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기신론(大乘起信論)
온 十方의 最勝한 業으로 두루 아시며 色이 無碍自在하신 세상을 救濟하시는 大悲者와 저 佛身의 體와 相이신 法性眞如바다의 한량없는 功德藏과 如實히 修行하는 자에게 歸命하옵나니 衆生으로 하여금 疑惑과 邪執을 버리고 大乘의 바른 신심을 일으켜서 佛種子가 끊어지지 않게 하고자 합니다.
논에 이르기를 어떤 법이 능히 마하연의 信根을 일으킬새 그러므로 이 論을 說함이니라. 설에 다섯가지로 구분하였으니 무엇인가. 첫째는 因緣分이요, 둘째는 立義分이요, 세째는 解釋分이요, 넷째는 修行信心分이요, 다섯째는 勸修利益分이다.
처음 因緣分을 설하리라.
묻되 무슨 因緣으로 이 론을 설하는고? 답하되 이 인연이 여덟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여덟 가지라 하는고? 첫째는 因緣總相이니 이른바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의 고를 여의고 究竟樂을 얻게 하기 위함이지 世間의 名利와 恭敬을 구하는 것이 아닌 연고요. 둘째는 如來의 根本의 뜻을 解釋해서 모든 衆生으로 하여금 올바로 理解하여 誤謬가 없게 하고자 하기 위한 연고요. 세째는 善根이 成熟한 衆生으로 하여금 摩訶衍法은 堪任하여 믿음이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연고요. 넷째는 善根이 微弱한 중생으로 하여금 信心을 修習하게 하기 위한 연고요. 다섯째는 方便을 보여서 나쁜 業障을 消滅하고 잘 그 마음을 보호해서 어리석고 驕慢함을 멀리 여의고 邪惡한 그물에서 벗어 나게 하기 위한 연고요. 여섯째는 止와 觀 닦는 법을 보여서 凡夫와 二乘(聲聞,緣覺)의 마음의 허물을 對治하기 위한연고요. 일곱째는 專念의 方便을 보이어 佛前에 태어나서 반드시 결정코 믿는 마음이 물러서지 않게 하기 위한 연고요. 여덟째는 이익을 보여서 수행하도록 권한 연고이니 이러한 인연이 있을새 이런 까닭으로 이 논을 지었나니라.
묻되 修多羅의 가운데 이 법이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 거듭 말하는고? 답하되 수다라의 가운데 비록 이 법이 있다 하더라도 衆生의 根行이 같지 아니 하며 받아 드려 이해 하는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니 이른바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적에는 중생들의 根機가 영리하고 법문을 설하는 부처님도 色心業이 殊勝하사 圓音으로 한번 연설함에 異類(一切衆生)가 다 같이 알아들음일새 곧 論을 필요로 하지 않거니와 저 여래께서 涅槃에 드신 뒤에는 혹 어떤 衆生이 능히 自力으로 널리 듣고 아는 사람도 있으며, 혹 어떤 중생은 또한 自力으로서 적게 듣고 많이 아는 자가 있으며, 혹 어떤 衆生은 스스로 힘이 없어서 저 넓은 論을 因하여 아는 사람도 있으며, 스스로 중생이 다시 廣論의 글월이 많은 것을 번거롭게 여겨서 마음에 總持한 적은 글월이 많은 뜻을 攝取함을 즐겨 해서 능히 아는 사람도 있나니라. 이와 같아서 이 론은 여래의 넓고 크고 깊은 법의 갓이 없는 뜻을 다 거두어 드리고자 함일새 응당 이 론을 설함이니라.
이미 因緣分을 說했으니 다음에는 立義分을 說하리라.
摩訶衍이란 것은 總說하면 두 가지 種類가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고? 첫째는 法이요, 둘째는 義니라. 法이라 말한 것은 衆生의 마음을 이름이니 이 마음이 곧 一切 世間과 出世間의 法을 거두어 들였으니 이 마음을 의지해서 摩訶衍의 뜻을 나타내 보였나니 어찌 된 까닭인고? 이 마음의 眞如(離言)相(依言)이 곧 摩訶衍의 體를 보이는 까닭이며, 이 마음의 生滅因緣相이 능히 摩訶衍의 體,相,用을 보인 까닭이니라. 義라고 말하는 것은 곧 세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셋이라 하는고? 첫째는 體大니 이르되 一切法이 眞如平等하여 더하고 덜하지 않는 까닭이요, 둘째는 相大니 이르되 如來藏이 한량 없는 性功德을 具足한 까닭이요, 세째는 用大니 능히 一切世間과 出世間의 착한 因果를 生하는 까닭이니라. 일체 모든 부처님이 본래 탄 바인 연고며, 一切 菩薩이 다 이법을 타고 如來地에 이른 연고니라.
이미 立義分을 설했으니 다음에는 解釋分을 설하리라.
解釋하는데 세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셋이라 하는고? 첫째는 正義를 나타내 보인 것이요, 둘째는 삿된 執着에 대하여 다스리는 것이요, 세째는 道에 發心趣向하는 相을 分別한 것이니라. 正義를 보인다는 것은 一心의 法을 依支하여 두 가지 문이 있느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心眞如門이요, 둘째는 心生滅門이라. 이 두 가지 문이 각각 一切의 법을 總攝하니 이 뜻이 어떠한고. 이 두문이 서로 여의지 않는 까닭이니라. 心眞如란 것은 곧 이 一法界 大總相法門體이니 이른바 心性이 生도 아니요, 滅도 아님이니라. 一切의 모든 法이 오직 妄念을 依支하여 差別이 있으니 만약 心念(妄念)만 여의면 곧 一切境界의 相이 없으리라.이런 까닭으로 一切法이 本來부터 言說의 相을 여의었으며 名字의 相을 여의었으며 心緣의 相을 여의어서 畢竟에 平等하여 변하고 달라짐이 없으며 破壞할 수도 없는 것이니 오직 이 한 마음 인 까닭에 이름을 眞如라고 함이니라. 一切의 言說이 거짓 이름 뿐이요, 실다움이 없는 것이니 다만 妄念을 따랐을지언정 가히 얻을 수 없는 연고니라. 眞如라고 말하는 것도 또한 모양이 없는 것이니 이르되 言說의 窮極으로 말을 因하여 말을 보낸 것이어니와, 이 眞如의 體는 가히 보낼 것이 없음이니 一切의 法이 다 참다운 까닭이며, 또한 가히 세울 것도 없음이니 一切의 法이 다 한가지로 如如한 까닭이니라. 마땅히 알라. 一切法은 가히 말할 수도 없고 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까닭에 그 이름을 眞如라고 함이니라.
묻되 만약 이와 같은 뜻일진대 모든 衆生들이 어떻게 隨順하여야 능히 얻어들어 가릿닛고? 답하되 만약 一切의 法을 비록 말할지라도 능히 말함과(能說) 가히 말할(所說) 것이 없으며 비록 생각할지라도 또한 능히 생각함과 가히 생각할 것이 없는 줄 알면 이것이 이름이 隨順이요 만약 생각을 여의면 이름이 얻어 들어감이 됨이니라.
다시 眞如라는 것은 言說에 依支하여 分別한 것이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고? 첫째는 如實히 空한 것이니 능히 究境에 실다움을 나타내는 까닭이요, 둘째는 如實히 空하지 않은 것이니 自體에 샘이 없는 性功德을 具足한 까닭이니라. 말한바 空이란 것은 本來부터 一切의 染法이 相應하지 않는 까닭이니 이르되 일체의 差別相을 여의었으며 虛妄한 心念이 없는 까닭이니라. 마땅히 알라 眞如의 自性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요,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님도 아니요, 모양이 없는 것이 아님도 아니며, 있고 없는 두 가지 모양도 아니며, 한 모양도 아니며, 다른 모양도 아니며, 한 모양 아님도 아니며, 다른 모양 아님도 아니며, 하나이니 다름이니 하는 두 가지의 모양도 아님이니라 내지 통 털어서 말할진대 一切衆生들이 妄心이 있음으로써 생각 생각에 分別해서 다 서로 다 응하지 못함을 의지했을 때 이런 까닭으로 말하여 空이라고 했거니와 만약 妄心을 여의면 실로 空이라 할 것도 없는 까닭이니라. 말한바 不空이란 것은 이미 법체가 공하여 망령 됨이 없음을 나툰 연고로 곧 眞心이 恒常하여 변하지 아니해서 正法이 만족함일새 곧 이름이 不空이니라. 또한 모양 있음을 가히 취할 것이 없음이니 생각을 여읜 경계는 오직 증득한 이라야 서로 응하는 까닭이니라. 心生滅이란 것은 如來藏을 의지한 연고로 生滅心이 있으니 이른바 生도 아니요, 滅도 아닌 것이 生滅하는 것과 더불어 和合하여 하나도 아니요, 다르지도 아니함이니 이름하여 阿梨耶識이라 함이니라.
이 阿梨耶識이 두 가지 뜻이 있어서 능히 一切法을 거두기도 하며 一切法을 내기도 하나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고? 첫째는 覺義요, 둘째는 不覺義니라. 말한바 覺義란 것은 마음 자체가 생각을 여읜 것을 이름이니 생각을 여읜 相은 虛空界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은 바가 없어서 法界가 한 모양이니라. 곧 이것이 如來의 平等한 法身이니 이 法身을 依支해서 설하여 本覺이라 함이니라. 무슨 까닭인고? 本覺의 뜻이란 것은 始覺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始覺이 곧 本覺과 같은 때문이니라.始覺의 뜻은 本覺을 의지하는 까닭에 不覺이 있고, 不覺을 의지하는 까닭에 始覺이 있다고 설함이니라. 또 心源을 깨달은 연고로 이름이 究竟覺이요 心源을 깨닫지 못한 연고로 究竟覺이 아님이니라. 이 뜻이 어떠한고? 저 凡夫들이 前念에 惡業을 일으킴을 깨달아 알아서 짐짓 능히 後念을 그쳐서 그로 하여금 일어나지 못하게 하나니 다시 覺이라 이름하나 곧 이것은 覺이 아닌 까닭이니라. 저 二乘의 觀智(事理를 觀하는 智慧)와 처음 뜻을 발한 菩薩들은 念의 異相을 깨달아 念에 異相이 없으니 序分別執着의 相을 버린 까닭에 이름을 相似覺이라 함이니라. 저 法身菩薩들은 心念에 住相을 깨달아 心念에 住相이 없으니 分別하는 序念相을 여읜 까닭에 이름을 隨分覺이라 함이니라. 저 菩薩이 十地에서 배움이 다하여 方便이 滿足하여 一念이 서로 응해서 깨달은 마음이 처음 일어남에 마음에 처음이라는 상이 없음이니 미세한 생각을 멀리 여읜 까닭에 心性을 얻어 보아 그 마음이 곧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을 이름을 究竟覺이라 함이니라. 이런 까닭으로 修多羅에 설하사대 만약 어떤 衆生이 능히 無念을 관하는 자는 곧 佛智를 향함이 되는 연고라 하시니라.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처음이란 모양을 가히 알 수 없거늘 처음의 모양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곧 無念을 말하는 것이니 이런 까닭으로 一切衆生을 覺이라 이름하지 못한다 하나니 본래부터 생각생각이 相續하여 일찌기 생각을 여의지 못한 까닭에 비롯없는 無明이라 말함이니라. 만약 無念을 얻은 자는 곧 心相의 生,住,異,滅을 알 것이니 無念과 같은 까닭이니라. 실로 始覺과 다름이 없으니 四相(生.住.異.滅)이 함께 있어서 다 자립함이 없음이니 본래 平等하여 동일한 覺인 까닭이니라.
다시 本覺이 染을 따라 分別해서 두 가지 相을 내니 저 本覺으로 더불어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아니 하나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고? 一은 智淨相이요, 이는 不思議한 業相이니라. 智淨相이란 것은 이르되 法力의 熏習에 의하여 如實히 修行해서 方便이 滿足한 연고로 和合하는 識相을 破하고 相續하는 心相을 滅하여 法身의 智慧가 淳淨함을 나투는 까닭이니라. 이 뜻이 어떠한고? 一切心識의 相이 다 이 無明이니라.無明의 相은 覺性을 여의지 아니 하여 가히 무너지지도 아니하며, 가히 무너뜨리지 못할 것도 아님이니 마치 大海의 물이 바람을 인하여 파도가 움직이어서 水相과 風相이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아니하나 물은 움직이는 性이 아님이니, 만약 바람이 사라지면 움직이는 相은 곧 滅하나 젖는 성질은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은 까닭이니라. 이와 같이 중생들의 自性淸淨心이 無明風을 因하여 動하여 마음과 無明이 함께 형상이 없어서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아니하나 마음은 動性이 아님이니 만약 無明이 滅하면 相續이 곧 滅할지언정 智性은 무너지지 않는 까닭이니라. 不思議業相이란 智淨相을 依支하여 능히 일체의 殊勝하고 玄妙한 境界를 짓나니 이른바 한량 없는 功德의 相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根機를 따라서 자연히 서로 응하여 가지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는 까닭이니라.
다시 覺의 體와 相은 네가지 큰 뜻이 있으니 虛空으로 더불어 같으며 마치 조촐한 거울과도 같나니라.어떠한 것이 넷인고? 첫째는 如實空鏡이니 一切心의 境界相을 멀리 여의어서 한 법도 가히 드러날 것이 없으니 覺照의 뜻이 아닌 까닭이니라. 둘째는 因熏習鏡이니 이르되 如實不空이니 一切世間의 境界가 다 그 가운데 나타나서 나오지도 아니하고, 들어가지도 아니하며,잃어 버리지도 아니하고, 무너지지도 아니하여 항상 한 마음에 머물러 있음이니 一切의 法이 곧 眞實한 性인 까닭이며 또 일체의 染法이 물 들이지 못할 바이니 智體가 움직이지 아니하여 無漏가 具足해서 衆生을 熏習하는 까닭이니라. 세째는 法出離鏡이니 이르되 不空法이 煩惱 와 智를 벗어나서 和合의 相을 여의어서 순박하고 조촐하고 밝은 까닭이니라. 넷째는 緣熏習鏡이니 이르되 法에 벗어남을 의지하는 까닭으로 衆生의 마음을 두루 비춰 하여금 善根을 닦아서 생각을 따라 나타내 보이게 하는 까닭이니라. 말한바 不覺義라는 것은 이르되 如實히 眞如法이 하나인 것을 알지 못한 연고로 不覺의 마음이 일어나서 그 念(分別念)이 있으나 念이 自相이 없어서 本覺을 여의지 아니 하나니 마치 迷惑한 사람이 方位를 의지한 연고로 迷惑했으니 만약 方位를 여의면 곧 迷惑함이 없는 것과 같나니라. 衆生도 또한 그러해서 覺을 의지한 연고로 미혹 했으니 만약 覺性을 여의면 곧 不覺이 없으리라. 不覺의 妄想心이 있는 까닭으로 능히 名義만 알아서 眞覺이라 말하나니 만약 不覺의 마음만 여의면 곧 眞覺의 自相을 가히 說할 것이 없으리라.
다시 不覺을 依支한 연고로 세가지 상을 생하여 저 不覺으로 더불어 相應하여 여의지 않나니 어떠한 것이 셋인고? 첫째는 無明業相이니 不覺을 의지한 연고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설하여 이름을 業이라 함이니 覺 하면 곧 움직이지 아니하나 움직이면 곧 苦가 있으니 果가 因을 여의지 아니한 연고로니라. 둘째는 能見相이니 움직임을 依支한 연고로 능히 보나니 움직이지 아니하면 곧 봄이 없나니라. 세째는 境界相이니 能見을 의지하는 연고로 경계가 망녕되이 나타나나 見을 여의면 곧 境界가 없나니라. 境界緣이 있는 연고로 다시 여섯 가지 相이 생함이니 어떠한 것이 여섯인고? 첫째는 智相이니 境界를 의지해서 마음을 일으켜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분별하는 연고니라. 둘째는 相續相이니 智相을 의지하는 연고로 그 苦樂을 깨닫는 마음을 내어서 생각을 일으켜 서로 응하여 끊어지지 않는 연고니라. 세째는 執取相이니 相續을 의지하여 境界를 攀緣해 생각하여 苦樂에 머물러서 마음에 執着을 일으키는 연고니라. 넷째는 計名字相이니 망녕된 執相을 의지해서 거짓된 假名言相을 分別하는 연고니라. 다섯째는 起業相이니 名字를 의지해서 이름을 따라 취착하여 가지가지 업을 짓는 연고니라. 여섯째는 業繫苦相이니 業을 의지하여 果報를 받아서 自在하지 못한 연고니라. 마땅히 알라 無明이 능히 一切의 染法을 생하나니 일체의 染法이 다 이 不覺의 相인 연고니라.
다시 覺과 不覺이 두가지의 相이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同相이요,둘째는 異相이라. 同相이란 것은 비유하면 가지가지 질그릇이 다 한가지 가는 티끌의 性인 相과 같음이니 이와 같이 無漏와 無明의 가지가지 業幻이 다 한가지 眞如의 性인 相이니라. 이런 까닭으로 修多羅 가운데 이 뜻을 의지하여 說하시되 一切衆生이 본래 항상 머물러서 涅槃에 들어감과 菩提의 法이 가히 닦는 상이 아니며 가히 짓는 상도 아닌지라 畢竟에 얻을 것이 없다 하니라. 또한 色相을 가히 볼 수 없으나 色相을 봄이 있는 것은 오직 이 染을 따르는 幻의 지은 바요,이 智色 不空의 性은 아님이니,智相은 가히 볼 수 없는 까닭이니라. 異相이란 것은 가지가지 질그릇이 각각 같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無漏와 無明이 隨染幻의 差別이며 性染幻의 差別인 연고니라.
다시 이 生滅因緣이란 것은 이른바 衆生이 마음을 의지하여 意와 意識이 전하는 연고니라. 이 뜻이 어떠한고? 阿梨耶識을 의지하여 無明이 있음을 말했으니 不覺이 일어나서 능히 보고 능히 나투며 능히 境界를 취하여 생각을 일으켜 상속할새 그러므로 설하여 意라고 함이니라. 이 뜻에 다시 다섯가지 이름이 있으니 어떠한 것이 다섯인고? 첫째는 이름을 業識이라 함이니,이르되 무명의 힘으로 不覺心이 움직이는 까닭이니라. 둘째는 이름을 轉識이라 함이니,움직이는 마음에 依支하여 能見의 相이 되는 까닭이니라. 세째는 이름을 現識이라 함이니 이른바 능히 一切의 境界를 드러내나니 마치 明鏡이 色像을 나투는 것과 같아서 現識도 또한 그러하여 그 五塵을 따라서 상대되는 것이 이르면 곧 드러내서 앞과 뒤가 없으니 一切의 때에 따라 마음대로 일어나서 항상 앞에 있는 까닭이니라. 네째는 이름을 智識이라 함이니 이르되 染淨의 法을 分別하는 까닭이니라. 다섯째는 이름을 相續識이라 함이니 생각이 서로 응하여 끊어지지 않는 까닭이며, 過去無量한 세상의 善과惡의 業을 住持하여 하여금 잃지 않는 까닭이며,다시 능히 現在와 未來의 苦樂等 果報를 成熟시켜서 서로 어기지 않게 하는 까닭이니 능히 現在와 이미 겪은 일로 하여금 忽然 생각하게 하며 미래의 일을 不覺에 말령되이 생각하게 함이니라.이런 연고로 삼계가 虛僞한지라 오직 마음의 지은 바이니 마음을 여의면 곧 六塵의 경계가 없으리라. 이 뜻이 어떠한고? 일체의 법이 다 마음을 쫓아 일어났으니 妄念이 생한지라 일체의 분별이 곧 自心을 分別함이니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하여 모양을 얻을 수 없으니 마땅히 알라 세간의 일체 境界가 다 衆生의 無明妄心을 依支하여 머물러 가짐을 얻나니라. 이런 까닭으로 일체의 법이 거울가운데 형상과 같아서 體를 가히 얻을 수 없으며, 오직 마음이라 허망함이니 마음이 生하면 가지가지의 法이 生하고 마음이 滅하면 가지 가지의 法이 滅하는 연고니라.
다시 의식이라 말함은 곧 이 相續識이니 모든 凡夫가 取着함이 더욱 깊음을 의지하여 我와 我所를 計較하여 六塵을 分別할새 이름을 意識이라 함이요. 또한 이름을 分別識이라 하며 또 다시 이름을 分別事識이라 설함이니 이 識은 見愛(見惑과 愛惑)의 煩惱를 의지하여 增長하는 뜻인 연고니라. 無明熏習을 의지하여 일어난바 식이라는 것은 凡夫의 능히 알바가 아니며 또한 二乘의 智慧로 깨달을 바가 아니니 이르되 菩薩을 의지할진대 처음에 바로 믿음을 쫓아서 發心하여 觀察해서 만약 法身을 證得했을지라도 少分만 얻어 알 것이며 이에 보살의 究竟地에 이러르서도 능히 다 알지 못할 것이요 오직 부처님이라야 다 아나니라. 무슨 까닭인고?이 마음이 본래부터 自性이 淸淨함이로대 無明이 있는지라 無明의 染한 바가 되어 그 물들어진 마음이 있으니 비록 물든 마음이 있으마(本覺의 마음)항상해서 變하지 아니함이니 이런 까닭으로 이 뜻은 오직 부처님이라야 능히 알 수 있나니라. 이른바 心性이 항상 無念인 연고로 이름을 不變이라 함이요 一法界를 통달 하지 못한 까닭으로 마음이 서로 응하지 못하여 홀연히 생각이 일어난 것을 이름을 무명이라 함이니라.
染心이란 것이 여섯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여섯인고? 첫째는 執相應染이니 二乘의 解脫과 信相應地를 의지해서 멀리 여의는 연고요. 둘째는 不斷相應染이니 信相應地를 의지해서 方便을 修學하여 漸漸 능히 (相續識)버려서 淨心地를 얻어 究竟에 여의는 연고요. 셋째는 分別地相應染이니 具戒地를 의지하여 漸漸여의어서 이에 無相方便地에 이르러 구경에 여의는 연고요. 넷째는 現色不相應染이니 色自在地를 의지해서 능히 여의는 연고요. 다섯째는 能見心不相應染이니 心自在地를 의지해서 능히 여의는 연고요. 여섯째는 根本業不相應染이니 菩薩의 盡地를 의지해서 如來地에 들어 가서 능히 여의는 연고니라. 一法界를 了達하지 못한다는 뜻은 信相應地로부터 觀察하여 배워 끊이며 淨心地에 들어가서 분을 따라 여의며 이에 如來地에 이르러 能히 究竟에 여의는 연고니라. 相應이라 말하는 뜻은 이르되 心과 念法이 다르니 染과 淨의 差別을 의지하여 知相과 緣相이 같은 연고며 不相應이란 듯은 이르되 마음 그대로 不覺이라 항상 별다름이 없어서 知相과 緣相이 같지 아니한 연고니라. 또 染心의 뜻이란 것은 이름을 煩惱라 함이니 능히 眞如의 根本智를 장애하는 연고니라. 無明의 뜻이란 것은 이름을 智라 함이니 능히 세간의 自然業智를 障碍하는 연고니라. 이 뜻이 어떠한고? 染心을 依支하여 능히 보고 능히 나타나며 망녕되이 경계를 취하여 평등한 性을 어기는 까닭이며,一切法이 항상 고요해서 일어난 상이 없으나 無明不覺이 망녕되이 법으로 더불어 어기는 연고로 능히 세간의 一切境界를 隨順해서 가지 가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니라.
다시 生滅의 相을 分別한다는 것은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序니 마음으로 더불어 相應하는 연고요, 둘째는 細니 마음으로 더불어 相應하지 않는 연고니라. 또 序의 가운데 序는 凡夫의 境界요, 序의 가운데 細와 細의 가운데 序는 菩薩의 境界요, 細의 가운데 細는 부처님의 경계니라. 이 두가지 生滅이 無明熏習을 의지하여 있으니 이른바 因을 의지하고 緣을 의지함이니라. 因을 의지한다는 것은 不覺의 듯인 연고요, 緣을 의지한다고 한다는 것은 망녕되이 境界를 짓는다는 뜻인 연고니라. 만약 因이 滅하면 緣도 滅하나니 因이 멸한 연고로 서로 응하지 않는 마음이 멸함이요, 緣이 멸하는 연고로 서로 응하는 마음이 멸함이니라.
묻되 만약 마음이 滅한다면 어떻게 相續하며 만약 相續한다면 어떻게 究竟滅을 말하리요? 답하되 말한바 滅이란 것은 오직 心相이 멸할지언정 心體가 멸하는 것은 아님이니 마치 바람이 물을 의지하여 움직이는 相이 있으니 만약 물이 멸할진대 風相이 끊어져 의지할 바가 없을 것이어니와 물이 멸하지 아니할새 風相이 상속하나니 오직 바람이 멸하는 연고로 움직이는 모양이 따라서 멸할지언정 이 물이 멸하는 것은 아님이니라. 無明도 또한 그러해서 心體를 依支하여 움직이나니 만약 心體가 멸할 진대 衆生이 斷絶해서 의지할바가 없을 것이어니와 체가 멸하지 아니 할새 마음이 상속함을 얻나니 오직 어리석은 것만 멸하는 연고로 심상이 따라서 滅할지언정 心智는 멸하지 아니함이니라.
다시 네가지의 法이 熏習하는 뜻이 있는 연고로 染法과 淨法이 일어나 끊어지지 않나니 어떻한 것이 넷인고? 첫째는 淨法이니 이름이 眞如요, 둘째는 一切染因이니 이름이 無明이요, 셋째는 妄心이니 이름이 業識이요, 넷째는 妄境界니 이른바 六塵이니라. 熏習한다는 뜻은 마치 世間의 衣服이 실은 香氣가 없으나 만약 사람이 香으로써 熏習한 연고로 곧 香氣가 있는 것과 같이 이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眞如의 淨法은 實로 물들임 없으나 다만 無明으로써 熏習하는 연고로 곧 染相이 있음이요, 無明의 染法은 실로 淨業이 없으나 다만 眞如로써 훈습하는 연고로 곧 淨의 作用이 있나니라. 어떻게 熏習하여 染法을 일으켜 끊어지지 않는고? 이른바 眞如의 法을 의지하는 연고로 無明이 있음이요, 無明染法의 因이 있는 연고로 곧 眞如를 熏習함이요, 熏習하는 연고로 곧 妄心이 있음이요, 妄心이 있어서 곧 無明을 훈습하여 眞如의 法을 了達하지 못하는 연고로 不覺의 念이 일어나서 망녕된 경계를 나타냄이요, 망녕된 경계의 染法의 緣이 있는 연고로 곧 망녕된 마음을 熏習하여 그로 하여 금 念着하여 가지 가지의 業을 지어서 一切의 몸과 마음등 괴로움을 받게 하나니라.
이 망경계를 熏習하는 뜻이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增長念熏習이요,둘째는 增長取熏習이니라. 妄心을 熏習한다는 뜻이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業識根本熏習이니 능히 阿羅漢과 酸支弗과 一切菩薩로 생멸의 고를 받게 하는 연고요, 둘째는 增長分別事識熏習이니 능히 凡夫로 業에 얽매인 苦를 받게 하는 연고니라. 무명을 熏習하는 뜻이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根本熏習이니 능히 業識을 성취하는 뜻인 연고요, 둘째는 所起見愛熏習이니 능히 分別事識을 成就하는 뜻인 연고니라. 어떻게 熏習하여 淨法을 일으켜 끊어지지 않게 하는고? 이른바 진여의 법이 있는 연고로 능히 無明을 熏習함이요, 熏習한 因緣의 힘인 연고로 곧 妄心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를 싫어하고 즐거히 열반을 구하게 하나니 이 망령된 마음이 싫어하고 求하는 인연이 있는 연고로 곧 眞如를 熏習함이니라. 스스로 自己의 성품을 믿어서 마음이 망령되이 動하는지라 앞의 경계가 없는 줄 알아서 멀리 여의는 법을 닦나니 여실히 앞의 境界가 없는 줄 아는 연고로 가지가지 방편으로 隨順行을 일으켜서 취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내지 久遠의 熏習力인 연고로 無明이 멸하며 무명이 滅하는 연고로 마음이 일어남이 없음이요, 일어남이 없는 연고로 경계가 따라 멸함이요, 因緣이 함께 멸하는 연고로 心相이 다함일새 이름을 涅槃을 얻어 自然業을 이룸이라 함이니라. 妄心熏習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分別事識熏習이니 모든 凡夫와 二乘들이 生死의 苦를 싫어함을 의지하여 힘의 능한 바를 따라서 漸次로 無上道에 취향하는 연고요, 둘째는 意熏習이니 이르되 모든 보살이 發心勇猛하야 속히 열반에 나아가는 연고니라. 眞如熏習의 뜻이 두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自體相熏習이요, 둘째는 用熏習이니 自體相熏習이란 것은 비롯함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옴으로 無漏의 法을 갖추어 서 不思義業과 境界를 짓는 性을 갖추어 있나니 이 두가지 뜻이 항상 훈습함을 의지해서 힘이 있는 연고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를 싫어하고 즐거이 涅槃을 구하여 스스로 자기 몸에 진여의 법이 있는 줄 믿어서 發心하여 修行하게 함이니라.
묻되 만약 이와 같은 뜻일진대 일체중생이 다 眞如가 있어서 平等하게 다 熏習하거늘 어찌하여 信이 있고 信이 없으며,한량없이 前後에 差別하는고, 다 응당 일시에 스스로 진여의 법이 있음을 알아서 부지런히 方便을 닦아서 평등히 열반에 들게 하리요? 답하되 眞如는 본래 하나이나 無量無邊의 無明이 있어서 본래부터 自性이 차별해서 厚薄이 같지 아니한 연고로 恒河沙等上에 지나는 煩惱가 무명을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며,我見愛染의 번뇌가 무명을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나니 이와 같이 일체의 煩惱가 無明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바라, 前後의 한량 없는 차별을 오직 如來만이 능히 아는 연고라. 또 모든 부처님의 법이 因이 있고 緣이 있으니 因緣이 구족하여야 이에 판단함을 얻나니 마치 나무 가운데 火性이 이 불의 正因이나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여 方便을 가자하지 아니하면 능히 스스로 나무를 불 사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나니 중생도 또한 그러해서 비록 正因熏習의 힘은 있어나 만약 모든 불보살과 善知識등을 만나서 이로써 반연하지 아니하면 능히 스스로 번뇌를 끊어서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이 곧 옳은 곳이 없나니 만약 비록 外緣의 힘이 있으나 안으로 정법이 아직 熏習의 힘이 있지 아니한자면 또한 능히 究竟에 生死의 고를 싫어하여 즐거이 열반을 구하지 못함이니라. 만약 인연이 具足한 者는 이른바 스스로 熏習의 힘이 있고 또 모든 佛菩薩들의 慈悲願護함이 되는 연고로 능히 고를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켜 열반이 있는 것을 믿어서 善根을 修習함이니 善根을 닦아서 成熟한 연고로 곧 모든 佛菩薩의 교를 보여 利喜케 함을 만나서 이에 능히 進趣하여 涅槃의 도에 向하게 함이니라. 用熏習이란 것은 곧 이 衆生의 外緣의 힘이니 이와 같이 外緣이 限量없는 뜻이 있으나 간략히 두 가지로 설하리라.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差別緣이요,둘째는 平等緣이니 差別緣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이 모든 佛菩薩 등을 의지하여 처음에 뜻을 발하여 비로서 도를 구할 때로부터 이에 佛에 이르기까지 저 가운데 만약 보거나 생각하면 혹은 眷屬과 父母와 모든 親戚도 되며, 혹은 給使도 되며 혹은 知友도 되며,혹은 寃家도 되며, 혹은 四攝法을 일으켜서 이에 일체의 짓는 바 무량한 行緣에 이르기까지 大悲熏習의 힘을 일으켜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善根을 增長하여 저 보고 들음에 이익을 얻게 하는 연고니라.
이 緣이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두 가지 인고? 첫째는 近緣이니 속히 제도를 얻게하는 연고요. 둘째는 遠緣이니 久遠劫에 제도를 얻게 하는 연고니라. 이 近과 遠의 二緣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어더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增長行緣이요, 둘째는 受道緣이니라. 平等緣이란 것은 일체의 모든 佛菩薩이 다 일체의 중생을 도탈하기를 원하사 自然 熏習하여 항상 버리지 아니 해서 同體의 智力을 쓰는 연고로 보고 들음을 따라 응해서 作業을 나타내나니 이른바 중생이 三昧를 의지하여야 이에 평등하게 모든 부처님을 親見함을 얻는 연고니라. 이 體用의 熏習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未相應이니 이르되 凡夫二乘과 처음 뜻을 발한 보살들이 意와 意識으로 熏習해서 信力을 의지한 연고로 능히 修行하나 분별이 없는 마음이 體로 더불어 서로 응함을 얻지 못한 연고며,自在業으로 수행하여 用으로 더불어 서로 응함을 얻지 못한 연고요, 둘째는 己相應이니 이르되 法身菩薩이 분별 없는 마음이 모든 부처님의 智用으로 더불어 서로 응함을 얻음이니 오직 法力을 의지하여 자연히 수행하여 眞如를 熏習해서 무명을 滅하는 연고니라. 다시 染法이 비롯함이 없음으로부터 옴으로 熏習하여 끊어지지 않다가 이에 부처를 얻은 뒤에야 곧 끊어짐이 있음이요, 淨法熏習은 끊어짐이 없어서 미래를 다함이니 이 뜻이 어떠한고? 眞如法이 항상 熏習하는 연고로 망녕된 마음은 곧 滅하고 法身이 나타나 用熏習을 일으킴일새 그러므로 끊어짐이 없나니라.
다시 眞如自體相이란 것은 일체의 凡夫,聲聞,緣覺,菩薩 모든 부처님이 더하고 덜함이 없어서 前際에 生한 것도 아니며 後際에 滅하는 것도 아님이니 畢竟에 항상 해서 본래로부터 옴으로 自性에 일체의 功德이 滿足하니 이른바 自體에 大智慧光明의 듯이 있는 연고며, 法界에 두루 비추는 뜻인 연고며,진실로 아는 뜻인 연고며, 自性淸淨心의 듯인 연고며,常樂我正의 뜻인 연고며, 淸凉하고 不變하는 自在의 뜻인 연고니, 이와 같이 恒河沙에 지나는 여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不思義佛法을 具足하여 이에 만족함에 이르러 조금도 모자라는 바의 뜻이 없는 연고로 이름을 如來藏이라 하며 또한 이름을 如來法身이라 함이니라.
묻되 위에서 설하되 眞如는 그 體가 평등하여 일체의 相을 여의었다고 하고 어찌하여 다시 體에 이와 같은 가지가지의 공덕이 있다고 설하는고? 답하되 비록 진실로 이 모든 공덕의 뜻이 있으나 差別의 상이 없어서 一味가 等同하여 오직 하나인 진여 뿐이니 이 뜻이 어떠 한고? 分別이 없으며 分別의 상을 여의었나니 이런 연고로 둘이 없나니라. 다시 무슨 뜻으로 차별을 설하는고?業識의 生滅相을 의지하여 보임이니라. 이것을 어떻게 보였는고? 일체의 법이 본래 오직 마음 뿐이라 실로 념이 없으나 망심이 있어서 불각의 념을 일으켜서 모든 境界를 봄일새 그러므로 설하여 무명이라 함이니 心性이 일어나지 아니 하면 곧 이것이 大智慧光明의 뜻인 연고니 만약 마음이 見을 일으키면 곧 不見의 相이 있거니와 心性이 見을 여의면 곧 이것이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인 연고니라. 만약 마음이 움직임이 있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며 自性이 없어서 常도 아니요, 樂도 아니며, 我도 아니요, 淨도 아님이니 熱惱하고 衰變하면 곧 자재하지 못하며,내지 恒河沙에 지나는 等 망념의 뜻을 갖추어 있으니 이 뜻을 對한 연고로 心性이 움직임이 없으면 곧 恒河沙에 지나는 등 모든 淨功德相의 뜻을 示現함이 있나니라. 만약 마음이 일어 남이 있어서 다시 前法을 가히 생각할 것을 보는 자는 곧 모자라는 바가 있거니와 이와 같이 淨法의 무량한 공덕이 곧 이 일심이라 다시 생각할 바가 없음일새 이런 연고로 만족함이니 이름을 法身如來의 장이라 함이니라. 다시 진여의 用이라는 것은 이른바 모든 부처님이 본래 因地에 있어서 큰 慈悲를 발하여 모든 波羅蜜을 닦아서 중생을 攝化하며, 큰 서원을 세워 다 평등히 중생계를 度脫코져 하며, 또한 劫數를 한정하지 아니해서 미래를 다하며,일체중생을 취하지 아니함이니 이것이 무슨 뜻인고? 이르되 여실히 일체의 중생과 다만 自己의 몸이 如實平等하여 별 다름이 없는 줄 아는 연고니라.이와 같은 큰 方便의 智慧가 있어 無明을 除滅하고 本法身을 보아서 自然히 不思議한 業의 가지 가지의 用이 있는지라 곧 진여로 더불어 평등해서 일체처에 두루하며, 또한 用相을 가히 얻을 수 없음이니 무슨 까닭인고? 이르되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이 法身智相의 몸이라 第一義諦에는 世俗境界가 없어서 施作을 여의었건만 다만 중생의 보고 듣는 것을 따라 利益을 얻게 할새 그러므로 설하여 用이라고 함이니라. 이 用이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分別事識을 의지한 凡夫와 二乘의 마음에 보는 바를 이름을 應身이라 함이니 轉識의 나타남인 줄을 알지 못하는 연고로 밖으로 쫑아 옴을 보아서 色의 分齊(즉 色相의 限界)를 취하나니 능히 다 알지 못하는 까닭이요. 둘째는 業識을 의지함이니 이르되 모든 보살이 처음 뜻을 발함으로부터 이에 菩薩의 究竟地에 이르기 까지 마음에 보는 바를 이름을 報身이라 함이니라. 몸에 한량 없는 빛깔이 있으며 빛깔에 한량 없는 모양이 있으며 모양에 한량 없는 좋은 것이 있으니 머무르는 바의 依果(즉 依報器世界)에도 또한 한량 없는 가지 가지의 莊嚴이 있어서 곳을 따라 示現해서 곧 갓이 없으며, 가히 다할 수 없어서 分齊의 相을 여의었으며,그 應할 바를 따라서 항상 능히 머물러 가져서 헐지도 아니하고 잃지도 아니함이니 이와 같은 공덕이 다 모든 波羅蜜等 샘이 없는 行熏과 및 不思議한 熏習을 因하여 成就한바라 한량 없는 樂相이 具足할새 그러므로 설하여 報身이라 함이니라. 또 凡夫의 보는 바는 이것은 그 序色이니 六道衆生이 各各 보는 것이 같지 아니 하여 가지가지의 다른 무리가 樂相을 받지 못함을 따를새 설하여 應身이라 함이니라.
다시 처음에 뜻을 발한 보살들이 보는 바는 깊이 진여의 법을 믿는 연고로 少分을 보는지라 저 色相莊嚴等의 일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어서 分齊를 여의었나니 오직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나서 진여를 여의지 아니한 줄 아나니라. 그러나 이 보살이 오히려 스스로 분별하는 것은 아직 法身의 位에 들지 못한 까닭이니 만약 淨心을 얻으면 보는 바가 微妙하여 그 用이 더욱 수승할 것이요.이에 菩薩地盡에 이르면 보는 것이 究竟일 것이며, 만약 업식을 여의면 곧 보는 相이 없을 것이니 모든 부처님의 法身은 彼此의 색상으로부터 서로 볼 수 없는 연고니라.
묻되 만약 모든 부처님의 法身이 色相을 여의었다면 어찌하여 능히 색상을 나투는고? 답하되 곧 이 법신이 이 色相의 體인 연고로 능히 色을 나타내나니 이른바 본래부터 옴으로 빛깔과 마음이 둘이 아닌 것이니 色性이 곧 智인 연고로 色의 體가 형상이 없으니 이름을 智身이라 설함이요, 智性이 곧 색인 연고로 이름을 法身이 一切處에 두루한 것이라 설함이니라. 나타난 바의 색이 分齊가 있지 아니한지라 마음을 따라서 능히 十方世界의 한량 없는 菩薩과 한량 없는 報身과 한량 없는 莊嚴을 示現하니 各各差別해서 다 분제가 없으나 서로 妨害하지 않는지라 이것은 심식의 분별로 능히 알지 못할지니 진여의 자재한 用의 듯인 까닭이니라.
다시 生滅門으로 쫑아 곧 眞如門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五陰을 미루어 구하면 色과 마음이며 六塵의 경계는 畢竟에 念이 없는 것이니 마음은 形相이 없는 지라 十方에 구할지라도 마침내 가히 얻을 수 없음이니 마치 사람이 迷한 고로 東을 일러 西라 하나 方位는 실로 轉하지 않는 것과 같이 중생도 또한 그러해서 無明의 迷인 연고로 마음을 일러 念이라 하나 마음은 實로 움직이지 않나니라. 만약 능히 觀察해서 마음이 無念인줄 알면 곧 隨順하여 眞如門에 들어 감을 얻는 연고니라. 邪執을 對治한다는 것은 일체의 邪執이 다 我見을 의지했으니 만약 我를 여의면 곧 邪執이 없어짐이니라.
이 我見이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人我見이요, 둘째는 法我見이니라.
人我見이라 함은 모든 凡夫를 의지해서 다섯 가지가 있음을 설했으니 어떤 것이 다섯인고? 첫째는 修多羅에 설하사대 여래의 法身이 畢竟에 寂寞하여 마치 虛空과 같다고 함을 듣고 執着함을 破하기 위한 것인줄을 알지 못하는 연고로 곧 이르되 허공이 如來의 性이라 하나니라.어떻게 對治하는고? 허공의 상은 이것이 그 망령된 법이라, 體에는 실답지 못함이 없음을 밝혔으니 色을 對하는 고로 있는 지라 이것이 가히 볼 相이며 마음으로 하여금 生滅케 하나니 일체의 法이 본래 이 마음이라 실로 外色이 없음이니 만약 색이 없으면 곧 虛空의 相이 없나니라. 이른바 일체의 경계가 오직 마음이 망녕되이 일어난 연고로 있음이니 만약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임을 여의면 곧 일체의 경계가 滅할 것이요.오직 하나인 眞心이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나니 이것은 니르되 如來의 넓고 큰 性智究竟의 뜻이라 허공의 相과는 같지 않는 연고니라. 둘째는 修多羅에 설하사대 세간의 모든 법이 필경에 체가 공하며 乃至 涅槃 眞如의 법이라도 도한 畢竟에 空하여 본래 스스로 공한지라 일체의 상을 여의었다 함을 듣고 執着함을 파하기 위한 것인 줄을 일지 못하는 연고로 곧 이르되 眞如涅槃의 性도 오직 이 공한 것이라 하나니 어떻게 對治할 것인고? 진여법신은 自體가 공하지 아니하여 한량 없는 性功德이 구족한 것을 밝힌 연고니라. 세째는 修多羅에 說하사대 여래의 藏이 增減이 없어서 체에 일체공덕의 법을 갖추었다는 말을 듣고 알지 못하는 까닭으로 곧 이르되 여래의 藏이 色心法이 있엇서 自相이 차별한다 하나니 어떻게 對治할 것인고? 오직 眞如의 듯을 의지하여 설한 연공요, 生滅染의 듯을 인하여 示現으로 차별을 설한 연고니라. 넷째는 修多羅에 설하사대 일체세간의 生死染法이 다 如來藏을 의지하여 있는지라, 일체의 모든 법이 진여를 여의지 아니 했다 함을 듣고 알지 못하는 연고로 이르되 如來藏의 자체에 一切世間의 生死等法이 갖추어 있다 하나니 어데게 對治할 것인고? 如來藏이 본래부터 오직 恒河沙에 지나는 等 모든 性功德이 있어 여의지도 아니하고 끊어지지도 아니 해서 眞如의 뜻과 다르지 아니한 연고니라. 恒河沙에 지나는 等 煩惱의 染法은 오직 이 망으로 있는 지라 성품이 스스로 본래 없어서 비롯 없는 세상으로부터 옴으로 일찍 如來藏으로 더불어 서로 응하지 못한 연고니 만약 如來藏이 體에 妄法이 있을 진대 하여금 證得理會함에 길이 망을 쉰다는 것이 옳은 곳이 없나니라. 다섯째는 修多羅에 설하사대 如來藏을 의지하는 연고로 생사가 있으며 如來藏을 의지하는 연고로 涅槃을 얻는다 함을 듣고 理解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이르되 중생이 비롯함이 있다 하며, 비롯함을 보는 까닭으로 다시 이르되 여래의 얻은 바 열반도 그 終盡이 있어 도리어 중생을 짓는다 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고? 여래의 장이 前際가 없는 연고로 無明의 相도 또한 비롯함이 없으니 만약 三界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으로 일어남이 있다고 말하면 곧 이것은 外道經의 설이니라. 또 如來藏이 後際가 없으니 모든 부처님의 얻은 바 涅槃도 이로 더불어 서로 응해서 곧 後際가 없는 연고니라.
法我見이라 함은 二乘의 鈍根을 의지하는 연고로 如來가 다만 爲하여 人無我만 설했으나 설한 것이 究竟이 아닌지라 五陰生滅의 법이 있는 것을 보아서 생사를 두려워 하고 망년 되이 열반을 취하나니 어떻게 對治할 것인고? 五陰의 법은 자성이 생하지 아니하여 곧 滅함이 없으니 本來 涅槃인 까닭이니라. 다시 究竟에 망녕된 집착을 여읜다는 것은 마땅히 알라 染法과 淨法이 다 相待하는지라,자체의 상을 가히 말할 수 없음이니 이런 까닭으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色도 아니요, 心도 아니며, 智도 아니요, 識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지라, 畢竟에 可히 相을 설할 수 없건만 言說이 있는 것은 마땅히 알라 如來가 善巧한 방편으로 언설을 假藉해서 중생을 引導하시니 그 旨趣는 다 念을 여의고 眞如에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니 일체의 法을 생각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生滅케 해서 實智에 들지 못하게 하는 까닭이니라. 分別發趣道相이라 함은 이르되 일체 모든 부처님의 證得한바 道에 일체의 菩薩이 發心修行하여 趣向하는 듯인 연고니라.
간략히 말하면 發心에 세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셋인고? 첫째는 믿음을 성취한 發心이요, 둘째는 알고 행하는 發心이요, 셋째는 證得한 發心이니라. 信成就發心이라 함은 어떠한 사람을 의지하며 어떠한 행을 닦아야 信成就함을 얻어 감히 능히 발심할 것인고? 이른바 不定聚의 중생이 善根을 熏習한 힘이 있는 연고로 業果報를 믿어 능히 十善을 일으키며 생사의 고를 싫어하고 無上菩提를 구하고저 하여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親히 받들어 供養하고 信心을 닦아 행하되 一萬劫을 지나서 信心을 成就한는 연고로 모든 佛菩薩이 가르쳐서 하여금 發心케 하며 或은 大悲를 쓰는 연고로 능히 스스로 발심하며 혹은 正法이 멸하고자 함을 인해서 法을 保護하는 因緣을 쓰는 연고로 능히 스스로 發心하나니 이와 같이 信心을 成就하여 發心함을 얻는 자는 正定聚에 들어가서 필경에 물러가지 아니하나니 이름이 如來種 가운데에 머물러서 正因과 서로 應함이니라. 만약 어떤 중생이 善根이 微少하여 久遠以來에 煩惱가 深厚함으로 비록 부처님을 만나 또한 供養을 올리나 그러나 人天種子만을 일으키며 혹은 二乘의 種子만을 일으키나니 설사 大乘을 구하는 者가 있더라도 根機가 일정하지 아니한지라 혹은 前進하고 혹은 後退하며 혹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이 있으되 一萬劫을 지나지 아니해서 도중에 佛緣을 만나 또한 發心함이 있나니 이른바 부처님의 色相을 보고 그 마음을 發하며 혹은 여러 스님께 供養함을 因해서 그 마음을 發하며 혹은 二乘人의 가르침을 인하여 발심하며 혹은 다른 이에게 배워서 發心하나니 이와 같은 等의 發心은 다 一定하지 아니 해서 만약 惡因緣을 만나면 혹은 문득 물러가서 二乘의 자리에 떨어짐이니라.
다시 믿음을 성취하여 마음을 발한다는 것은 어떠한 마음을 發한다는 것인고? 간략히 세가지로 설함이니 어떤 것을 셋이라 하는고? 첫째는 곧은 마음이니 올바른 眞如의 法을 생각하는 연고요. 둘째는 깊은 마음이니 즐거이 일체의 모든 善行을 모우는 연고요. 셋째는 大悲心이니 一切衆生의 괴로움을 빼어 주고자 하는 연고니라.
묻되 위에서 설하기를 法界가 一相이요,佛體가 둘이 없다 하였거늘 무슨 까닭으로 오직 眞如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시 모든 善行을 구하고 배움을 假藉하는고? 답하되 譬喩하면 큰 摩尼寶가 體性이 밝고 조촐하나 鑛穢의 때가 있으니 만약 사람이 비록 보배의 性을 생각하나 方便으로써 가지 가지로 갈고 다스리지 아니하면 마침내 淸淨함을 얻을 수 없는 거와 같나니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의 법도 體性이 空淨하나 한량 없는 煩惱의 때에 물듦이 있으니 만약 사람이 비록 진여를 생각하나 方便으로써 가지 가지로 熏修하지 않으면 또한 청정함을 얻지 못하나니 때가 限量이 없어서 일체의 법에 두루한 까닭으로 일체의 善行을 닦아서 對治함이니 만약 사람이 일체의 선법을 닦아 行하면 自然히 진여의 법에 歸順하는 연고니라.
간략히 말하면 方便에 네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넷이라 하는고? 첫째는 行根本方便이니 이르되 일체의 법이 自性이 無生인 것을 觀해서 妄見을 여의어 생사에 머물지 아니 하며,일체의 법이 因緣으로 화합하여 業果를 잃지 않음을 觀해서 대비를 일으켜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攝化해서 涅槃에 머물지 아니함이니 法性의 머무럼이 없음을 隨順한는 까닭이니라. 둘째는 능히 그치는 방편이니 이르되 부끄럽게 여기고 허물을 뉘우쳐 능히 일체의 惡法을 그쳐서 하여금 더 자라지 않게 함이니 法性의 모든 허물 여읜 것을 隨順하는 까닭이니라. 셋째는 선근을 發起해서 增長한는 方便이니 이르되 부지런히 三寶에게 供養하고 禮拜하며,讚歎하고 따라 기뻐하며,모든 부처님께 勸請하나니 三寶를 愛敬하는 淳厚한 마음인 까닭으로 믿음이 增長하여 이에 능히 뜻으로 無上의 道를 구하며, 또 佛法僧의 힘에 慰護한 바를 因한 연고로 능히 業障을 消滅하여 善根을 退하지 아니함이니 法性의 痴障을 여읜 것을 隨順하는 까닭이니라. 넷째는 大願이 平等한 方便이니 이른바 願을 發하여 未來가 다하도록 一切衆生을 敎化濟度해서 하여금 남음이 없게 하며,다 하여금 남음이 없는 열반에 구경케 함이니 法性이 끊임 없음을 수순하는 까닭이요,法性이 광대하여 일체에 두루해서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피차를 염하지 아니 해서 구경에 적멸한 까닭이니라. 보살이 이 마음을 발한 까닭으로 곧 少分으로 法身봄을 얻음이니 법신을 보는 연고로 그 願力을 따라서 능히 여덟가지를 나투어서 衆生을 利益케 하나니 이른바 兜率天으로부터 퇴하여 태에 들어가 胎에 머물다가 胎에서 나와 出家하여 도를 이루어서 法輪을 굴리시고 涅槃에 드신 것이시니라.그러나 이 보살을 아직 법신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은 그 과거 무량한 세상으로부터 옴으로 有漏의 업을 능히 결단하지 못한지라 그 나는 바를 따라서 적은 괴로움으로 더불어 서로 응하나 또한 업에 얽메이는 것이 아님이니 큰 願力의 自在로운 힘이 있는 까닭이니라. 저 修多羅 가운데 혹은 惡趣에 떨어짐이 있다고 설한 것은 그 실로 퇴함이 아닌지라 다만 초학의 보살이 아직 正位에 들지 못하여 懈怠한 者를 위해서 두려웁게 하여 저로 하여금 勇猛케 하는 까닭이니라. 또 이 보살이 한번 발심한 뒤에는 怯弱을 멀리 여의어 필경에 二乘地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만약 無量無邊한 阿僧祗劫에 어려운 행을 부지런히 하여 이에 涅槃을 얻는다 함을 들을지라도 또한 怯弱치 않나니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옴으로 스스로 涅槃인 줄 믿어 아는 가닭이니라. 알고 행하는 發心이라 함은 마땅히 알라 轉勝이니 이 보살이 처음 正信으로부터 오면서 第一阿僧祗劫이 장차 만족코져 하는 연고로 眞如의 法中에서 깊이 아는 것이 앞에 나타나 닦는 바가 相을 여읜 것이니 法性의 체에는 俟貪이 없음을 아는 연고로 隨順하여 檀波羅蜜을 수행하며, 法性에는 물듦이 없어서 五欲의 허물 여읨을 아는 연고로 수순하여 尸波羅蜜을 수행하며, 法性에는 괴로움이 없어서 瞋惱여읨을 아는 연고로 수순하여 提波羅蜜을 수행하며, 法性에는 몸과 마음의 相이 없어서 懈怠여읨을 아는 연고로 隨順하여 毘梨耶波羅蜜을 修行하며, 法性에는 恒常 定하여 體에 어지러움이 없음을 아는 연고로 수순하여 禪波羅蜜을 수행하며, 법성에는 體가 밝아서 無明을 여읨을 아는 연고로 수순하여 般若波羅蜜을 修行함이니라. 證發心이라 함은 淨心地로 쫑아 이에 보살의 구경지에 이르도록 무슨 경계를 증득함인고? 이른바 진여인 것이니 轉識을 의지 해서 설하여 경계라고 했으나 이를 증득한 이는 경계가 없음이요,오직 진여지 뿐이니 이름을 法身이라 함이니라. 이 菩薩이 一念頃에 능히 十方無餘세계에 이르러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法輪을 전하시기를 청하나니 오직 중생을 개도하여 이익케 하기 위함이언정 문자를 의지하지 아니 했으며,혹은 十地에 뛰어나 속히 正覺 이룸을 보인 것이니 怯弱한 중생을 위한 연고요. 혹은 내가 무량한 阿僧祗劫에 마땅히 불도를 이루리라 설하여 懈慢한 중생을 위한 연고니라. 능히 이와 같이 무수한 방편을 보인 것이 가히 思量하고 論議할 수 없으나 실로 보살은 種性과 근이 같으며,發心이 같으며,증득한 바가 또한 같아서 초과하는 법이 없으니 일체보살이 다 三阿僧祗劫을 지나는 연고니라.다만 중생의 세계가 같지 아니함과 보는 바와 듣는 바의 根과 欲과 性이 다름을 따랐을새 그러므로 행한 바가 또한 差別이 있음을 보였나니라. 또 이보살의 발심한 상이 세가지 마음의 微細한 相이 있으니 어떠한 것을 셋이 라 하는고? 첫째는 眞心이니 분별이 없는 까닭이요.둘째는 方便心이니 自然히 두루 행하여 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까닭이요.셋째는 業識心이니 미세하게 起滅하는 까닭이니라. 또 이 보살이 功德이 成滿하여 色究竟處에 일체세간의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이나니 이르되 한 생각이 응한 지혜로써 무명이 문득 다한 것이 이름이 一切種智이니 자연히 不思議한 업이 있어 능히 시방에 나타나서 중생을 이익하게 하나니라.
묻되 허공이 갓이 없는 연고로 세계가 갓이 없음이요. 세계가 갓이 없는 연고로 중생이 갓이 없음이요.중생이 갓이 없는 연고로 心行의 차별도 또한 다시 갓이 없으니 이와 같은 경계는 가히 分齊할 수 없는지라 알기가 어려우나 만약 무명을 끊으면 心想이 있을 수 없거니 어떻게 능히 알관대 이름을 일체의 種智라 하는고? 답하되 一切境界가 본래 한 마음인지라 想念을 여의었건마는 중생들이 망녕되이 경계를 보는 연고로 마음에 分齊가 있음이요 망녕되이 想念을 일으켜서 법성에 稱合하지 못하는 연고로 능히 알지 못하거니와 모든 부처님은 見相을 여의어서 두루하지 아니한 바가 없으시니 마음이 진실한 까닭이며,곧 이것이 모든 법의 自性이니라 自體가 일체의 妄法을 드러내 비추어 大智用이 있어서 무량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이 응하여 아는 바를 따라서 다 능히 가지 가지의 법의를 열어보이나니 이런 연고로 이름을 一切種智라 함이니라.
또 묻되 만약 모든 부처님이 자연의 업이 있어서 능히 일체처에 나타나 중생을 이익케 할 진대 일체 중생이 혹 그 몸을 보거나 혹 神變을 보거나 혹 그 말씀을 들으면 利益을 얻지 못함이 없을 것이어는 어찌하여 세간에는 능히 보지 못함이 많은고? 답하되 모든 부처님은 법신이 평등하사 일체처에 두루하사대 뜻을 지음이 없는 연고로 자연이라 말하나 다만 중생의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나나니 중생의 마음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거울에 만약 때가 있으면 色相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음이니 이와 같아서 중생도 마음에 만약 때가 있으면 法身이 나타나지 않는 연고니라.
이미 解釋分을 說하고 다음에 修行信心分을 說하리라.
이 가운데 正定聚에 들지 못한 衆生을 의지 하는 연고로 修行信心을 說함이니라. 어떤 것이 信心이며,어떤 것이 修行인고? 간략히 說하면 信心에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넷이라 하는고?첫째는 根本을 믿음이니 이른바 즐거이 眞如의 法을 생각하는 까닭이요, 둘째는 부처님에게 無量한 功德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親近해서 供養하고 恭敬하기를 생각하며, 善根을 일으켜서 一切智 求하기를 願하는 까닭이요, 셋째는 法에 큰 利益이 있는 것을 믿음이니 항상 모든 波羅蜜修行하기를 생각하는 까닭이요, 넷째는 僧이 能히 올바로 修行하여 自利利他함을 믿음이니 항상 즐거이 모든 菩薩衆을 親近해서 如實한 行을배우기를 求하는 까닭이니라.
修行에 다섯가지 門이 있어서 能히 이 信을 이룸이니 어떤 것이 다섯인고? 첫째는 布施門이요, 둘째는 持戒門이요, 셋째는 忍辱門이요, 넷째는 精進門이요, 다섯째는 止觀門이니라.
어떻게 布施門을 修行하는고?만약 一切衆生이 와서 求하여 찾는 者를 보면 所有한 財物을 힘을 따라서 베풀어 주어 자기의 俟貪을 버리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기쁘게 하며, 만약 厄難과 恐怖와 위험스러운 逼迫을 보면 자기의 堪任할 바를 따라 無畏를 베풀어 주며, 만약 어떤 중생이 와서 법을 구하면 자기의 능히 아는 바를 따라 방편으로 설하되 응당 名利와 恭敬을 탐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리와 이타만을 생각하여 菩提에 回向하는 연고니라.
어떻게 게문을 수행하는고? 이른바 살생도 아니하고, 도둑질도 아니하고, 음행도 아니하며, 양설도 아니하고, 나쁜말도 아니하고, 거짓말도 아니하고, 꾸미는 말도 아니하며, 貪心, 嫉妬, 詐欺, 阿諂, 瞋喪, 邪見을 멀리 여읨이니라 만약 出家한 자일진댄 번뇌를 折伏하기 위한 연고로 또한 응당 시끄러운 곳을 멀리 여의고 항상 고요한 데 머물러 慾心이 없고 만족할 줄 아는 頭陀等의 행을 修習하며, 내지 적은 허물이라도 마음에 두려움을 내어서 부끄러워 하여 뉘우쳐 고치고 如來께서 制定하신바 禁戒를 가벼히 여기지 아니하며, 마땅히 譏弄과 嫌疑를 막아 두호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망녕되이 죄과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연고니라.
어떻게 인문을 修行하는고? 이른바 다른 사람이 괴롭게 함을 응당히 참아서 마음에 보갚음을 품지 아니하며, 또한 마땅히 이롭게 하거나, 헤롭게 하거나, 훼방 하거나, 기리거나, 칭찬하거나, 희롱하거나, 괴롭게 하거나, 즐겁게 하는 등 법을 참는 연고니라.
어떻게 進門을 수행하는고? 이른바 모든 착한 일에 마음이 게으르지 아니해서 立志가 堅强하여 怯弱함을 멀리 여의며 마땅히 과거 久遠으로부터 이미 옴으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으로 큰 괴로움을 받아 이익이 없음을 생각할새 이런 연고로 응당히 모든 功德을 부지런히 닦아서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여 속히 여러 가지 괴로움을 여읨이니라.
다시 어떤 사람이 비록 信心을 修行하나 先世로부터 옴으로 허다한 무거운 罪惡과 業障이 있는 까닭으로 邪魔와 모든 鬼神의 惱亂한 바가 되며, 혹은 세간의 사무에 가지 가지로 얽매이게 되며,혹은 病苦에 시달리는 바가 되어 이와 같은 등 많은 障碍가 있을새 이런 까닭으로 응당히 勇猛精勤하되 밤낮으로 六時에 모든 부처님께 禮拜해서 誠心으로 懺悔하며, 勸請하고 따라 기뻐해서 菩提에 回向하되 항상 쉬지 아니해서 모든 障碍를 면하여 善根이 增長함을 얻는 연고니라.
어떻게 止觀門을 修行하는고? 말한바 止라 것은 이르되 一切의 境界相을 그치는 것이니 奢摩他觀의 義를 隨順하는 연고요. 말한바 觀이라는 것은 이르되 因緣生滅相을 分別하는 것이니 毘鉢舍那觀의 의를 수순하는 연고니라. 어떻게 수순하는고? 이 두가지 뜻으로써 漸漸 수습하여 서로 버리지 아니 하면 止와 觀이 雙으로 앞에 나타나는 연고니라. 만약 止를 닦는 자일진대 고요한 곳에 머물러 端正히 앉아서 뜻을 바로 하고 氣息을 의지하지 아니하며,形色에 의지하지 아니 하며,空에도 의지하지 아니하며, 地, 水, 火, 風에도 의지하지 아니 하며,내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느 것에 의지하지 아니해서 일체의 모든 생각을 念을 따라 다 除함이요, 또한 除하였다는 생각까지도 보냄이니 일체의 법이 본래 생각이 없는지라 생각 생각이 생하지도 아니 하며 생각 생각이 滅하지도 않나니라. 또한 마음이 밖으로 경계 생각함을 따른 뒤에 마음으로써 마음을 除한다고 말지니 마음이 만약 산란하거던 곧 마땅히 거두어 들여 바른 생각에 머물지니라.이 바른 생각이란 것은 마땅히 알라 오직 마음 뿐이요. 바깥 경계가 없음이니 곧 다시 이 마음이 또한 자체의 모양이 없어서 생각 생각에 가히 얻지 못할지니라. 만약 앉고 일어남을 쫓아가고, 오고, 나아가고, 그침과 시작하는 바가 있는 일체의 때에 항상 方便을 생각하여 수순하고 관찰해서 오래 익혀 순숙하면 그 마음이 머물음을 얻으리니 마음이 머물은 까닭으로 점점 맹리하여 수순하여 眞如三昧에 들어감을 얻어서 깊이 번뇌가 調伏되고 신심이 증장해서 속히 不退함을 이룸이니라. 오직 疑惑과 不信과 誹謗과 중죄업장과 我慢과 懈怠를 제함이니 이와 같은 등 사람은 능히 들어가지 못할 바니라.
다시 이 三昧를 의지하는 까닭으로 곧 法界가 一相인줄 앎이니 이르되 일체 모든 부처님의 法身이 중생의 몸으로 더불어 平等하여 둘이 없음이니 곧 이름이 一行三昧니라. 마땅히 알라 眞如는 이 三昧의 根本이니 만약 사람이 수행하면 점점 능히 무량한 三昧을 생하리니 혹 어떤 중생이 善根의 힘이 없으면 곧 모든 魔軍과 外道와 귀신의 惑亂하는 바가 되리니 혹 앉아 있는 가운데 形態를 나타내 두려웁게 하거나 혹은 端正한 남녀들의 모양을 나타내거던 마땅히 오직 마음인줄 念하면 경계가 곧 멸해서 마침내 괴롭히지 못하리라. 혹은 天像과 보살승을 나투며,도한 如來像을 지어 相好가 具足하며, 혹은 다라니를 설하며, 혹은 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를 설하며, 혹은 평등하고 공해서 모양도 없고, 願도 없고, 怨도 없고, 親함도 없고, 因도 없고, 果도 없어서 畢竟에 空寂한 것이 이것이 참다운 열반이라 설하며, 혹은 사람으로 하여금 宿命過去의 일을 알게 하며, 또한 미래의 일을 알게 해서 他心智를 얻어 辯才가 거리낌이 없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世間名利의 일을 貪着케 하며, 또 사람으로 하여금 자주성을 내고 자주 기뻐해서 性品이 항상 되고 準함이 없게 하며 혹은 慈愛가 많게 하며, 졸음도 많고 疾病도 많아서 그 마음을 懈怠하게 하며,혹은 마침내 정진할 생각을 일으켰다가 뒤에 문득 休廢하고 믿지 않는 마음을 내어서 疑心이 많고 생각이 많게하며, 혹은 본래 수승한 행을 버리고 다시 잡된 업을 닦게 하며, 혹은 世事에 집착해서 가지 가지로 얽메이게 하며, 또한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삼매를 얻어 少分이라도 서로 비슷하게 하나니 다 이것은 외도의 얻은 바라 참다운 三昧가 아니니라. 혹은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혹 하루나 혹 이틀, 혹 사흘로 이에 칠일에 이르고 定中에 머물러 자연히 향기롭고 아름다운 飮食을 얻어 먹고 몸과 마음이 快適하고 기뻐서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愛着케 하며, 혹은 사람으로 하여금 음식에 分齊가 없어 졸지에 많이도 하고 적게도 하여 顔色이 달라지게 하나니 이 뜻을 쓰는 까닭으로 수행하는 자가 항상 응당 지혜로 관찰해서 이 마음으로 하여금 삿되 나그물에 떨어지게 하지 말고 마땅히 부지런히 생각을 바르게 하여 取하지 아니하고 착하지 아니하면 곧 능히 이 모든 업장을 멀리 여의게 되리라. 응당히 알라. 외도의 있는바 三昧는 다 見愛와 我慢의 마음을 여의지 아니 했음 이니 세간의 명리와 공경을 貪着한 연고니라. 眞如三昧란 것은 見相에 머물지 아니하며, 得相에 머물지 아니하며,내지 定에서 나옴에도 또한 懈弛하거나 태만함이 없어서 있는바 번뇌가 점점 微薄해짐이니라. 만약 모든 범부가 이 삼매의 법을 익히지 아니 하고 여래의 種性에 얻어 들어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나니라. 세간의 諸禪三昧를 닦으되 흔히 味着을 일으켜서 我見에 의지하여 三界에 繫屬되면 외도로 더불어 같음이니 만약 善知識의 두호하는 바를 여의면 곧 외도의 소견을 일으키는 까닭이니라.
다시 精勤해서 專心으로 이 삼매를 修學하는 者는 현세에 마땅히 열가지 이익을 얻나니 어떠한 것이 열가지가 되는고? 첫째는 항상 十方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護念하는 바가 될것이요. 둘째는 모든 魔軍과 惡鬼에 능히 두려운 바가 되지 않을 것이요. 셋째는 九十五種의 外道와 鬼神의 惑亂하는 바가 되지 않을 것이요. 넷째는 심히 깊은 법을 誹謗함을 멀리 여의어서 重罪와 業障이 점점 微薄하여 지는 것이요. 다섯째는 일체의 疑惑과 모든 나븐 覺觀(즉 分別心)을 멸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모든 여래의 경계에 믿음이 增長함을 얻는 것이요. 일곱째는 근심 걱정을 멀리 여의어서 생사 가운데에서도 용맹스러워서 겁내지 않을 것이요. 여덟째는 그 마음이 柔和하여 驕慢함을 버려서 타인의 괴롭게 하는 바가 되지 않을 것이요. 아홉째는 비록 定力은 얻지 못하였으나 일체의 때와 일체경계의 곳에서 곧 능히 번뇌를 減損하여 世間事를 즐기지 않을 것이요. 열째는 만약 三昧를 얻으면 外緣의 일체음성에 놀라 움직이는 바가 되지 않으리라.
다시 어떤 사람이 오직 止만 닦는 다면 마음이 가라앉게 될 것이며, 혹 懈怠함을 일으켜 모든 善을 즐기지 아니 하고 大悲를 멀리 여의나니 이런 까닭으로 관을 닦음이니라. 觀을 修習하는 자는 마땅히 일체세간의 有爲法이 오래 머무는 것이 없어서 須臾에 變壞하며 일체의 心行이 생각 생각에 생멸하나니 이런 까닭으로 苦인줄 관함이니 응당히 과거에 생각한바 모든 법이 恍惚하여 꿈과 같은 줄 觀하며,응당히 현재에 생각한바 모든 법이 마치 번갯불과 같은줄 관하며, 응당히 미래의 생각하는바의 모든 법이 마치 구름과 같아서 홀연히 일어나는 줄 관하며, 응당히 세간의 일체 유신이 다 不淨하여 가지 가지로 더러운지라 하나도 가히 즐거움이 없는 줄 관함이니라.이와 같이 마땅히 생각하라.일체의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옴으로 다 無明의 熏習한 바를 因한 연고로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해서 이미 일체 身心에 큰 괴로움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逼迫이 있으며, 미래에 괴로운 바도 또한 分齊가 없어서 버리기도 어려웁고 여의기도 어려워서 깨달아 알지 못함이니 중생도 이와 같아서 심히 가히 불쌍함이 됨이니라.
이렇게 생각을 지어서 곧 응당히 용맹하게 큰 誓願을 세우되 원컨대 내 마음이 하여금 分別을 여읜 연고로 十方에 두루해서 일체의 모든 善功德을 수행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하며,한량없는 方便으로써 일체의 苦惱衆生을 求拔해서 하여금 涅槃第一義의 樂을 얻게 하리라.
이와 같은 원을 일으키는 연고로 일체 때와 일체 곳에 있는 바 衆善을 몸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따라서 修學함을 버리지 아니해서 마음에 게으름이 없나니 오직 앉아 있을 때 止에 專念함은 除함이니라.혹 나머지 일체에는 다 마땅히 할 것과 하지 못할 것을 觀察함이니라. 혹 가거나, 혹 머물거나, 혹 눕거나, 혹 일어남에 다 응당히 止와 觀을 함께 行함이니 이른바 비록 모든 法의 自性이 나는 것이 아닌 줄 생각하나 다시 곧 因緣이 화합한 善惡의 업과 苦樂等 果報가 잃어지지도 아니하고, 무너지지도 아니 하며, 비록 因緣善惡의 業報를 생각하나 또한 곧 性을 가히 얻지 못함을 생각함이니 저 止를 닦는 자는 범부가 세간에 住着함을 對治하며, 능히 二乘의 怯弱한 견해를 버림이요,저 관을 닦는 자는 이승의 大悲心을 일으키지 않고 좁고 비열한 마음의 허물을 대치함이요, 범부의 善根 닦지 않는 것을 멀리 여읨이니라.이 뜻을 쓰는 까닭으로 이 止와 觀의 門이 한가지로 서로 도와 이루어서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아니 함이니 만약 止와 觀을 갖추지 못하면 곧 능히 보리의 도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다시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서 正信을 구하고자 하나 그 마음이 겁약한 이는 이 娑婆世界에 머물러서 스스로 능히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親히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 하며, 두려워하여 이르되 信心을 가히 성취하기 어렵다 해서 뜻으로 물러가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알라 여래께서 수승한 방편을 두어서 신심을 攝護했음이니 이르되 뜻을 오로지 하여 부처님을 念하는 因緣으로 원을 따라 他方의 佛土에 태어나서 항상 부처님을 친견해서 길이 악도를 여의나니 저 修多羅에 설하사대 만약 사람이 오로지 西方極樂世界의 阿彌陀佛을 생각해서 닦은바 선근을 회향하여 저 세계에 나기를 구원하면 곧 왕생함을 얻는다 하시니라. 항상 부처님을 보는 까닭으로 마침내 물러남이 없으며, 만약 저 부처님의 진여법신을 관하여 항상 부지런히 수습하면 필경에 태어남을 얻어서 正定에 머무는 연고니라.
이미 修行信心分을 설했을새 다음은 勸修利益分을 설하리라.
이와 같이 摩訶衍인 모든 부처님의 秘藏을 내가 이미 다 설하였으니,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심히 깊은 경계에 바른 마음을 내서 誹謗을 멀리 여의고 大乘의 도에 들어가고자 할진댄 마땅히 이 論을 가져서 思量하고 修習하면 구경에 능히 無上의 道에 이르리라. 만약 사람이 이 법을 들어 마치고 怯弱을 내지 아니 하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결정코 佛種을 이어서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授記하는 바가 되리라. 假使 어떤 사람이 능히 三千大千世界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해서 하여금 十善을 行하게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한 食頃이라도 바로 이 법을 생각하는 것만 같지 못함이니 앞의 공덕보다 勝過해서 가히 比喩할 수 없나니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論을 受持해서 관찰하고 수행하되 만약 하루나 하룻밤을 하더라도 所有의 공덕이 無量無邊해서 가히 설하지 못할지니라.假令 十方의 일체 모든 부처님이 각각 無量無邊한 阿僧祗劫에 그 공덕을 讚歎하여도 또한 능히 다하지 못할지니 무슨 까닭인고? 이르되 法性의 공덕이 다함이 없는 연고로 이 사람의 공덕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邊際가 없나니라. 그 어떤 중생이 이 論 가운데에 毁謗하여 믿지 아니하면 얻는 바 죄의 果報는 무량한 劫을 지나도록 큰 괴로움을 받으리니 이런 연고로 중생은 다만 응당히 우러러 믿을지언정 응당히 毁謗하지 말지니라.自害가 깊음으로써 또한 他人을 害롭게 해서 一切三寶의 種子를 끊음이니라.일체여래가 다 이 법을 의지하사 열반을 얻은 연고며, 일체보살이 이것을 因하여 수행해서 佛智에 들어 가는 연고니라. 마땅히 알라 과거의 보살이 이미 이 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이루었으며, 현재의 보살이 이제 이 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이루었으며, 미래의 보살도 마땅히 이 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이룰 것이니 이런 연고로 중생이 응당 부지런히 닦아 배울지니라. 모든 부처님의 심히 깊고 광대한 뜻을 내 이제 隨順하여 다 가져 설하였으니 이 功德이 法性과 같음을 回向해서널리 일체의 衆生界를 利롭게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