 해마다 두 번 강론하여 후학을 양성했다.
보시(布施)로 받은 재물은 모두 절 짓는 데 충당하게 했으므로 남은 것은 다만 가사와 바리대 뿐이었다.―달자함(達字函)에 기재되어 있다―또 동경(東京=경주) 안일호장(安逸戶長) 정효(貞孝)의 집에 있는 고본 수이전(殊異傳)에 원광법사전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 말했다.
법사의 속성은 설(薛)씨며, 왕경(王京=경주)사람이다.
처음에 중이 되어 불법을 배웠는데, 나이 30세에 도를 닦으려 하여 삼기산(三岐山)에서 홀로 거주했다.
그 후 4년에 한 중이 와서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절을 짓고 2년을 살았다.
그는 사람 된 품이 사납고 주술(呪術) 배우기를 좋아했다.
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 불경을 외우니 문득 신이 그 이름을 부르고는 말했다.
「잘도 하십니다. 잘도 하십니다 당신의 수행은! 무릇 수행하는 이가 비록 많지만 법대로 하는 이는 드뭅니다.
지금 이웃에 있는 중을 보니 주술을 곧잘 닦지만 소득은 없을 것이요, 그 소란한 소리는 남의 정념(靜念)을 괴롭히며 그 거주한 곳은 내가 다니는 길에 방해가 되므로, 언제나 왕래할 때마다 미운 생각이 날 지경입니다. 법사는 나를 위해 그에게 말해서 다른 곳으로 옮아가도록 해 주시오. 만약 오래 머무른다면 아마 내가 문득 죄업(=살인죄)을 저지를 듯합니다.」
이튿날 법사는 가서 말했다.
「내가 어젯밤에 신의 말을 들었는데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아가야 되겠소.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앙화(殃禍)가 있을 것이오.」
중은 대답했다.
「수행(修行)이 지극한 이도 마귀에게 홀림을 받겠습니까? 법사는 어찌 호귀(狐鬼)의 말을 근심하십니까?」
그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했다.
「전에 내가 말한 일에 대해 중이 무엇이라 대답합니까?」 법사는 신이 노할까 두려웠다.
「결국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굳이 말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미 다 들었는데, 법사는 어째서 보태어 말합니까? 잠자코 계시면서 내가하는 것만 보시오.」
마침내 작별하고 가버렸다.
밤중에 무슨 소리가 나는데, 벼락 치는 것 같았다.
이튿날 그 곳에 가 보니 산이 무너져 중이 있던 절을 묻어 버렸다.
신이 또 와서 말했다.
「법사가 보기엔 어떻습니까?」
「보기에 심히 놀랍습니다.」
「나는 나이 3천년에 가깝고 신술(神術)도 가장 잘합니다. 이것은 작은 일인데 무엇이 놀랄 거리가 되겠습니까? 특히 장래의 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일도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법사가 이 곳에만 계시면 비록 자신을 이롭게 하는 행위는 있을 것이나 남을 이롭게 하는 공은 없을 것이니 현재 고명(高名)을 드러내지 않으면 미래에 승과(勝果)를 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 불법을 중국에서 취해 와서 이 나라의 혼미(昏迷)한 중생을 제도하지 않습니까?」
「중국에 가서 도(道)를 배우는 것은 본디 소원이나, 바다와 육지가 멀리 막혀 있으므로 스스로 가지 못할 뿐입니다.」
신이 중국 가는 데 행할 계책을 자세히 일러 주자, 법사는 그 말에 따라 중국으로 갔다.
그는 거기서 11년을 머물면서 3장(藏)을 널리 통달하고 유술(懦術=儒學의 학술)까지 아울러 배웠다.
진평왕 22년 경신[600]―삼국사에는 다음 해 신유에 왔다고 했다―에 법사가 행장을 차려 돌아오려 했었다.
이에 중국에 왔던 조빙사(朝聘使)를 따라 본국으로 돌아왔다.
법사는 신에게 감사함을 표하고자 하여 그 전에 거주했던 삼기산 절에 갔더니 밤중에 신도 또한 와서 그 이름을 부르고 말했다.
「해륙의 노정(路程)에 왕복이 어떠했습니까?」
「신의 큰 은혜를 입어 편안히 도착했습니다.」
「내 또한 스님에게 계(戒)를 드리겠습니다.」
이에 윤회(輪廻)의 모든 세계에게 서로 구제할 약속을 맺었다.
법사는 또 청했다.
「신의 진용(眞容)을 볼 수 있습니까?」
「법사가 만약 내 모양을 보고 싶다면 내일 아침에 동쪽 하늘 끝을 바라보시오.」
법사가 그 이튿날 동쪽 하늘을 바라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대어 있었다.
그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했다.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습니까?」
「보았는데 너무도 신기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삼기산을 민간에서 비장산(臂長山)이라고 한다.
신은 말했다.
「비록 이 몸이 있다 하더라도 무상(無常)의 해(害)는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얼마 안 가서 그 고개에다 이 몸을 버릴 것입니다. 법사는 오셔서 영원히 떠나는 내 혼을 전송해 주시오.」
법사가 약속한 날을 기약해서 그 곳에 가서 보니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있는데, 검기가 옻칠 빛 같았다.
법사는 늘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강의했다.
이 때 고구려와 백제가 언제나 신라의 변경을 침범했으므로, 왕은 이것을 매우 걱정하여 수나라―마땅히 당이라 써야 할 것이다―에 군사를 청하려고 법사를 청해서 걸병표(乞兵表)를 짓게 했다.
수의 황제는 그 글을 보고 30만명으로 고구려를 친히 쳤으니 이로부터 법사가 유술(儒術)까지 두루 통달함을 알게 되었다.
향년(享年) 84로써 세상을 떠나니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장사했다.
또 삼국사 열전(列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어진 선비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의 사람인데, 같은 마을의 추항(帶項)과 벗이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말했다.
「우리들이 사군자(士君子)와 교유(交遊)하려고 하면서 먼저 마음을 바로 잡아 처신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모욕당함을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 어진 이의 곁에 가서 도를 묻지 않겠는가?」
그 때 원광법사(圖光法師)가 수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가슬갑(嘉瑟岬)―혹 가서(加西) 또는 가서(嘉栖)라 하니 모두 우리말이다.
갑(岬)은 우리말에서는 곳(古尸)이라 하므로, 흑은 곳절(古尸 寺)이라 하니, 갑사(岬寺)라고 하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 동쪽 9천 보(步)가량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가슬현(嘉瑟峴)이라 한다.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에 사신 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이 문하에 와서 물었다.
「속사(俗士)가 우매하여 아는 바 없습니다. 부디 한 말씀 내리시어 평생의 잠언(箴言)을 삼도록 해 주십시오.」
「불교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어 그 조항이 열이 있으나, 너희들은 남의 신하와 자식된 몸이니 아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世俗)에 5계(戒)가 있으니
첫째는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일이요,
둘째는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요,
셋째는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는 일이니, 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귀산 등이 말했다.
「다른 것은 이미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만, 이른 바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인다.>는 말씀만은 아직 이해되지 않습니다.」
「여섯째 날과 봄철·여름철에는 생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는 시기를 가림이요, 가축을 죽이지 않음은 말·소·닭·개를 이름이며 세물(細物)을 죽이지 않음은 곧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이름이니 이는 생물을 가림이다. 이도 또한 그 소용되는 것만 하지 많이 죽이지는 않을 일이다.
이것이 세속의 좋은 경계이다. 그러고 넷째는 전쟁에 나아가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는 친구를 사귀되 믿음으로써 사귀는 것이다.」
귀산 등은 말했다.
「지금부터는 이 말을 받들어 실행하며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그 후에 두 사람은 종군하여 모두 나라에 뛰어난 공로가 있었다.
또 건복(建福) 30년 계유(613) 즉 진평왕 즉위 35년이다.―가을에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오니, 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도량(百坐這場)을 설치하여 여러 고승(高僧)을 청해 불경을 강의했는데 원광(圄光)이 가장 윗자리에 있었다.
<三國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