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종의 대현과 화엄종의 법해

유가종의 대현과 화엄종의 법해

유가종(瑜伽宗)의 조(祖) 대덕 대현(大賢)은 남산의 용장사(茸長寺)에 살고 있었다.

그 절에는 미륵불의 석조 장륙상(丈六像)이 있었는데 대현이 늘 불상을 돌아다녔더니, 불상도 또한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대현은 총혜롭고 명변(明辯)하여 정세(精細)하고 민첩하여 판단과 분별이 명백했다.

대개 법상종(法相宗)의 경론(經論)은 그 주지(主旨)와 이치가 은미(隱微) 심오하여 분석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중국의 명사 백거이(白居易)도 일찍이 이것을 궁구(窮究)하다가 통하지 못해서 말했다.

유식종(唯識宗)은 은미(隱美)하고 심오한 것에 통달하여 여유있게 이치를 분석하였으니 동국의 후진들은 모두 그 가르침에 따랐으며, 중국의 학사들도 자주 이것을 얻어 요목(要目)으로 삼았다.

경덕왕 때인 천보(天寶) 12년 계사(7531여름에 가뭄이 심했으므로 임금님은 대현을 내전(內殿)으로 불러들여 금광경(金光經)을 강하여 단 비를 빌게 했다.

어떤 날 재를 올릴 때에 바리때를 늘어놓고 한참이나 있었으나 공양하는 이가 정수(淨水)를 늦게 올렸으므로 감리(監吏)가 그를 꾸짖었다.

공양하는 이는 말했다.

「대궐의 우물이 말라서 먼 곳에서 길어오느라고 늦었습니다.」

대현은 그 말을 듣고 말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낮에는 경을 강(講)할 때에 이르자, 대현이 향로를 받쳐들고 잠자코 있으니 잠깐사이에 우물물이 솟아 나오는데 그 높이가 7장(丈)가량이나 되어 찰당(利幢)과 가지런했다.

온 궁중이 놀랐으며, 그 우물을 금광정(金光井)이라 했다.

대현은 일찍이 스스로 청구사문(靑丘沙門)이라 일컬었다.

기린다.

남산의 불상을 도니

불상도 따라 얼굴을 돌렸네,

청구의 불교가 다시 중천에 높아졌구나.

궁정(宮井)의 솟구친 맑은 저 물이,

향연(香煙)에서 생긴 줄 누구가 알리.

이듬해 갑오년(754)여름, 왕은 이번에는 대덕 법해(法海)를 황룡사에 청해다가 화엄경을 강(講)하게 하고, 친히 가서 향을 피웠다.

왕은 조용히 법해에게 말했다.

「지난해 여름에, 대현 법사가 금광경(金光經)을 강(講)하니 우물이 7장이나 솟아났소.

이분의 법도(法道=法術)는 어떠하오?」

「그것은 아주 조그만 일이온데 무엇을 그렇게 칭찬하십니까?

즉시 창해(滄海)물을 기울여 동악(東岳)을 잠기게 하고 서울을 떠내려가게 하는 것도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왕은 그 말을 믿지 않고 농담으로 하는 말로만 여겼다.

오시(午時)에 경을 강할 때, 향로를 당겨 잠잠이 있으니 잠깐 사이에 궁중에서 문득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궁리(宮吏)가 뛰어와서 보고했다.

「동쪽 못이 벌써 넘쳐서 내전(內殿) 50여간이 떠내려갔습니다.」

왕은 어리둥절해지고 정신을 잃었다.

법해는 웃으면서 아뢰었다.

「동해물이 기울어 쏟아지려고 수맥(水脈)이 먼저 넘친 것입니다.」

왕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절했다.

그 이튼 날 감은사(感恩寺)에서 아뢰었다.

「어제 오시에 바닷물이 넘처 흘러 불전(佛殿)의 계단 앞에까지 들어 왔다가 저녁때에 물러갔습니다.」

왕은 법해를 더욱 믿고 공경했다.

기린다.

법해의 파란을 법계(法界)는 넓다.

사해의 영축도 어렵지 않느니라.

백억 수미산이 크다고만 말라,

그것은 모두 스님의 한 손끝에 있느니라.

―석해(石海)가 말했다―

<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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