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묵조사유적고서-1

진묵조사유적고서

해남, 두륜산 대흥사의 남쪽 산기슭에 자리한 일지암(一枝庵)에서 초의의순(草衣意恂)스님이 불가의 다도를 중흥시키며, 문장가로써 이름을 떨치면서 천하의 재사들을 사귀든 무렵이었다. 진달래꽃이 무수히 피워가는 화창한 어느 봄 날, 젊은 유생 한 사람이 초의선사를 찾아왔다. 젊은 유생은 손에 작은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초의선사는 일지암을 찾는 승속 모두에게 언제나 화기애애한 미소로써 영접하듯, 그 유생을 다실(茶室)로 안내하여 따뜻한 차를 대접하였다. 유생은 초의선사에게 큰절로 정중히 예를 표하고, 어눌한 말투로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전북 김제에 사는 유생이며, 성명은 김기종(金箕鍾)이라고 합니다.사람들은 저를 은고거사(隱皐居士) 라고도 부르지요.”

초의선사는 미소속에 유생의 차잔에 따뜻한 차를 부어주면서 물었다.

“멀리서 어찌 나를 찾아오시었소?”

“제가 존경하는 조사스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오래전에 열반에 드시었지만, 그 분의 덕행과 수행과 이적(異蹟) 등은 구전으로나마 세상에 전해 오고 있지요. 그러나, 세상에 널리 그 분에 대해 알리고져 한다면 구전이 아닌 문집(文集)을 제작하고져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저는 그분에 대한 사상을 문장으로 만들기는 능력이 부족하고, 특히 불교를 잘 깨닫지 못하여서 외람되나마 초의큰스님께서 문집을 만들어 주십사, 하고 그 조사님이 남긴 시문과 일화를 수집해왔습니다.”

초의선사의 눈에 호감의 빛이 감돌았다. 유생이 불문의 스님을 존경하여 문집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하려는 그의 정성이 가득 마음에 들었다. 초의선사는 잔잔한 미소속에 말했다.

“그 조사스님이 누구시오?”

“진묵조사입니다. 전주지방에서는 불문에 큰스님이면서 어머님에 대한 지극한 효심으로 중생들의 입으로 만고의 효자로 전해오는 분이지요.”

“나도 그분의 효심에 대한 일화를 전해들어 알고 있소. 나는 중노릇 하다보니 불효를 하고 말았소. 그것이 나는 죽어서도 한으로 남을 것이오. 인간이 못되는 사람이 어찌 중생의 스승인 부처가 될 수 있겠소? 진묵조사는 인간의 도리를 휼륭히 하신분이요. 암, 휼륭한 스님이시지.”

초의선사는 말을 이었다

. “진묵조사에게도 제자들이 있었을 터인데 수백년이 흐른 오늘까지 ‘진묵조사 행장기(震默祖師行狀記)’를 만들어 세상에 전하지 못하고 있소. 그런데 승려가 아닌 유생인 김공(金公)이 그 소임을 도맡으려 하니 같은 승려로써 대견스럽고 감사하기 이를 데 없소. 분명 진묵조사님과 김공은 숙연이 깊은 사이일 것이오. 김공이 그렇게 원력을 세우는데 항차 후학이요, 승려인 내가 어찌 그 일을 돕지 않겠소.”

김기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초의산사에게 새삼 삼배의 큰절을 올리면서 감사의 인사를 올리었다.이윽고 김기종은 자신이 들고 온 보따리를 풀었다. 그는 자신이 다년간 수집한 진묵조사의 일화를 적은 원고를 초의선사에게 바쳤다. 일화는 조잡한 문장으로서 하나도 완성되지 못한 초고에 불과하였다. 초의선사는 흔연히 원고를 받고서는 손님에게 숙소를 정해주어 쉬도록 하고, 자신은 자신의 산방에서 밤을 새워 건네 받은 진묵조사의 일화를 독파해 마치고, 깊은 묵상에 잠겼다. 묵상 속에서 초의선사는 진묵조사가 되고, 진묵조사는 초의선사가 되어 살활자재(殺活自在)하였다. 초의선사는 떠나온 노모를 생각하였다. 진묵조사처럼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뜨거운 눈물로 양볼을 적시었다. 초의선사는 묵상에서 깨어났다. 승려로서 만고의 효자인 진묵조사를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결단을 내렸다. 무엇보다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할애사친(割愛辭親)해야 한다는 불문의 규칙 때문에 승려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는 만고의 불효를 자행하는 일부 승려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초의선사는 스스로 먹을 갈아 붓에 듬뿍 묻히고 하얀 종이 위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다음과 같이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진묵조사유적고서(震默祖師遺蹟攷序)

世典曰, 苦莫苦於多願. 多願之苦, 莫如佛也. 如藥師如來, 修菩薩行時, 發十二上願. 阿彌陀佛, 爲法藏比丘時, 發四十八大願. 釋迦如來, 爲寶海梵志時, 發五百誓願. 彌陀之願, 三倍於藥師. 釋迦之願, 百倍於彌陀者, 又四矣. 其 願之苦行, 尤爲廣博卓然逈出於二佛之上者. 苦已遠矣. 然, 世願之苦, 苦苦苦而去苦, 求樂苦不去, 而樂不來, 佛願之苦, 處苦而行苦, 忘樂苦自去, 而樂自來. 此世出世願之所以異感於苦樂者也. 凡此諸願, 皆博施濟衆之弘誓也. 故其成佛之後, 例皆不住本位, 隨緣現化於衆生界中. 如西天維摩居士, 現化於毘耶離城, 卽 金粟如來後身也. 金陵寶誌禪師, 降化於齊梁之世, 是觀音佛之應身也. 雙林善慧大士, 降化於蕭梁之世, 卽彌勒佛之應身也. 我東國震默大師, 降化於 明朝之世, 卽 釋迦如來應身也. 師法諱一玉. 震默其自號也. 托胎於萬頃縣之佛居村調意氏. 若其初度之榮祥, 氏族之高寒, 出世化度機緣, 語句之靈軌芳踪, 未有傳記 難以詳悉. 雖其曾有所記, 都是世諦門中空花幻蹟, 實際理地, 總沒校涉, 此先師之宜應通禁. 而不錄者也. 古亦有言名高不用鐫頑石, 路上行人口是碑. 由是觀之, 則今金公屬余爲記, 未得古意. 余若强記, 常寂光中, 恐興不肯之冥譴也. 或曰, 契理不契機, 闕於下化. 契機不契理, 疎於上求. 契理契機, 上求下化, 俱爲得中矣.古人之不記, 專於契理. 今人之爲記, 兼於契機. 是不亦有得於俱中之通道乎. 余曰 遂錄口碑之實, 以作背銘之傳.

海陽後學草衣意恂 謹 

“세전에 말하기를 ‘괴로움은 원이 많은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이 없고, 원이 많은 괴로움은 부처님보다 더한 이가 없다’고 하였다. 약사여래는 십이대원을 발하였고, 아미타불은 법장비구로 있을 때에 사십팔원을 발하였으며, 석가여래는 보해범지로 있을 때에 오백서원을 발하였다. 아미타불의 원은 약사여래의 세 배이고, 석가여래의 원은 아미타여래의 백 네 배이다. 그 원을 실천하는 고행은 더욱 넓고 넒어서 두 부처님보다 우뚝 뛰어났다. 그러나 세상에서 원하는 괴로움은,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여기어 그 괴로움을 버리고 즐거움을 구하기 때문에 괴로움도 떠나지 않고, 즐거움도 찾아오지 않는다. 부처님이 원하는 괴로움은 괴로움에 처하여 괴로움을 행하면서도 즐거움을 잊는 까닭에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지고 즐거움이 스스로 찾아온다. 이것이 세간과 출세간에서 원하는 괴로움과 즐거움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느끼는 점이다. 대저 이 여러 가지 원(불보살의 원)은 모두 널리 베플어서 중생을 제도하자는 큰 서원이다. 그러므로 성불한 뒤에는 으레 다 본래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인연따라 중생의 세계에 현화하는 것이니, 예컨대, 저 서천(인도)의 유마거사(維摩居士)는 비야리성(毘耶離城)에서 현화하였으니, 곧 금속여래(金粟如來)의 후신이요, 금릉(金陵)의 보공선사(寶公禪師)는 제(齊)·양(梁) 때에 태어났으니 곧 관음불의 응신이요, 쌍림의 선혜대사(善慧大士)는 소량(蕭梁) 당시에 태어났으니 곧 미륵불의 응신이다.

우리 동국(東國)의 진묵대사는 명종조(明宗朝)에 탄생하였는데, 곧 석가모니불의 응신이시다. 대사의 법휘(法諱)는 일옥(一玉)이요, 진묵은 자호(自號)이다. 만경현(萬頃縣) 불거촌의 조의씨(調意氏)에게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의 빛나는 상서(祥瑞)와, 그의 씨족이 높이 드러나고 한미한 것과 출세한 뒤의 중생을 교화제도한 기연(機緣)과 어구(語句)의 영이(靈異)한 궤적(軌迹)과 꽃다운 발자취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으므로 상세히 알기는 어렵다. 비록 기록한 것이 있다 하여도 이는 모두 세체문(世諦門) 가운데 공화(空花)요, 환적(幻蹟)으로서 그 사실을 밝히는데 있어서는 모두 참고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진묵대사가 아마 자신에 대한 기록을 하지 못하도록 통렬히 금하였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또 전하는 말에, ‘이름이 높다고 해서 거친 돌에 새길 필요는 없고, 노상에 다니는 사람들의 입이 곡 비석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에서 생각한다면, 이제 김공이 나에게 부탁하여 진묵대사에 대해 기록하게 함은 고인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만약 굳이 기록한다면, 상적광토(常寂光土) 중에서 진묵대사께서 달갑지 못하다는 꾸지람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자가 말하기를, ‘이(理)에 계합하고 기(機)에 계합하지 못하면 하화(下化)가 결여되고, 기(機)에 계합하고 이(理)에 계합하지 못하면 상구(上求)에 소홀하니 이(理)에 계합하고, 기(機)에도 계합해야만 상구(上求)와 하화(下化)가 함께 중도(中道)를 얻으리라. 하였는데, 진묵대사가 기록하지 않음은 오로지(理)에만 계합함이요, 금인(今人)이 기록함은 기(機)에의 계합도 겸하는 것이니 이것이 중(中)을 갖추어 도(道)를 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하기에 나도 그렇다 하고 드디어 오래도록 전해 오는 말의 실(實)을 기록해서 배명(背銘)의 전(傳)을 짓는 바이다.

해양후학 초의의순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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