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우리는 모두 영원의 바다로 간다

우리는 모두 영원의 바다로 간다

-지광스님-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예전에 많이 듣던 노랫가락이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방랑자의 심리가 있다.

누구에게나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픈 마음이 있다.

‘인생은 나그네길’을 노래한 가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들 마음 가운데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잠재해 있다.

그대의 마음 가운데에도

무언가를 동경하는 마음, 영원한 그리움이 있지 않은가.

『법화경』에도 ‘우주의 무량중생들 모두가 한없이

떠돌고 있다’고 하셨다.

무량한 삼천대천세계를

여인숙처럼 이별 저별 넘나들고 있다는 것이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등 삼계육도

모두가 우리들의 여관이다.

지은바 업 따라

잠시 머물고 그 어디론가 끊임없이 떠도는

나그네길이 우리들의 인생행로다.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 않으니 항구적인 주거지가

있을 수 없고, 집착이라거나 애착이라거나 하는 것은

모두가 어리석은 짓이다.

모두가 한 조각 구름처럼

생겨나서 떠돌다 사라지는 것이 인생 아닌가.

삼라만상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도무지 모두들 어디를 향해서 떠도는가.

프랑스의 어느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5분간 걸어보라.

10분간 걸어보라.

모든 장면은 계속 뒤로 물리고 끝없이 장면이 바뀌지 않는가.

새로운 장면이 계속 열리지 않는가.

계속 가라.

그곳에 새로움이 있다.

버리며 가보라.

계속 가보라.” 걷기의 미학이다.

십우도에도

소를 찾아 떠났다가 소의 흔적을 만나고,

소를 찾아 돌아오는 얘기가 등장한다.

우리는 모두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떠도는 방랑자들이다.

부처님 말씀대로 우리는 모두 이렇게 흘러

결국 모두 바다로 간다.

산과 길 대지위에 빗방울이

떨어져 흐르고 구르며 바다를 향해가듯 그 어디엔가

잠깐잠깐 머물지만 모두 바다를 향해간다.

업장 따라 잠깐 잠깐 머무는 것처럼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정처 없이 흐른다.

그때마다 잠깐씩

가족이란 이름으로, 나라나 민족이란 이름으로

업장 따라 잠깐씩 함께하는 순간이 있기는 하다.

“중생은 언제나 계(界)와 함께 하고 계와 화합하느니라.

훌륭한 마음이 생길 때 훌륭한 계와 함께하고,

탁한 마음이 생길 때 탁한 계와 함께한다.

물이 기름에 섞이지 않는 것처럼 고유한 계가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갖가지 계를 잘 분별해 나가야 하느니라.”

삼계육도 어느 곳엔가 우리의 마음 따라, 업장 따라

잠시 머물며 모두 바다로 간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그리움의 원천은 고향을 떠나온 자의 향수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들의

마음을 보라 모두가 육바라밀 행을 닦으며,

길을 닦으며 간다.

불교를 행의 종교라 하는 것은

끝없이 가야만하는 종교요, 걷는 종교요,

끊임없는 정진의 종교이기에 그렇다.

영원한 나그네에게 고정점이 있을 수 없고

무아일수밖에 없다.

결국 바다에 가면 한맛이 된다.

끊임없이 변해나가는데

‘내’가 어디에 있는가.

나를 주장하는 인간이 무명이며

나를 내세우는 것이 불행이다.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발하며, 보리심을 발하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욕망, 집착은 모두가 허상이다.

어디엔가 잠시 머무는 마음은 영원한 나그네 길의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서일 뿐이다.

죽음도 잠시의 멈춤일 뿐 계속 흘러가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가피다.

항상 스스로에게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고, 무엇이 그리워

걷고 있는가 생각하며 걸어야 한다.

우리의 길은 부처님을 향해 나가는 길이고,

영원과 하나 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영원의 바다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는 영원을 가는 방랑자이며

부처님을 따라 걷는 구도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라.

우리는 그 길에 모두 하나가 되어 만난다.

결국 우리의 동경, 그리움은 부처님의 가피요,

언젠가 하나로 만나게 하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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