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여래흥현경(佛說如來興顯經) 제3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무엇을 모든 보살이 여래(如來)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께서 마음으로 생각하시고 행하시는 곳에 들어간다고 하는가? 여래는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있지 않고 이름을 분별하지 않으시고 식(識)을 명료히 깨닫지도 않으신다. 여래는 마음이 없으므로 마침내 한량없는 생각에 들어갈 수 있다. 마치 허공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조립함으로써 나아가는 것에 따라 성취하는 것이 있으며, 또 허공은 아무것도 집착할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인자여, 만일 도를 구하고자 하여 지혜를 의지한다면 모든 세속과 세속을 건너는 일이 부처님의 성스러운 지혜로 인하여 출현하게 된다. 또 여래의 지혜는 집착하는 바가 없다. 이것이 보살이 여래의 행념(行念)에 들어가는 첫 번째 인연의 문(門)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비유하면 마치 허공이
모든 형태를 받아들이기에
그것에 의지하고 집착하나
또한 허공에는 상념이 없듯이
여래의 묘하신 지혜도
이와 같이 집착 없으시니
일체 중생 구제하시되
나와 남이라는 생각 없으시다네.
“또 불자여, 비유하면 법계가 모든 성문이 건너는 것과 모든 연각과 보살이 익혀 도달하는 것을 여의지 않으며, 또한 그 법계가 늘지도 줄지도 않는 것처럼 대도(大道)도 이와 같다. 여래의 지혜가 세간과 출세간[度世]의 지혜를 모으시고 만들어진 교묘한 방편을 분별하여 명료히 생각하실지라도 지혜는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신다. 이것이 두 번째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비유하면 마치 성문지(聲聞地)와
연각승(緣覺乘)과
보살 대사(菩薩大士)가
모두 허공에서 생기듯이
대성 또한 이와 같으시어
공(空)을 깨달은 무극(無極)의 지혜이시니
마음이 평등하여 더함도 덜함도 없으시기에
마음에 드시고 안 드시는 일 없이 구제하신다.
“또 불자여, 비유하면 큰 바다가 4대역(大域)의 80억 토지와 서로 연접하여 지형이 다하는 그 경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 물을 얻을 수 있도록 자연히 물이 솟아오르되, 그 큰 바다는 또한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과 같다. 여래의 지혜도 이와 같으시어 두루 모든 중생의 마음에 이르러 도달하지 않는 곳이 없으시다. 모든 백성의 뜻이 생각하는 데 따라 가는 곳마다 청정한 법문에 이르시며 그것을 따르시기에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의 지혜를 획득하게 하신다. 또 여래ㆍ세존께서 지혜를 펴는 것이 모두 평등하시어 그들의 지성을 따라 기이하고 특별한 일로써 치료하니, 도덕이 세상에서 뛰어나시다. 이것이 세 번째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비유하면 마치 네 개의 큰 바다가
80억의 지역과
모두 이어져
지형이 다하도록
물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
자연히 솟아오르나
바다 또한 상념이 없는 것처럼
여래의 지혜도 이와 같으시다네.
모든 중생의 마음에 이르시고
지혜가 통달하지 못하는 일 없으시어
백성들이 좋아하는 데 따라
그들을 열어 인도하시니
청정한 밝음에 이르러
자연의 밝음 얻게 하시며
연설하시는 것 모두 평등하시되
여래께서는 상념 없으시네.
“또 불자여, 비유하면 큰 바다에 저절로 네 개의 대여의보주(大如意寶珠)가 있어 한량없는 덕을 널리 모아 쌓는 것과 같다. 이 여의주가 생긴 것은 용신(龍神)이 덕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 큰 구슬이 있어서 온갖 기이하고 진기한 것을 내는 것은 모두 큰 바다의 은혜이니, 모든 보배를 낳으며 백성이 받들고 우러르며 구제하지 않는 일이 없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등집중보(等集衆寶)라 하고, 둘째는 무진음(無盡音)이라 하고, 셋째는 귀취(歸趣)라 하고, 넷째는 등집중사(等集衆辭)라고 한다. 또 이 대여의주를 생각하면, 아수륜(阿須倫)이나 가류라(迦留羅)나 진타라(眞陀羅)나 마휴륵(摩休勒)이나 모든 용이나 귀신이나 그 밖의 물짐승 같은 보통 부류들은 그 광명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보배가 본시 바다의 왕인 용왕의 곳간에 있기 때문이다. 또 그 큰 바다의 모든 마니주에는 네 모퉁이가 있는데, 사방의 바다 용왕의 왕궁에 각자 따로 서 있다.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도 이와 같이 도덕의 빛이 혁혁하시니 네 가지 대보무극(大寶無極)의 지혜가 있으시다. 이 네 가지 대혜의 보배로 모든 중생과 배우는 이[學], 다 배운 이[不學]를 권화(勸化)하고 개도(開導)하시어 연각과 보살의 지혜의 보배에 이르게 하신다. 이 보배로써 이르게 하시므로 제도하지 못하시는 일이 없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법락(法樂)을 일으켜 의지할 데 없는 곳에 이르는 훌륭한 방편의 지혜와, 유수(有數)ㆍ무수(無數)ㆍ유위(有爲)ㆍ무위(無爲)의 법보장(法寶藏)의 지혜와, 모든 법계를 무너뜨리는 일 없이 때맞춰 연설하는 지혜와, 그로써 때와 때 아닌 때에 요동(擾動)을 뛰어 건너는 지혜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이 네 가지 큰 지혜로써 여래장(如來藏)을 구하시고 도(道)의 곳간[府庫]에 들어가시어 중생과 번뇌를 함께하지 않으신다. 세상 속에 계시면서 개사(開士)의 지혜를 체득하시어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사방을 노닐며 무상정진(無上正眞)을 익히게 하시고, 굳건히 머물러 불퇴전에 서게 하신다. 이것이 네 번째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네 가지 보배의 거룩한 뜻
안묘장(安妙藏)에 이르고
그러므로 큰 바다 속에서
자연히 모든 보배 생겨
그 여의명주(如意明珠)
청정하고 묘함을 여의지 않고
사면(四面)을 분별하니
이르는 곳마다 광명 비추네.
여래의 네 가지 지혜
헤아릴 수 없고 한이 없으니
성스러움에 우뚝하게 안주하시어
다섯 갈래 세계를 인도하시네.
이 무극의 지혜에는
다른 상념 없고
오직 모든 시방만을 살피니
말씀이 통달하지 못하시는 일 없구나.
“또 불자여, 저 큰 바다에 다시 네 개의 큰 보배인 여의주가 나타나니, 위신이 우뚝하고 광명이 끝이 없다. 이 여의보의 공덕의 빛이 큰 바다에 모여드는 물을 없애고, 또 그 바닷물이 다시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큰 바다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여의대주(如意大珠)가 큰 바다로 하여금 항상 스스로 고여 있게 만든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해의 빛을 저장하고 있는 대여의보(大如意寶)와 사자(師子)걸음 대여의보와 광명을 비추는 대여의보와 끝까지 남김없는 대여의보이다. 이것이 네 가지의 큰 보배이다. 가령 큰 바다에 이 여의주가 없다면 물이 흘러넘쳐 사대 지역이 모두 쓸려버리고, 위신산(圍神山)과 대위신산이 다 물에 잠길 것이다. 햇빛을 저장한 여의보주는 두 가지 일로써 큰 바닷물을 변화시킨다. 그 빛이 비추어 그 물색을 없애는 것과, 그 색을 변화시켜 우유빛이 되게 하는 것이다. 사자걸음 여의보의 광명이 비추면 우유빛이 변하여 소(蘇)의 덩어리와 같이 된다. 광명을 비추는 여의보주가 그 빛을 비추면 소의 모습이 없어지고, 괴겁(壞劫) 때에 대화재가 일어나는 것처럼 화광이 맹렬하게 일어나 천지를 모두 태운다. 끝까지 남김없는 대여의보주의 광명이 큰 바다를 비추면 그것이 남김없이 홀연히 없어지니 돌아간 곳을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인자여, 여래ㆍ정각께서도 중생을 위하여 네 가지 지혜로써 모든 것을 비추시니, 이 빛을 모든 보살에게 밝게 비추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여래의 삼매를 이루게 하신다. 무엇이 네 가지 지혜인가? 뭇 죄를 없애시는 것과, 법의 강물로써 은애를 다하시어 도화(道化)를 이루게 하시는 것과, 지혜의 밝은 빛으로써 세간을 비추시는 것과, 여래의 지혜는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이 평등한 성(聖)인 것이다. 이것이 여래의 네 가지 큰 지혜이다. 모든 보살을 위하여 뭇 공포를 참아내게 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근본을 심어 일품(一品)에 이르게 하신다. 모든 하늘[天]과 사람과 아수륜과 같은 혼탁한 속세의 무리들이 환난을 감당 못하고 한량없는 고통을 받을 때, 만일 여래의 고요한 경지를 만나 밝은 지혜의 빛을 쪼이면 모든 집착을 항복시켜 삼매에 설 것이며, 만일 법송(法頌)을 들으면 생사의 바다를 소멸시킬 것이다. 여래께서 개화시키시는 지혜를 만나면 삼매를 온 마음으로 즐길 것이며, 인하여 대성(大聖)의 신통과 미묘한 행음(行音)을 일으킬 것이다. 큰 지혜로 세상을 비추어 뭇 더러움을 없애고 신족행(神足行)에 이를 것이며, 능히 스스로 서서 세상의 대명(大明)이 될 것이다. 어둡고 가리워진 곳을 개도하되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을 것이며, 이 여래의 성스러운 지혜를 받음으로써 곧 능히 세속의 삿된 지혜를 항복시킬 것이다. 대인(大人)의 경지에는 삼매정(三昧定)이 없다. 모든 재업(財業)과 재물을 없애어 몸에 가진 것이 없으면 이 대도의 지혜를 체득하게 될 것이다. 만일 이 여래의 네 가지 지혜의 도덕광명이 없다면, 설사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여래ㆍ지진ㆍ정각의 삼매정경(三昧正定)을 체득하게 하고자 할지라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생로병사도 없앨 수 없을 것이며, 4무소외(無所畏)도 없고, 본제행(本際行)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다섯 번째 일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한도 끝도 없는 바닷물에
네 가지 보배 있듯이
무극의 위엄 있으신 대력(大力)께
미묘하신 거룩함 있으시네.
사방에서 많은 물 흐르니
자연히 만 갈래 강이 되고
큰 바다에 흘러 들어가게 되나
큰 바다는 늘거나 줄어드는 일 없네.
지혜로 법좌(法座)에 처하시어
모든 집착 끊으시고
법으로써 널리 보시하시어
환희케 하시나 하신 말씀 없으시네.
안주하여 네 가지 지혜 있어
모두 개사(開士)와
최승(最勝)과 보살 되었으니
뭇 재난 있은 적 없네.
“또 불자여, 비유하면 가정하여 말하기를, 하방(下方)의 물이 상계(上界)의 상무상천(想無想天)에 이르고,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허공에 처하여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헤아리면 삼계의 형체 있는 모든 중생들이 허공을 여의지 않으므로 나를 생각한다 하여도 텅 비어 계착할 것이 없고 의지할 것이 없으며, 공(空)이어서 집착할 것이 없고 또한 옥죄어 오는 것도 없다. 생사도 이와 같다. 시방에 두루한 허공을 살펴보면 모든 불세계를 받아들여 품고 있으나,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인자여, 모든 성문승과 연각승의 지혜나 유위행(有爲行)의 지혜나 무위행(無爲行)의 지혜가 모두 여래의 지혜에 의지하고 있다. 여래의 지혜로써 개화되어 대도(大道)에 통달하고 두루 모든 것에 들어가 접하지 않는 곳이 없되, 생각하는 것도 없고 장애도 없이 문득 성지(聖智)로써 많은 중생들을 제도한다. 이것이 여섯 번째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뜻이 극진하여 하방에서 일어나
상계에 이르니
모든 삼천 국토와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서
머물고 있으나 실은 머무는 곳 없어
모든 세계에 내가 없으며
또한 유상(有常)이라고 헤아리지도 않고
단절(斷絶)을 생각지도 않도다.
안주하는 지혜도 이와 같아
모든 지혜의 근본이니
모든 배우는 이[學]와 다 배운 이[不學],
모든 연각승과
많은 보살들이 밝게 통달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 품고
도문(道門) 건립한다면
최상의 부처님 지혜로다.
“또 불자여, 비유하면 하방에서 대약(大藥)이 생겨 산왕(山王) 꼭대기에 이르는 것을 무근원(無根原)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또 이 대약은 뿌리가 지하에 통하여 금강(金剛)을 6만 8백천 유순(由旬) 지나 수계(水界)에 머무르므로 안온하게 서 있어 뽑을 수 있는 자가 없다. 그 근원이 염부제 땅을 둘러싸며 두루 분포되어 있어 만물이 싹트며 모든 수목의 뿌리를 에워싸고 있다. 그리하여 수목들이 그 줄기에 가까이 가면 줄기가 생기고, 그 가지에 가까이 가면 가지가 생기고, 그 마디에 가까이 가면 마디가 생기고, 그 잎에 가까이 가면 잎이 생긴다. 그 꽃에 가까이 가면 꽃이 생기고, 그 열매에 가까이 가면 열매가 생긴다. 그러므로 세상 천하에 있는 수목과 꽃과 과일이 모두 그것으로 인해서 생긴다. 그러나 또 대약은 그 뿌리를 몸체로 변하게 하고 몸체는 뿌리로 변하게 하므로 이 두 가지 일로 해서 만물을 낳지 않는다. 지옥 가까운 곳은 물의 순수한 음(陰)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곳에 있어도 되돌아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법이 으레 그렇듯이 생길 수가 없다. 그 밖의 다른 대지에 분포된 근원(根源)은 약(藥)이 생기는 곳이기에 그 땅의 끝까지 이르니, 법이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
여래의 도혜(道慧)도 이와 같으시다. 본래의 청정함을 따르므로 대애(大哀)로써 견고한 근원[元]과 평등각종(平等覺種)을 내시고, 마침내 진제(眞諦)가 되신다. 미묘하게 근본에 통달하시어 동요시킬 수 없으므로 이것을 뿌리라고 하고, 선권방편(善權方便)을 줄기라고 하고, 지혜는 가지라고 하며, 법계는 마디라고 한다. 그리고 파괴될 수 없는 일심탈문삼매정수(一心脫門三昧正受)는 잎이고, 장엄한 각의(覺意)는 꽃이며, 나무가 끝까지 번창하는 것은 모든 신통과 지혜이고, 해도지견(解度知見)은 열매이다. 그리고 변재가 있어 말함에 통달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을 땅이라고 한다. 여래의 지혜는 집착의 뿌리가 없으시다. 무엇 때문에 집착의 뿌리가 없다고 하는가? 영원히 믿을 것이 없기 때문이니, 이것을 끝까지 번창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가히 생겨날 수 있는 집착의 뿌리가 없으므로 행하시는 일이 없다. 보살행을 끊으면 근본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부르고, 보살행을 펴면 이것을 의지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만일 어떤 보살이 여래의 무극 지혜의 근원을 가까이하면 곧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으니, 그 도의 뿌리로 인하여 대애를 낸다. 줄기에 가까이 가는 것은 견고한 정진이고, 그 줄기로 인해서 다음에 가지가 생기는 것은 도무극(度無極)이며, 길이 성취하여 가지를 가까이하고 잎이 생기는 것은 금계(禁戒)를 배우고 고요히 때를 아는 것이다. 꽃에 가까이 가는 것은 모든 상호(相好)를 말하니 온갖 공덕의 근본이며, 마디란 때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다음 열매가 생기는 것은 곧 끝까지 번창하는 것을 말하니, 불기법인(不起法忍)으로써 거친 말이 없이 부드럽고 인자하고 온화한 곳에 이른다. 또 그 열매란 신통과 지혜를 말하니, 곧 도과(道果)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지혜는 두 가지 일을 말미암지 않고 생긴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무위(無爲)와 유위(有爲)의 넓은 골짜기이다. 만일 계곡에 떨어져 무극(無極)인무위(無爲)에서 노닐면 모든 성문승과 연각승, 또 그 지성(志性)과 함께 합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두려워하는 일이 없이 3애(愛)와 3류(流)의 근원에서 노닌다면 여래의 지혜가 생기는 일이 없을 것이며, 또한 퇴환(退還)하지도 않을 것이다. 만일 생긴 것이 없다면 이미 성스러운 성품에 통달하여 평등심(平等心)을 닦아 모든 보살에 대하여 피차(彼此)가 없을 것이다. 또 정각(正覺)을 관찰하면 대도(大道)가 찬란하시고 바닥이 없이 우뚝하게 높아 진제(眞諦)가 되신다. 지혜는 더함도 덜함도 없이 그 뿌리가 견고히 머물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구경에 통달하게 하시고, 무(無)를 명료히 깨달아 깊이 믿게 하신다. 이것이 불자여, 일곱 번째 일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설산(雪山)의 견고한 봉우리에
무근착(無根着)이라 이름하는 약 있으니
그 약은 대신통 있어
위의(威儀)의 빛 비할 데 없고
두루 모든 총림과
온갖 수목들의
뿌리ㆍ줄기ㆍ잎ㆍ가지 기르니
가지는 무(無)라는 뿌리에 인(因)하네.
일체의 불종(佛種)이
자연히 도혜(道慧)와
덕지(德旨) 이루는 것도 이와 같아
일체지(一切智) 따라 수행하네.
명료히 깨달아 불도 행하고
성로(聖路) 받들어 펴며
자애(慈哀) 평등히 익히면
명철한 깨달음 생장하리라.
“또 불자여, 비유하면 겁재변(劫災變) 시에 큰 불이 활활 일어나 삼천대천세계를 태우면 모든 수목과 약초 같은 만물과 위신산과 대위신산과 대금강산에 이르기까지 태우지 않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가령 어떤 사람이 마른 풀과 실한 소나무로 만든 이층 누각을 활활 타는 불길 속에 던진다면,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잎사귀 하나라도 타지 않는 것이 있겠느냐? “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지 않게 하려 하여도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 그러나 불이 수목과 높이 쌓은 땔나무나 풀을 태우지 않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여래의 성스러운 지혜와 3달(達)하신 신지(神智)를 한정하여 중생수와 국토의 다소와 모든 법의 근저(根底)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무수겁 동안 두루 보지 못하게 하고 작은 장애라도 있어서 미치지 못하게 하려 한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각의 도혜(道慧)는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으며 통철(通徹)하지 못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이라고 호칭하니, 이것이 여덟 번째 일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만일 겁(劫)의 재난을 만나
천지가 깎이고
일시에 남녀와 수목과 열매가
다 타버린다면
불자여, 기억하여 살필진대
그곳에 있는 모든 것
금강도 오히려 녹아 없어질 것이거늘
하물며 마른 초목이랴.
산과 언덕과 모든 것들
어찌 타지 않고 배기리오.
안주하는 지혜는
모두 능히 분별하여 아노니
미래의 중생류와
수많은 겁 동안의 불토를
모든 부처님 다 밝게 통달하시니
이같이 한량없다네.
“또 불자여, 비유하면 재변의 바람이 일어날 때와 같다. 훼명(毁明)이라고 하는 큰 바람이 일어나면 위신산과 대위신산을 무너뜨리고 금강산과 모든 삼천대천세계에 불어 닥쳐 산산이 파괴하여 남음이 없게 한다. 또 인연개(因緣蓋)라고 부르는 바람이 삼천대천세계에 불어 날려서 들어올려 다른 불국토에 떨어뜨린다. 가령 저 인연개풍만이 홀로 제멋대로 불고 훼명풍이 없다면 곧 시방의 한량없는 모든 불경계를 파괴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인자여, 여래께서는 무극의 큰 지혜가 있으시니, 모든 번뇌욕을 무너뜨림이라고 한다. 정각(正覺)께서 이 끝없는 큰 지혜로써 모든 보살들의 번뇌와 장애를 불어 없애신다. 여래께는 다음에 한량없는 성달(聖達)이 있으시니 훌륭한 임시 방편을 총섭함이라고 한다. 능히 애결(愛結)의 괴로움을 없애시고 묘한 도량에 이르시며, 인하여 다시 처음으로 뜻을 낸 보살들과 근(根)이 아직 익지 않은 사람들을 개화시키신다. 가령 모든 여래께서 이 훌륭한 임시 방편을 총섭하시어 대도량을 이루시지 않는다면 무수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성문승과 연각승을 수행하게 하신다. 세존께서는 훌륭한 임시 방편을 따르시어 모든 보살 대사 등으로 하여금 성문과 연각의 지위를 초월하게 하시고 이로써 자재하여 마무는 바가 없게 하신다. 이것이 아홉 번째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겁 중의 공황에 처하면
모든 하늘들은 어지럽고 불안해 하고
신위산과 수미산이
모두 다 무너지며
이 때에 바람이 일어나
능히 제지할 자 없어
한량없는 모든 불토
잘게 부서져 남음 없듯이
시방에
자재함 얻으신 성자(聖慈) 계시어
모든 보살의 번뇌
부수어 없애시고
그곳에 다시 도풍(道風) 불어
선권(善權) 따라 닦게 하시니
곧 그로써 구호하시어
성문 행자(行者) 안주케 하시네.
“또 불자여, 여래의 지혜는 모든 성지(聖智)에 들어가 우뚝하시니, 모든 백성의 끝과 처음의 경계에 두루하지 않는 일이 없으시다. 왜냐하면 욕상(欲想)이 있으면서 세존의 지혜에 도달하고자 하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또 여래의 지혜는 모든 모습을 여의신 자재한 지혜이기에 자연스럽게 노니시어 장애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의 경(經)을 쓴다면 그 책은 크기가 삼천대천세계의 바다와 같거나 혹은 신위산과 같거나 대신위산과 같거나 혹은 모든 대지와 같다. 요점만 들어서 말하면 천 개의 세계와 같거나 4역(域) 천하의 경계와 같거나 염부제 땅과 같거나, 혹은 큰 바다와 같거나 수미산과 같거나 대신궁(大神宮)과 욕행천관(欲行天舘)과 같거나 색행천(色行天)과 같거나 무색천(無色天)과 같고, 만일 대경(大經)을 집대성한다면 너비와 길이와 상하가 마치 삼천대천세계와 같다. 그런데 이 대경권(大經 卷)에 티끌 하나가 일어나고 또 모든 경 위에 각각 티끌이 있어 대경(大經) 속에 두루 퍼져 있다면, 그 때에 한 장부(丈夫)가 자연스럽게 출현하여 총명한 지혜로 몸소 그 속에 들어가 본다. 그 장부는 천안(天眼)이 있는데 그 눈이 청정하여 두루 다 볼 수 있으므로 천안으로 그것을 관찰하고 생각하기를, ‘이제 이 경권이 이와 같이 끝없이 광대한 모습이나 그 위에는 작고 작은 티끌들이 있을 뿐이어서 중생들에게 이익을 줄 것이 없구나. 내가 차라리 무극(無極)의 힘과 대정진의 힘으로 이 경을 부수어 대경을 흩어서 모든 백성에게 이익을 주리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무극의 힘과 정진의 힘을 일으켜 곧 서원한 대로 대경권을 취하여 뿔뿔이 흩어서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하나의 경전처럼 많은 수의 경전 역시 이와 같이 한다.
이와 같이 인자여, 여래ㆍ지진께서도 헤아릴 수 없이 밝은 한량없는 지혜로써 모든 중생들의 강과 바다 같은 마음이 행하는 곳에 들어가시어 두루 중생의 지조(志操)를 명료히 아신다. 여래의 지혜는 한정하여 헤아릴 수 없고, 두루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으시어 끝에 이를 수 없다. 정각의 지혜는 헤아려 알 수 없어 모든 중생의 경계를 관찰하신다. 이러한 미증유의 일을 괴이하게 여기는 것은 이 중생류가 어리석어 그렇게 여기는 것이니, 여래의 성스러운 지혜는 분별할 수 없다. 세존께서 두루 들어가시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반드시 대도(大道)를 드러내 보여 모든 얽매인 생각들을 자연히 없어지게 하리라. 부처님의 법신이 성스러움을 입혀 그 힘으로 모든 집착을 여의게 하리라. 정진의 지혜로 마땅히 돌아가야 할 곳을 명료히 알아 무극삼매(無極三昧)의 선정에 이르게 하리라. 정도(正道)를 연설하여 모든 생각[想]을 없애게 하고, 가르쳐서 무상도혜(無上道慧)를 생각하게 하리라. 5취(趣)에 있는 모든 백성을 교화하여 무극에 달하게 하리라’고 하신다. 이것이 불자여, 열 번째 일이다. 여래ㆍ지진께서 모든 보살을 권하시어 그 마음이 도의(道義)에 들어가도록 하신다. 이와 같은 비유로 무수히 많은 모든 보살들을 구제하시니, 여래의 지혜에 힘입어 그 마음을 열어주고 교화시키시어 대도에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경권이
크기가 삼천세계 같으나
자연히 티끌이 생기어
모두 그 위에 흩어지고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밝은 눈으로 보고 경전을 허물어
모두 각각 나누어 널리 흩어
5취(趣)의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는 것처럼
세존께서도 이와 같으시어
큰 바다 같은 지혜로
중생의 마음이
모든 상념(想念)으로 미혹한 것 보시고
부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 불쌍히 여기시어
뭇 상념 풀어 없애 주시니
모든 보살들 받들어 우러르고
진리로써 집착 없애네.
“또 불자여, 무엇을 보살이 여래의 경계에 들어간다고 하는가? 이 보살은 지혜가 장애 없는 곳에 들어가 모든 경계를 알아서 여래의 경계가 된다. 모든 불토의 모든 경계는 중생의 경계이나 모두 본래 없는 것이어서 나뉘어지는 것도 없고 파괴되는 것도 없다. 법계란 음개제(陰蓋際)가 없고 또 본제(本際)란 끝이 없는 경계이다. 비유하면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고 또한 경계도 없으며 또한 없는 것도 아니어서 모두 여래의 경계로 들어간다. 마치 중생의 종류가 한량없고 끝이 없는 것과 같이, 여래의 경계 또한 이와 같이 한량없고 끝이 없다. 왜냐하면 그 중생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헤아려 알 수 없으나 여래께서는 그것을 찾아내시어 한량없는 지혜로써 그들을 개화시키기 때문이다. 마치 용왕존(龍王尊)이 자재하여 한량없이 많은 물을 거두었다가 때에 따라 비를 내리니, 그 물방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나 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밖에서 오는 것도 아닌 것처럼, 여래의 경계도 이와 같아 뜻하는 것에 따라 일으키는 것이 있으면 곧 자연히 이루어지니, 그곳에는 물을 것도 없고 또한 스승도 없다. 마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큰 바닷속의 물이 모두 용왕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데 따라 생기는 것처럼, 일체의 한량없는 성달(聖達)께서도 이와 같이 모든 신통과 지혜에 이르시어 법의 바다와 같이 행하신다. 이것은 모두 옛날에 보살이셨을 적에 발심하시어 세우신 원(願)이니, 그 행을 따름으로 인하여 차별이 생긴다.”
여쭈었다.
“무엇을 무량하여 큰 바다가 된다고 하며, 무엇을 모든 신통과 지혜의 바다가 한이 없다고 합니까?”
대답하셨다.
“생각[思議]이 없되 해설하는 것이 많으면 큰 바다에 이른다. 이제 대략 요점을 들어 분별하여 말하겠으니,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 잘 생각하여라. 염부제에 5백 갈래의 강하(江河)가 있어 큰 바다로 들어가고, 구야니(拘耶尼) 지역에도 5백 갈래의 강이 있어 큰 바다로 들어가며, 불우체(弗宇逮) 지역에는 4천 갈래의 강하가 큰 바다로 들어가고, 울단왈(欝單曰) 지역에는 만 갈래의 강이 큰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이 물들이 합해서 큰 바다로 들어가면 그 바닷물이 매우 많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10광용왕(光龍王)이 내리는 빗물은 저 모든 강에 흐르는 물보다 많다. 또 4대역에 있는 모든 물과 10광용왕이 내린 빗물이 큰 바다로 들어간다 해도 그 물은 백 광용왕이 내린 빗물이 바다에 떨어지는 것만 못하니, 이 물이 가장 많다. 또 4대역의 물과 10광용왕과 백 광용왕이 내린 큰 물이 큰 바다로 들어가는 양보다 대유용왕(大遊龍王)의 몸 속에서 나와 큰 바다로 들어가는 물의 양이 두 배나 많다. 요약해서 말하면 마나사용왕(摩奈斯龍王)과 뇌후(雷吼)용왕이 내리는 비가 다시 또 두 배가 되고, 난두(難頭)용왕ㆍ화난(惒難)용왕ㆍ무량지광(無量之光)용왕ㆍ묘군(妙群)용왕ㆍ대렴(大㷿)용왕ㆍ대빈신(大頻申)용왕이 내리는 비 역시 이와 같다. 그리고 이 열 명의 대용왕이 억(億) 명의 용왕을 세워 각각 비를 내리므로 그 물이 한량 없다. 그러나 만일 4대역의 큰 바다의 물과 열 명의 용왕이 내리는 물과 80억 종(種)의 용왕이 내리는 물이 모두 큰 바다로 들어간다 하여도 염부제의 바다에 있는 용왕의 장자(長子)만 못하며, 모든 큰 강하의 물들과 홍우(洪雨)가 10광대용왕(光大龍王)의 궁에서 나오는 물만 못하다. 그리고 4대역의 모든 강하와 앞에서 말한 모든 용왕이 내린 비와, 10광용왕과 백 광대용왕의 궁에서 나오는 물을 모두 합하여도 대엄정용왕(大嚴淨龍王)의 궁에서 나오는 물만 못한다. 요약해서 말하면 마나사(摩奈斯)용왕ㆍ뇌진(雷震)용왕ㆍ난두(難頭)용왕ㆍ화난(惒難)용왕ㆍ무량광명(無量光明)용왕ㆍ대묘약군(大妙若群)용왕ㆍ대명렴(大命㷿)용왕이 모두 다 이 열 명의 용왕만 못하며, 80억 용왕의 궁에서 나오는 물이 해룡왕(海龍王)의 장자의 궁에서 나오는 물만 못하다. 이와 같이 모든 용왕들의 물이 큰 바다로 돌아간다 하여도 모두 해대용왕(海大龍王)이 파괴되지 않는 비를 내리는 것만 못하니, 그 물이 가장 많다. 염부제의 물과 구야니의 물과 불우체의 물과 울단왈의 물과 10광용왕의 궁전에서 내리는 비와 백 광용왕과 대유리용왕의 궁전에서 내리는 비와 마나사용왕과 뇌진용왕과 난두용왕과 화난용왕과 무량광명용왕과 묘군용왕과 대명렴용왕과 대빈신용왕의 궁전에서 나오는 비와, 그리고 80억 종성의 용왕에게서 나오는 물과 4대역의 해룡왕의 장자가 내리는 비와 해룡왕의 파괴되지 않는 비와 그 밖의 뭇 큰 빗물들이 모두 다 해대용왕의 맑은 유리 속에서 나오는 물만 못하니, 이 물은 큰 바다를 두루 채운다. 큰 바다의 물은 이와 같이 한이 없다. 또 바닷물이 한량없는 것처럼 그 보품계(寶品界) 역시 한량없고 중생계 역시 한이 없으며, 대신(大身)을 보는 것 역시 헤아릴 수 없다. 큰 바다의 물은 한량이 없고 온갖 보배의 품종도 무한하다. 불자여,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그 큰 바다의 물은 정녕 한이 없는가?”
대답하였다.
“한이 없습니다.” “큰 바다의 덕을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여래께서도 이와 같이 지혜가 한량없으시다. 백 배나 천만억 배나 거억만 배(巨億萬倍)라도 비유할 만한 것이 없어 말로 나타낼 수 없으나,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큰 바다를 이끌어 비유한 것이다. 부처님의 대도(大道)는 성스러움이 이보다 더하다. 임시로 삼매를 빌리신 것을 인하여 그 밝음은 끝이 없다. 여래의 지혜가 이르는 곳이 우뚝하시어 마치 큰 바다와 같다. 그 뜻이 한량없으시어 처음 뜻을 낸 때부터 보살의 일체지(一切智)의 행에 이르기까지 단절하지 않으신다. 도의 보배가 무량하시어 모든 도품(道品)과 삼보의 법이 다하는 일이 없다. 중생을 권화하여 이러한 관(觀)을 이루게 하시니, 모든 배우는 이와 다 배운 이와 연각승이 모두 제도받는다. 무극의 진리로써 뜻하는 곳이 없이 무량함을 모두 관하여 제일 흔연의 지위[第一欣然之地]에 머문다. 그리하여 비로소 보살에서 곧 능히 장애가 없는 지위에 이르며, 모든 보살을 교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그만두거나 물러나지 않게 한다. 이것이 불자여, 모든 보살들이 능히 모든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또한 능히 모든 것에 두루하고 한량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청정한 모든 품(品) 쌓으면
무수하여 헤아릴 수 없고
많은 생각의 경계 역시
모두 끝이 없구나.
뜻을 한정한다면
그 마음 두루하는 곳 없으리니
모든 10력(力)께서
이 경계 구하시네.
비유하면 마치 용이
버리고 여의는 일 없이
마음에 생각하는 대로
빗방울 내리는 것 같으니
가령 마음이 온 곳 있다면
돌아갈 수 있을진대
그 용은 '내가 비 내리리라'는
생각 없다네.
모든 10력께서도 이와 같으시어
오신 곳도 없으시고
돌아가시는 곳도 없으시며
능인(能仁) 역시 얻을 수 없네.
영원히 일으켜 짓는 것 없으니
하물며 마음의 생각을 놓는 것이랴.
법계 한량없어
강하의 모래 같구나.
그 바다 끝이 없고
물과 보배 또한 그러하며
그곳에 사는 모든 생물 역시
모두 한량없으나
그 물 모두 한맛이기에
살아 있는 것들 모두가 우러르니
이곳에 처한다면
다른 물은 마시지 않으리.
대성 또한 이와 같으시어
묘한 지혜 끝이 없으시고
3보(寶) 제한 없고 장애 없어
도(道)의 요체[要] 헤아릴 수 없기에
모든 학(學)과 불학(不學)과
수없는 백성들과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이
뜻 모아 부처님 도혜(道慧) 원하네.
“불자여, 무엇을 보살이 여래의 성스러운 지혜와 장애 없는 행에 들어가는 위의와 예절을 갖춘다고 하는가? 비유하면 여래께서 본래부터 생긴 적도 없고 앞으로 내세에도 만들어지는 일이 없으나 때[時]와 연(緣)에 따르는 까닭에 홀연히 생기시는 것처럼, 이 여래행(如來行)도 일어나지 않고 없어지지 않으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또한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비유하면 법계가 한량없으나 또한 한계지어지지 않는 일도 없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자연도 없고 몸도 없기 때문에 법계라고 하며, 대성께서도 이와 같으시어 여래라고 하니, 행이 한량없되 또한 한량없지도 않으시고, 몸이 없는 곳과 또한 자연도 없는 곳에 들어가시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나는 새가 허공을 백천 년 동안 날아갈 적에 간 곳도 있고 못간 곳도 있으니, 앞을 보고 뒤를 살펴도 그 허공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여래의 행도 이와 같아서 억백천 겁 동안 끝없이 강설하여도 찬탄한 것에는 끝이 있으니, 설한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여래행이므로 끝이 없기 때문이다. 여래께서는 이미 장애 없는 행에 머무셨으나 또한 머무시는 곳이 없이 중생을 위하여 이와 같이 나타내 펴시니, 이와 같은 행으로 일체 장애의 흔적을 모두 건너신다.
마치 금시조왕(金翅鳥王)이 허공을 날면서 청정한 눈으로 용궁을 보고는 본래의 모습을 변하여, 마땅히 죽어야 할 자를 알아 바닷물을 치며 날개를 떨쳐 날아올라, 파도를 일으키며 물을 가르고 모든 용과 용의 처첩들을 잡아먹는 것과 같다. 여래께서도 이와 같이 지혜에 장애가 없으시어 끝없는 행에 머무신다. 모든 법계에서 두루 중생의 모든 근의 순숙(純淑)을 관찰하시고,예전에 본래 심은 온갖 덕의 근원[德原]에 따라 곧 무극의 여래의 10력으로써 형상을 보이신다. 종시(終始)의 바다에 들어가 생사(生死)의 연못을 가르고 많은 백성을 개도하신다. 능히 근기에 응하시어 많은 백성을 종시의 바다에서 건져내시고 부처님의 도법(道法)에 뜻을 세우게 하시며 모든 언행(言行)을 끊어 없애고 여래의 생각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하신다. 생각이 없으므로 지혜에 장애가 없게 되니, 그것이 곧 머무르며 서는 자리이나 머물되 머무는 곳이 없다.
마치 해나 달이 빛을 천하에 비출 때 짝이 없이 홀로 다니며 서는 일 없이 허공의 길을 가면 사람들이 우러러보지만, 해와 달은 ‘내가 말할 것이 있다’거나 ‘돌아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세존께서도 이와 같이 열반에서 노니시며 청정한 법에 들어가시지만 또한 상념이 없으시다. 또 모든 법계에서 온갖 행을 뛰어 건너는 것을 나타내 보이시고 5취(趣)의 중생에 대하여 게으름을 피거나 쉬시는 일이 없으시다. 또 전심(專心)으로 믿는 것도 없이 창달(暢達)하시며 불사(佛事)를 널리 펴시되 또한 일도 없으시다. 불자여, 이것이 모든 보살이 평등히 여래의 지혜로운 행에 들어가는 것이니, 한량없되 또한 한량없는 일도 없이 모든 인연 짓는 일을 대신한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본래 없어 다함이 없고
생긴 적도 멸한 적도 없으며
헤아리되 본래 없으니
처소가 없어 볼 수 없다네.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이와 같아서
그 행이 한량없으나
본래 없는 자연이어서
두 가지 일이 없네.
비유하면 모든 법계가
처소가 없고
또한 한량없으며
또한 한량없는 일도 없듯이
도행(道行) 또한 이와 같아
성인의 통달하심 끝이 없고
분별하는 것도 무극이시니
이는 몸이 없으시기 때문일세.
마치 새가 날며
억 겁 동안 허공에 있을지라도
전후(前後) 또한 이와 같이
텅 비어 경계 없이 평등하듯이
최승(最勝)께서 백천 겁 동안
행하여야 할 것을 강론하시되
방편 따라 이루시니
선덕(善德)을 잃지 않으시네
금시조가 허공에서
멀리 물 속을 살펴
용의 목숨 끝날 때 알고
용과 비후(妃后) 모두 잡아먹듯이
10력의 지혜 자재로우시어
모든 번뇌 다 태우시고
온갖 덕의 근본 잘 짓게 하시니,
생사의 근원에서 뽑아내시네.
비유하면 해와 달이
허공을 지나면
백성들이 안온해지나
빛 또한 상념이 없는 것처럼
세존 역시 이와 같으시니
장애 없는 법으로
무수히 많은 중생 개화하시되
모든 상념 일으키지 않으시네.
“불자여, 무엇을 보살이 여래의 개도(開道)에 들어간다고 하는가? 이 보살은 집착하는 모든 행들을 건너되 머뭇거리지 않으며, 평등한 법미(法味)에 대하여 둘 아닌 들어감[不二入]을 명료히 깨닫는다. 그리고 다시 여래께서 천명하신 무상각(無想覺)과 무행지각(無行之覺)과 무처소각(無處所覺)과 무한중각(無限中覺)과 무변제각(無邊際覺)에 들어가 성취하지 않는 것을 버리고 중간에 의착(倚著)하여, 모든 문자와 음향이 처소가 없고 모든 음성에도 언교(言敎)가 없는 줄을 관한다. 중생의 행을 끝까지 다 궁구하고 평등각을 받들어 지성(志性)과 모든 근(根)과 번뇌와 애욕이 모두 청정해진다. 여래의 도안(道眼)으로 삼세의 모든 것을 두루 평등하게 보니, 마치 큰 바다와 같다.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보며 모든 중생을 받아들이고 모든 몸 가진 중생들을 보므로 큰 바다라고 한다.
여래의 도(道)도 이와 같아 중생들의 마음과 지성이 돌아가는 곳을 보고, 비록 비추는 것이 있으나 또한 비춘다는 생각이 없으므로 자연이 된다. 그러므로 여래의 도로써 개도(開導)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여래께서 개도 받을 자들을 교화시키시되 이미 문자로 강설하셨으나 또한 말씀하신 것이 없고, 모든 음향에서 펴신 것이 없으며, 비록 가르치신 말씀이 있으나 본래 하신 말씀이 없으며, 설사 우러름을 받으신다 하여도 또한 우러름을 받으신 일이 없다. 또 다시 중생을 권화하시니 지금 마땅히 그 대강을 들어 연설하리라. 여래의 도에 의해서 개화된 자는 최정각을 이루되 중생을 제한하지 않으니,여래라고 하는 것과 같다. 몸이 머무는 수[身住數]와 같고 뭇 국토의 수와 같고 일체 삼세의 모든 수와 같다. 모든 몸이 머무는 수 또한 이와 같아 차별이 없다. 도교(道敎)의 수와 같고 모든 말의 수와 같고 모든 여래의 법계의 수와 같고 허공 수와 같아 장애가 없는 경계이다. 모든 어행(御行)으로 개도되는 언교(言敎)의 경계와 같고 열반의 한계와 같다. 중생의 몸의 형상이 처하여 머무는 수 또한 이와 같고, 입으로 하는 말의 한계 역시 이와 같다. 몸과 입의 수와 같고, 장애 없는 마음이 머무는 한계의 수와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그가 이와 같이 무수한 곳에 들어감으로써 곧 3장(場)을 청정히 하고 도덕에 이른다. 이로 말미암아 자신과 모든 중생을 평등히 다루게 되며, 이와 같이 일체가 고요한 것을 보고 평등하게 살펴서 열반계로 인도한다. 이미 이와 같은 자연스러움을 본 자가 모두 일체에 들어가면 자연이 아니다. 또한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다. 생김도 없고 멸함도 없으므로 또한 자연이고, 나에 대하여 내가 아니라고 여기므로 또한 다시 자연이고, 남에 대해서 남이 아니라고 여기기에 또한 자연이다. 부처님께서는 생각하시는 것이 없으므로 또한 자연이며 법계도 자연이고 허공도 자연이나, 또한 자연이 아니다. 이미 이것을 명료히 깨달아 최정각을 이루어 정법의 남음이 없는 지혜에 이른다. 그리하여 여래께서 무극의 대애(大哀)로 많은 중생을 개화시키시는 것이, 비유하면 허공이 세계의 모든 방속(方俗)을 품어 받아들이되 지성(志性)이 자연스럽게 세간을 이루는 것과 같음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무리는 다하는 일도 없고 자라는 일도 없으며 또한 생겨나는 일이 없되 생기는 것이 고요한 것도 이와 같아, 최정각을 이루되 또한 깨닫는 것이 없다. 또 그 모습이란, 또한 모습이 되는 것이 없으며 또한 다시 이 모습이되 온갖 모습이 없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켜 모두 여래가 되게 하여 견줄 이가 없게 한다 하여도 또한 형용(形容)이 없는 것과 같다. 그가 또 이들을 화현(化現)시키고 나서, 곧 다시 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기를 모두 겁수(劫數)가 되도록 한다면,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변화된 그 사람들을 무엇으로 교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발심하게 하여 여래가 되게 하였겠느냐?”
세존께 말씀드렸다.
“제가 알기로는 이치를 드러내어서 여래의 무리로 교화하되 교화된 일이 없는 것같이, 변화된 무리 역시 그렇습니다.”
대답하셨다.
“장하고, 장하다. 진실로 네가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불자여, 모든 중생은 잠깐 사이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無上正眞之道]를 체득하여 최정각을 이룬다. 보살의 수(數)를 이루는 것도 이와 같고 이루지 못하는 것 역시 이와 같아 더함도 덜함도 없다. 왜냐하면 또 도(道)를 살펴보면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없으므로 정각을 이루는 일이 없고 길이 이익을 주는 일도 없으며, 비록 정각을 이루더라도 또한 체득한 것이 없다.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은 것으로써 여래에 들어가 비로소 정각을 이루게 된다. 만일 명료히 깨닫고 싶으면, 마땅히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여래는 한 모습으로서 같은 품류(品類)이시니 품상(品相)이 없으시다. 이것을 혜성도각삼매정수(慧成道覺三昧正受)라고 한다. 이러한 선정의 뜻을 통달한 뒤에는 낱낱이 깨달은 것이 법신뿐이어서 남음이 없으니, 모든 중생의 입신(立身)을 뛰어넘는다. 비유하면 한 사람이 최정각을 이루어 도문(道門)에 이른 것과 같으니, 모든 중생이 불도를 이루어 법문(法門)에 이르는 것도 이와 같아 차별이 없으므로 한량없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각문(正覺門)을 이루게 하여 한량없는 모든 몸에 들어가 머무는 것이다. 여래계(如來界)는 끝이 없고 중생계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모든 보살이 여래에 들어가 최정각을 이루면, 낱낱이 이루게 되는 것이 중생이 본래 여래의 몸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만일 여래ㆍ지진ㆍ최정각 문에 두루 들어가게 된다면 그 몸이 행하는 것 역시 생긴 일도 없고 잃는 일도 없기 때문이니, 하나를 얻으면 그 나머지도 또한 그렇게 되는 것과 같다. 모든 법계에 이와 같이 들어가되 처소를 여의지 않고 언사를 버리지 않는다면, 진실로 이것이 여래의 법신이다. 왜냐하면 만일 능히 모든 곳에 두루 들어갈 수 있다면 정각을 이루어 무극의 지혜에 이를 것이며, 그 고요함을 널리 펴고 불도수(佛道樹)의 사자좌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보살이 두루 자기 마음을 명료히 알면 능히 정각을 이루어 곧 법신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여래ㆍ지진께서는 마음의 근본을 버리지 않고 대도(大道)에 이르셨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과 같으면 그 나머지도 그와 같으므로 그로써 모든 마음을 개도(開導)하여 이 들어가는 일을 이루게 된다. 이것이 불자여, 모든 보살들이 모든 대성(大聖)이 되어 이로써 밀고 들어가 최정각을 이루고 널리 두루하여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되, 어기거나 버리지 않고 계착하는 바가 없으며 게으르거나 쉬는 일이 없고 독실히 믿는 일도 없이, 부사의한 법품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이미 두 가지를 해탈하여 둘이 없고
모든 법 명료히 깨달아
평등하기 허공과 같으니
두루 모든 경전 깨달았네.
평등하여 이미 내가 없으니
이것이 모든 법 깨달은 것이며
이미 성각(聖覺) 분별하였으되
일체를 깨달은 일 없네.
비유하면 마치 사방 지역의
형체 있는 모든 것 받아들이고
평등히 흐르는 물 받아들이기에
이름을 바다라고 하듯이
10력께서도 이와 같으시어
중생의 해인(海印)이시니
그 지성(志性) 환히 아시기에
분별(分別) 이라 부르네.
마음이 모두 변화[化]와 같고
모든 부처님께서도 화현(化現)하신 것 같으니
평등히 자연을 받드는 것은
변화 속에서 다시 변화된 것 같네.
불도는 모두 사설(辭說)이며
모든 중생류는
본래 자연이어서 평등하니
더함도 없고 덜어짐도 없네.
최승께 선각도(善覺道)라는
삼매 있으셨기에
불수(佛樹) 사이에 머무시어
이 선정의 뜻 이루시고
찬란한 빛 펴시어
한량없는 중생 비추시고
연꽃같이 도(道) 여시어
중생을 가르치셨네.
만일 미래겁에
중생국(衆生國)이 자연이라면
법을 생각하는 것도 이와 같아
모든 근과 지성으로
모든 것 평등히 관하여
내가 처하는 곳 없으리니
그러므로 가없이
도(道)가 덮은 것 깨닫고
보살도 행하여
고요히 자비와 지혜 넓히고
나무 아래 사자좌에 앉아
무상각(無上覺) 이루니
도력(道力) 비할 데 없고
법신의 성스러움 높고 높아
널리 들어가 두루하지 않는 일 없이
중생을 버리지 않으리라.
“불자여, 무엇을 보살이 여래께서 음향(音響)으로 인도하시는 법륜에 들어간다고 하는가? 그 보살은 여래께서 널리 생각하시는, ‘모든 중생들은 본말(本末)이 없으니 성취할 것도 없다’고 하신 뜻을 훌륭히 세워 모든 법에 들어가지만 영원히 머무는 일이 없다.
그리고 한바탕의 번뇌를 끊어 진제(眞諦)에서 노닐고 모든 법에서 모든 견제(見際)를 여의며 탐욕의 경계를 버리어 끝이 없다.
문득 모든 법에 들어가되 마치 허공과 같아 행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없으면, 이는 곧 모든 법은 미칠 수 없다는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니, 본말이 영원히 고요해서 모든 법이 열반 그대로이다.
그 모든 문자와 음성으로 설하는 것 모두를 자연으로써 하면 이것이 법륜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래의 소리를 두루 펴는 것이 메아리와 같으므로 자연이라 말하는 것이니, 곧 자연의 법문인 법륜에 들어간다.
모든 소리가 한 소리가 되면 마침내 법륜에 들어가고 본말에 주인이 없고 문자가 다함이 없으면 마침내 법륜에 들어간다.
그러나 안과 밖에 쌓인 것이 없으니, 비유하면 모든 문자로 연설하는 것과 모든 언사와 같다.
비록 언사가 있더라도 진제를 버리지 않고 지난날을 강설하고 본말을 찬탄하여 무수히 많은 겁 동안 말한다 하더라도 모든 문자는 다함이 없다.
이와 같이 인자여, 여래ㆍ지진께서 굴리시는 법륜은 모두가 임시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니, 모두 문자일 뿐이다.
펴서 말씀하시는 것이 다함이 없으시되 독실하게 믿을 것도 없고 모든 소유(所有)도 없으며, 또한 생각하여야 할 것도 없고 메아리도 없으며, 또한 베푸시는 것도 없다.
그 분께서 굴리시는 법륜은 두루 일체에 들어가시되, 또한 들어가신 일이 없다.
임시의 문자와 같으므로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 만일 증명한다 하여도 일체의 나아갈 바는 모두 말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다.
세속의 모든 무리에 들어가셔서 말씀하신 세상 건지는 법이 이 경계에 들어왔으나 영원히 머무는 일이 없다.
이것이 여래음(如來音)이니, 두루 모든 중생계와 법신계의 보응(報應)하는 일에 들어가시더라도 영원히 머무시는 일이 없다.
그 모든 중생들이 온갖 종류의 소리를 내어 말한다 하더라도 그 모두가 여래의 법륜을 펴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여래ㆍ지진께서 굴리시는 법륜은 모든 소리를 내시되 나아감도 물러남도 없기 때문이다.
이 보살이란 여래께서 굴리시는 법륜에 들어가는 것이니, 보살 대사는 마땅히 이것을 세워 여래께서 한량없는 언사로써 말씀하시는 곳에 들어가야 한다.
무엇을 여래께서 들어가신 언사라고 하는가? 여래ㆍ지진께서 법륜을 굴리실 때 연설하시는 음성은 중생이 좋아하는 행과 생각을 따라 펴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는 무괘애구경무외(無罣礙究竟無畏)라는 삼매가 있어 법륜을 굴리시기 때문이다.
이 선정의 뜻으로 삼매에 드실 때 중생 모두가 그 소리를 따른다.
법륜을 굴리실 때 낱낱의 정각음(正覺音)이 입에서 나와 낱낱의 언사로써 중생에게 비유의 소리를 나타내시니, 모두 각각의 뜻에 따른 것이다.
이 삼매정수로써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면 이것이 여래ㆍ지진께서 굴리시는 법륜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듯 도법으로 말씀하신 것을 따르되 또한 들어가는 바가 없다.
이렇게 노니는 것이 곧 이곳에 들어가 여래법의 성교(聖敎)의 언사를 듣는 것이다.
불자여, 이것이 모든 보살이 여래께서 굴리시는 법륜에 들어가는 것이니, 한량없는 곳에 이른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그 법륜 한량없어
구경계(究竟界) 성취하되
또한 길이 이익 주는 것 없으니
모두 두 가지 보호 없네.
말하는 모든 문자
모두 다함 없듯이
10력 또한 이와 같으시어
법륜이 항상 무궁하시며
율과 교 강설하시고
모든 유위에 들어가시되
또한 다시 들어간 일 없듯이
부처님의 법륜 또한 이와 같으시네.
모든 언사에 들어가시되
자연이어서 들어가신 일 없이
두루 중생에게 펴시니
모든 행이 남음이 없으시네.
유위의 삼매 초월하고
모든 선정의 뜻 궁구하며
묘법 구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이를 부처님의 선정의 뜻이라 하니
부처님 은혜받은 소치로써
모든 백성에게 이르러
최승께서 연설하시는 음성으로
부드러운 말 펴네.
일언(一言)의 성교(聖敎)로써
모든 중생에게 펴나
온갖 소리로 나누어 강설하니
남음이 없네.
부처님 일체존(一切尊) 되시어
중생 마음 밝게 아시니 a
말씀하시는 일 있으면
백성이 그 소리 듣네.
만일 법륜 굴린다면
모두 중생 위한 까닭이며
또한 모든 10력의 변화 보고
문자(文字)는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서 오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헤아리면 모두 멸진하여
진실로 있는 것이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