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첫 설법
“비구들아, 출가한 이는 두 극단에 달려가서는 안 되나니, 그 둘이란 무엇인가?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함은 어리석고 추하다. 범부의 소행이어서 성스럽지 못하며 또 무익하니라. 또 스스로 고행을 일삼음은 오직 괴로울 뿐이며, 역시 성스럽지 못하고 무익하니라.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寂靜 ; 마음에 번뇌가 끊어져 고요하고 편안한 모양)과 증지(證智 ; 중도와 참다운 지혜를 체득하는 것)와 등각(等覺 ; 붓다의 깨달음은 평등하다는 뜻. 또 붓다를 일컫는 이름)과 열반(涅槃 ; 열반에 대해서는 앞으로 올릴 아함경 이야기의 – 2. 그 사상. 8.열반 – 에서 자세히 다루어 집니다)을 돕느니라. ([相鷹部經典] 56:11. 漢譯同本, [雜阿含經] 15:17 轉法論)
보리수 밑에서의 명상은 계속되었다. 그러는 중에서 붓다가 다시 생각한 것은 주로 다음의 두 가지였다고 생각된다.
그 첫째는 저 내증(內證), 즉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내용을 표현하는 일, 더 적절히 말한다면 그것을 설법하기 위해 조직하고 체계화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경전의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깨달음의 사상적 내용인 ‘연기의 법칙’과 최초의 설법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던 ‘네 가지 진리(四諦)’를 비교할 때, 얼른 보아 이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붓다는 겨우 설법할 결심이 서서 처음으로 사람들을 향해 법을 설했을 때, 자기의 깨달음의 내용을 결코 그대로 말한 것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그것은 주도한 배려에 의해 조직되고 체계화되어, 이른바 ‘네 가지 진리’로서 제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런 조직은 언제 이루어졌던가? 그것 또한 보리수 밑에서의 명상 중에, 아마도 설법의 결의가 서고 난 다음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연기의 법칙’과 ‘네 가지 진리’의 관계 즉 전자가 어떻게 조직됨으로써 후자의 체계를 이룰 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한다면, 이것은 바로 불교의 전 체계의 기초를 이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붓다의 가슴에서 오고 간 둘째 생각이란 어떤 것이었던가? 그것은 먼저 누구를 향해서 이 법(진리)을 설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설법할 첫 대상자의 선택이다. 앞에서도 이미 나온 바와 같이 이 법은 심심 미묘하고 또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에, 격정이나 무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걱정인 까닭에 붓다도 자주 설법을 주저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빨리 이해하여 줄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누구에게 먼저 이 법을 설해야 할 것인가? 계속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리수 밑에서 붓다가 생각한 것은 이 문제였을 것이다.
첫 설법의 상대, 그 지명은 먼저 아라라 카라마 위에 떨어졌다. 그는 일찍이 붓다가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옛 스승이었다. 그 스승이라면 반드시 이해하여 주려니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알아보았더니 그 사람은 이미 죽고 난 뒤였다. 실망한 붓다는 역시 예전의 스승이던 윳다카 라마푸타를 생각했던 것이나, 그도 또한 죽었음이 판명되었다.
이리하여 옛 스승과의 재회는 끝내 실현되지 않았거니와, 그것은 당시의 붓다의 심경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먼저 설법의 상대로 옛 스승을 택했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따뜻한 이해를 기대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자기가 깨달은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 받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 또한 후세의 불교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터무니없는 억측이라고 할는지도 모른다. 붓다의 확고한 신념은 이미 보리수 밑에서의 정각에서 확립된 것이라고 질타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함부의 여러 경전이 말하는 붓다의 인상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붓다는 결코 경솔하게 확신해 버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신령에 충만하여 포효하는 사람과도 성격이 달랐다. 검토에 검토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확신을 가지고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붓다의 사람됨이었다. 더욱이 당시의 붓다는 아직 서른다섯 살밖에 안 된 젊은이였음을 생각해야 한다. 비록 크나 큰 해결은 이미 이루어졌을망정, 그것을
내세우면서 천하에 군림할 자신은 충분하게 서 있지 않았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흔들림 없는 확신과 절대적인 자신은 얼마 안 가서 확립되기에 이르니, 처음으로 한 설법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을 적이 그때였다. 그런 뜻에서 보면 최초의 설법이야 말로 붓다에게는 가장 큰 시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한 붓다의 태도 또한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옛 스승 두 사람이 다 죽었다는 것을 안 붓다는 생각 끝에 친구들을 설법의 대상으로 선택했다. 경전은 언제나 그들을 가리켜서 ‘다섯 비구’라고 했거니와, 그들은 일찍이 붓다가 고행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여러 가지로 붓다를 도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붓다가 고행을 포기하는 것을 보고는 경멸의 태도를 노골적으로 나타내면서 그의 곁을 떠나버린 사람들이기도 했다.
붓다는 여기저기 수소문한 결과, 그들이 지금 바라나시(波羅捺)의 교외 이시파타나 미가다야(鹿野苑)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붓다는 곧 보리수 밑을 떠나 바라나시로 갔다. 우루베라에서 바라나시까지는 250킬로미터가 넘는다. 그야말로 천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오직 법을 설하기 위해 떠났던 것이니 붓다가 이 첫 설법에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 이해가 간다.
얼마 가지 않아 붓다는 한 사문을 만났다. 경전은 그의 이름을 사명외도(邪命外道 ; 고사라가 시작한 종교. 모든 것은 운명이요, 인간의 의지력은 아무 작용도 하지 못한다고 보았다)인 우파카(Upaka)라 전하거니와, 그는 붓다의 얼굴을 보자 말을 걸어 왔다.
“존자여, 당신의 얼굴은 참으로 광명에 넘쳐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에 의해 출가했고, 누구를 스승으로 모셔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붓다가 그 깨달은 바를 이야기할 예기치 않은 기회가 되었다. 경전은 여기에서도 붓다의 대답을 운문으로 기록해 놓았다.
나는 일체에 뛰어나고 일체를 아는 사람.
무엇에도 더럽혀짐 없는 사람.
모든 것 사리(捨離)하여 애욕을 끊고 해탈한 사람.
스스로 체득했거니 누구를 가리켜 스승이라 하랴.
나에게는 스승 없고, 같은 이 없으며 이 세상에 비길 이 없도다.
나는 곧 성자요 최고의 스승,
나 홀로 정각(正覺) 이루어 고요롭도다.
이제 법을 설하려 카시(迦尸)로 가거니 어둠의 세상에 감로(甘露)의 북을 울리리라.
아직 젊은 붓다가 자신 만만하게 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소리를 들은 우파카는 아연 실색하고 말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라는 아이러니한 말을 남긴 채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가 버렸다고 한다. 모처럼의 첫 기회가 헛되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붓다는 다시 여행을 계속하여 마침내 미가다야(鹿野苑)에 도착했다. 그러나 거기에도 만만치 않은 상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 명의 비구들은 붓다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환영하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한 문헌([율장대품])은 그때 그들이 한 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보라! 저기에 나타난 이는 고타마이다. 그는 고행을 버리고 사치에 떨어진 사람이다. 인사도 하지 말고, 일어나 마중도 하지 말고, 의발(衣鉢)도 받아 주지 말아야 하리라. 그러나 자리만은 펴 주자. 앉고 싶거든 앉게는 해야지.”
그래도 막상 붓다가 다가오자 그들은 일어나서 맞아 주었다. 의발도 받아 주고 발을 씻을 물도 떠다 주었다. 역시 친구로서의 우정이 남아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붓다가 그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려 하자 그들은 완고히 듣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앞서 붓다가 고행을 포기한 것을 보고, 그가 타락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훌륭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지 못했던 것이다. 옥신각신한 끝에 붓다가 말했다.
“그럼, 너희는 예전에 내 안색이 이렇게나 광명에 넘쳐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안에 훌륭한 정신을 지닌 사람은 그 안색도 빛나게 된다. 고대 인도사람들은 그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많은 문헌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다섯 명의 비구들도 그렇게 듣고 보니 고타마의 안색이 예사가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면 어디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나 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그리하여 경전이 ‘여래소설(如來所說)’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설법이 베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붓다가 45년에 걸쳐 행했던 설법의 수효는 몇 천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설법은 모두 ‘대기 설법(對機說法)’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의 기근(機根 ; 진리를 받아들이는 중생의 소질. ‘근기’라고도 함)에 따라, 또 문제에 따라 거기에 어울리는 내용이 설해진 까닭이다. 그런 중에서 오직 한 번만 예외가 있었다. 그 예외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설법이다.
여기서는 먼저 설하고자 하는 가르침의 내용이 마련된 다음에 “이것을 빨리 깨닫는 이는 누구냐?”고 해서 설법의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런 뜻에서 볼 때 붓다가 그 깨달은 내용을 가지고 자진해서 설한 것은 이 첫 설법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팔리 어 경전의 편찬자가 첫 설법의 내용을 전하는 경전에 ‘여래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믿어진다. 또 한역의 [아함경]에서는 이 경을 ‘전법륜(轉法輪 ; 불법<佛法>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것이니, 곧 붓다의 설법)이라고 불렀거니와, 그것도 같은 생각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붓다는 많은 것을 설하셨으나, 이야말로 여래가 설하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이 경밖에는 없다고 본 것이리라. 그 정도로 이 설법이 갖는 뜻은 큰 것임이 확실하다.
그 설법 – 그것을 후세 사람들은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는 엄숙한 표현으로 부른다 – 은 이제 미다가야에서 다섯 명의 비구를 상대로 하여 설해지게 되었다. 그 앞부분의 내용이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한 일절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먼저 두 극단적인 입장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그 하나는 쾌락주의의 입장, 즉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또 하나는 금욕주의의 입장, 즉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돌이켜 본다면 그것들은 모두 붓다 자신이 몸소 체험한 생활 방식임에 틀림없다. 일찍이 가정에 계셨을 때 온갖 욕망에 묻혀 있던 이가 바로 그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것을 붓다는 출가 즉 ‘크나큰 포기’의 감행으로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출가한 그는 다시 고행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여기서도 고행에 열중하던 붓다는 차츰 그 불합리성을 간파할 수가 있었다. 결국 두 극단적인 입장에 대한 비판은 바로 그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새로이 택한 입장으로서의 중도(中道)와 그 위에서 전개된 사상 체계로서의 네 가지 진리(四諦)가 계속해서 설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