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대사가 만난 관음신전
신라 의상(義湘)법사(625~702)는 후세에 부처님의 화신으로 받들어졌으며, 10성(十聖) 중의 한 분으로 존중되었던 유명한 스님이다.
그는 문무왕(文武王) 원년(661)에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가 문무왕11년(671)에 귀국하였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그는 처음에 강원도양양의 낙산(洛山) 바닷가 굴속에 관세음보살의 진신이 머물고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리로 갔다.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하여 의상스님은 7일동만을 목욕재계하였다.
그리고는 이레가 되는 새벽에 방석을 물위에 띄우고 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 굴은 바닷물을 통해서 들어가게 되어 있으므로 아무도 쉽게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의상스님은 천룡팔부중의 시중을 받으며 굴 안으로 안내되었다.
텅빈 굴 안에서 의상스님은 공중을 향해 합장을 하고 절하였다.
관세음보살은 몸을 나타내시지 않은 채 수정염주 한 벌을 내려주셨다. 의상스님이 그것을 받고 굴 밖으로 나오다가 동해 용으로부터 여의보주 한 개를 또 받았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시 7일을 목욕재계하고 또 굴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는 관세음보살의 얼굴을 대할 수가 있었다. 보살님은 의상스님을 향해 말씀하셨다.
「이 자리의 바로 위 산꼭대기에 대나무두 그루가 솟아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다가 법당을 짓도록 하라,」
의상스님은 굴 밖으로 나와 그 산위로 올라가 보았더니 과연 대나무가 솟아나 있었다.
그는 그곳에 터를 닦고 법당을 지었다.
관세음보살의 소상(塑像)을 조성하여 법당에 모셨는데, 그 원만하고 아름다운 상호가 꼭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그러자, 대나무는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관세음보살의 도량이 마련되었으므로 그 표적이 이제는 필요가 없기 매문에, 관세음보살이 거두어들였던 것이다.
의상스님은 참으로 이곳이 관음진신께서 머무시는 곳임을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절이름을 낙산사라 하였으며, 관음보살에게서 받은 수정염주와 용에게서 받은 여의보주를 법당에 안치해 놓고 그곳을 떠나 신라의 서울 쪽으로 향해 갔다.
그 뒤 원효(元曉)대사가 관음진신을 친견하기 위하여 이곳(洛山)을 찾아왔다.
처음 원효스님이 남쪽 동구 밖에 이르렀을 때였다. 흰옷 입은 한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다.
그동안 먼 길을 오느라고 피로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했던 스님은 벼 베는 여인을 보자, 걸음을 멈추고 잠시 한숨을 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짐짓 장난삼아 벼이삭을 하나 달라고 청하지 그 여인역시 마른 쭉정이 이삭을 장난삼아 건네주었다.
그리고 스님은 좀더 낙산사 쪽으로 가다가 다리가 놓인 시냇물가에 이르렀다.
다리 밑에는 한 여인이 피걸레(月水帛) 빨래를 하고 있었다.
스님은 또 그 여인 곁으로 가서 물 한 모금을 청하였다.
빨래하던 여인은 옆에 놓인 바가지로 그 더러운 물을 떠서 주었다.
그것을 받은 원효스님은 더러운 물을 버리고 그 위에 맑은 물을 스스로 떠서 마셨다.
바로 그 때었다. 들 가운데 서있는 소나무 위에서 푸른 새 한마리가 지저귀었다.
「제호(모든 병고를 제거해주는 영약의 비유)를 버린 스님이시여!」
그 소리를 듣고 스님이 놀라서 돌아보니 새도 없어지고 여인도 없어졌다.
그런데 새가 울던 그 소나무 아래에는 신 한 짝이 벗어져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낙산사에 도착하였다. 스님이 그 낙산사 법당에 들어갔을 때였다.
관음보살상의 좌대 아래에 또 한 짝의 신이 벗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원호스님은 비로소 앞서 만났던 여인이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이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새가 울었던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하였다는 것이었다.
원효스님은 또 전에 의상스님이 들어갔던 그 성굴(聖堀)에 관음진신을 친견하고자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풍랑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흡사 관음보살이
「이미 나를 만났는데 또 다시 굴속까지 들어와 만날 필요가 있느냐.」
고 일부러 막는 것 같았다.
결국 원효스님은 성굴 안으로 들어갈 것을 단념하고 말았다.
<三國遺事 卷3 塔像4, 洛山二大聖 觀音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