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분재와 왕생의 원리 (1)
-지광스님-
1.
영혼은 제 갈 길을 가도록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각도로 힘을 많이 씁니다.
내가 힘을 가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방향
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작용을 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가하는 방향으로 일정한 힘을 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만약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 마음
이 어떤 형태로든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므로 상대방도 그 힘을 느끼게 되고 메아
리처럼 그 반응을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만사 전부가 다 그와 같은 원리로 되어 있습니
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이 세상을 살다가 떠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홀가분하게 “아, 나는 참
열심히 살았다.
더 이상 이 세상과 나는 관계가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떠나갈 수 있는 사람
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우선 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내용들이 많이 있었고, 또 그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 다시 나에게 영향을 가하는 경우가 다반사이
기 때문에 양자간에 인력이 작용하는 겁니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발걸음을 뗄려고 하면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꼭 있게 마련입니다.
빨리 떠나가
버렸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마음조차도 뒤집어 놓고 보면 애
착이라는 마음과 증오라는 마음이 다 같은 내용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미워하기도 하는
그런 법이니까요.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던 사람들이 저 세상을 가려한다 하더라도 홀가분하게 떠
나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살아있는 사람들 때문에 잘 떠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도”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영혼들이 제 갈 길로 가게 내버려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등진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사람을 잊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잊어줄 수 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가 봅니다.
잊어달라고 해서 잊어지지 못하는 것이 인간 마음의 흐름입니다.
만약에 어떤 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할머니에게 “나를 잊어줘.” 이렇게 했다고 해 보십시오.
할머니가 “네” 그
러시겠어요? 그렇게 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떠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이, 내가 떠나고 싶다
고 떠나지는 게 아닌 것이란 말씀입니다.
상호 양자간의 인력 때문에 떠나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
다.
그래서 영혼들은 이른바 제 갈 길을 찾지 못해서 허공을 방랑하는 방랑객(vagabond)처럼 이
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착 때문에, 미련 때문에 제 갈 길을 가지 못합니다.
과학의 세계에서 우
리는 로켓트를 쏘아 올려 다른 외계로 나갈려면 자꾸만 탄도를 쏴서 이 세상을 치고 나가야 됩니
다.
다탄두의 힘이 없으면 지구 주위를 뱅뱅 돕니다.
그렇게 써먹는 것이 인공위성이기도 하지만
지구의 인력권에 포박이 되어서 떠나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 주위엔 사바의 인연에 포박이 되어서
떠나지 못하는 영혼들이 아주 많이 계십니다.
어떤 보살님은 남편이 돌아가셨는데 매일 새벽기도 나오실 때마다 꿈에서라도 한번 봤으면 좋겠다
고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영혼이 떠나겠습니까? 그 전에는 꿈에도 잘 나타나더니
요즈음엔 가끔밖에 안 나타난다구 마음이 변했나 봅니다.
영혼도 하여간에 떠나갈 마음을 만들어
줘야 됩니다.
좋은 데로 가게끔 “좋은 데로 가십시오.
극락왕생하십시오.” 이런 마음이 되어져야
할텐데 그게 안되면 상호 양자간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서로 계속해서 그리움만 있는 게 아니
라 애증이 교차합니다.
(경)에서 보듯 애착을 갖고 자꾸 생각을 해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면 어떻
습니까? 이 사바세계에서 살 때도 남편이 출장을 가거나 멀리 가 계시면 보고 싶으시지요? 하루라
도 안보면 무섭고 두렵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같이 살면 밉살머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애증
이 막 교차를 합니다.
안보면 보고 싶고 보면 얄밉고 합니다.
그런데 영혼들의 경우도 그게 아주 흡
사하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애착하는 것만큼 그 영혼들의 투정도 다 받아야 됩니다.
영혼들이 괴로워하면 그것이 우
울증으로 작용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영혼들이 이 세상을 떠나서 아무리 사랑의 마음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 아내가 알겠습니까? 모릅니다.
또 예를 들어서 내가 지워낸 유자, 수자령(水子靈), 망
태아령(忘胎兒靈) 그런 영혼이 있다고 쳐보십시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자식은 전생에 치열한
애인이라는 것 아닙니까? 기가 막힌 사랑 때문에 어머니 뱃속에 들어왔는데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
고 제거를 해버리면 얼마나 그 사랑의 마음이 원한으로 변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굉장히 우울해합
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훨씬 더 우울증이 심한 이유가 그런 점에 크게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
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빛을 보고 싶어 했는데 그것을 지워내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막
우울해 하는 겁니다.
2.
천도는 영혼과의 정리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다음에 우리가 49일재를 지내는데 이 세상을 등진 다음에 어떤 일정한 기간
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공부도 기초가 중요한 것처럼 영혼들도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데 저승
에 대한 공부의 밑바탕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없으면 저승에 가서 아주 곤란해 합니다.
그런데 그
때 애착하는 마음으로 막 붙잡아서 떠나지 못하고 빙글빙글 도는데 점점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
을 영혼들도 느낍니다.
그래서 실제로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영혼
들은 다 알아서 훼방을 놓거나 사고를 내고 그럽니다.
논현동에 사는 어느 보살님은 남편이 돌아가
신지 3년이 되었는데 금술이 좋으셨나 봅니다.
나이도 그렇게 많지 않으신데 세월이 지나니까 자
꾸만 엷어지는지 다른 모임에서 학교동창을 만난다거나 그러면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고 합니
다.
두통약을 먹고 잠을 자면 남편이 무서운 얼굴로 나타나서 겁이 난다는 분도 계십니다.
다른 남
자를 만나는 경우에만 그렇더라는 겁니다.
“보살님이 뭔가 심리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셔서 그렇겠
지요.” 제가 그래도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그렇게 아니라는데 제가 어떡합니까?
하여간 이 영혼과 나 사이의 인력인 애착이라는 것은 상호간에 괴로운 겁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
가운데 잘 정리하는 마음으로 꼭 천도를 잘 시켜줘야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후환이 덜합니다.
이
세상을 등진 영혼들이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도무지 알 수
가 없지만 (경)들을 보면 그들의 영향력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란분재, 지장재도 지내
고 “재”를 자꾸만 지내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을 좋게 보내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 우주에 사는
사람들은 남남으로 살다가 만나서 전부 다 손님처럼 한 덩어리로 살았지만, 여관에서 만나 같이 삶
을 도모하다 뿔뿔이 떠나가는 새떼들 같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 정말 잘 헤어진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이별 할려고 할 때는 꼭 애착이 앞을 가립니다.
너무 크게
사랑하는 것도 사실은 크게 마음의 아픔을 가져옵니다.
사바세계의 중생들은 다른 외계 하늘나라
의 중생들 하고는 사랑하는 양태가 너무나 다릅니다.
여기는 꼭 1대 1이거나 일부다처를 하는 나라
와 종교도 있습니다만 이렇게 덩어리가 져 있으니까 애착도 강합니다.
그러나 저 하늘나라 중생들
은 우리하고는 사랑하는 양식이 다릅니다.
마음만으로 입니다.
우리처럼 남녀의 만남이 그렇게 어
려운 형태가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도 이 세상을 살면서 그냥 그 사람만 생각하면
괜히 즐거워지는 기분이 드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손을 어루만지고 같이 뽀뽀
를 해야지만 좋은 게 아니라, 생각만 해도 마음에 즐거움이 오고 흥분이 오는 수가 있습니다.
육신
이 아니고 마음으로 생각만으로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모든 존재들은 이 사바세계에서 너무나 빼어난 인격의 존재들이 간다고 그러지 않습니
까? 빼어난 인격에 공덕과 지혜의 화신들이 그곳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게끔 되어 있답니다.
그 사랑은 사바세계의 사랑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사랑입니
다.
내 것과 네 것이라고 하는 강한 가름과 소유욕이 떠난 사랑이라는 겁니다.
천인들의 사랑입니
다.
그들은 모두를 사랑하니까 내 것이고 네 것이고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같은 이런 몸으로
되어 있지도 않고 묘색신이라고 해서 이른바 극락에 사는 사람들의 몸입니다.
3.
극락과 천당의 다른 점
사람들은 그런 것을 많이 물어 봅니다.
“스님, 극락과 천당은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당
장 극락에 사는 사람들은 《관무량수경》에 보면 ‘비색비무색(非色非無色)’ 뭔가가 있는 것 같기
도 하지만 도저히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 그런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낙심’ 아
주 즐거움 그 자체를 누리기만 하는 그런 몸과 마음이라 우리들은 상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
나라 색계, 무색계에 사는 존재들은 우리하고는 가름이 다르지요.
몸뚱아리조차 차원이 다르니까
요.
우리는 차원이 낮은 존재들입니다.
혼자 잘났다고 꼴깝을 떨지만 거대한 우주적인 차원으로 본
다면 사실은 별 볼일 없습니다.
사랑하는 양태도 질이 낮지 않습니까? 극락이라는 세계는 영리여
신원(永離女身願)이라 거기는 여자의 몸이 없다고 합니다.
우선 극락과 천당의 차이점을 딱 하나
만 얘기한다면 천당엔 아직도 여자들이 있습니다.
불교에선 여자는 욕계까지 있지만 색계이상의
세계에 가면 거기엔 여자는 없답니다.
하여간 사바세계에 반쪽으로 갈라져 있다는 게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치열하게 하나가 될려고 하는 무서운 힘이 작용하니까요.
무서운 인력입니다.
그렇다고 직장이나 화장실에 하나로 붙어 다닐 수도 없는 것이고 심각합니다.
그것은 사실 우리가
업장이 두꺼워서 이렇게 사는 겁니다.
경전에 말씀하신대로 우리가 정말 사랑하면 한 몸이 되어 있
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진
실 같으면서도 거짓을 행하며 진짜 사랑을 안합니다.
진짜 사랑하게 되면 한 몸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부부간에 살면서도 진짜 사랑하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 “어떻게 좀 빨리 꺼져 버렸으면.
저
런 귀신 누가 안 잡아가나.” 이렇게 무척 미워하는 이상한 마음 때문에 이렇게 덩어리가 갈라졌다
고 합니다.
업장입니다.
좋아하는 때도 있지만 이상하게 그냥 싫어지는 때도 있어서 저 외계 다른
하늘나라의 존재들 하고는 전혀 마음의 차원이 다르며 진실한 사랑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
리가 반쪽이 되었다고 합니다.
서로의 마음 가운데 속임의 마음과 애증의 마음이 교차하기 때문에
완전히 하나가 되기가 어려운 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한 사랑을 모릅니다.
진실한 사
랑은 하나이니까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가게 되면 거기는 가름이 되지 않는 마음의 세계로 한 몸으로 붙어서 하나
로 사는 겁니다.
그런 존재들은 갈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기는 여기보다 훨씬 고통이 덜 하
겠지요.
매일 하나이니까 갈라질 필요가 없고 그러니까 극락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구국의 경지로
완전히 확장되어 우주와 하나가 되어서 어느 누구와도 하나가 되는 존재가 되면 부처님 되시는 겁
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천당과 극락의 차이점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게 많습니다.
극락이라는 세계는 《관무량수경 정토
삼부경》에 보면 심신심(深信心) 자기가 간절한 마음으로 극락을 확실히 믿고, 지성심(至誠心) 지
극히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간절히 그곳에 나기를 발원해서 공덕을 수승하게 지어가는 사람들은 누
구나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끊임없이 염불묘심으로 발원합니다.
그런데 천당이라고 하는 곳
이 제가 체크를 해 놨는데, 아주 문제가 있는 것이 첫 번째로 마태복음 20장 23절, 24절-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은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누가복음 3장 16절-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이 극락은 자기가 원하면 갈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무량수경》에 보면 이른
바 5역죄와 10악업을 지은 사람도 간절한 마음으로 발원을 하지만 5역죄는 죄 중에 가장 무서운 죄
로 구제가 불가능하다고 그럽니다.
대승불교의 정화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선가, 선문, 우리
가 흔히 참선(參禪)이라고 하는 것과 둘째는 정토문(淨土門) 이 두 가지가 상당히 대승불교의 궁극
의 경계라고 하는데 이 《정토경》에 나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5역 10악업 죄를 지은 사람들은
구제가 불가능했습니다.
5역죄라는 것은 부처님라거나 아버지 어머니를 살상을 하거나, 아라한을
해꼬지 하거나, 아주 극악하고 흉악한 죄를 지은 악업을 쌓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토경》에
보면 5역죄와 10악업을 지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그가 임종에 당해서 아미타부처
님을 정말로 간절히 불러 모시면 아미타부처님께서 그를 맞아들이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큰 스
님께 물어 보니까 “그것은 다른 게 아니다.
왜냐면 네가 설령 금생에 어마어마한 악업을 지었다 하
더라도 네가 본래 부처임은 부처님도 부정하진 못하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본래 부처님이니까
네가 아무리 극악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네가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불러 모시면 이른바 부
처님의 거룩한 광명과 빛 그 힘으로 그런 것은 다 태워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구제가
불가능한 존재는 없다는 부처님 말씀입니다.
극락은 완전 개방적(open)입니다.
그런데 천당은 좀 문제라 여러분이나 저 같은 사람은 천당 생각
을 일체 하지 말아야 됩니다.
거긴 갈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 얘기대로 한다면 사실 그
런 것이 아닙니다.
천당도 그 쪽 경전에는 그렇게 나오지만 자기의 가름 따라서 가는 곳이니까요.
4.
열려있는 극락세계
분명한 사실이 극락은 어디쯤 있습니까? 천당은 어디쯤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질문이 아주 많습
니다.
어떤 스님들은 “다 똑 같은 거지, 뭐” 그러지만 경전을 보면 확연히 갈라집니다.
극락에는 남
녀가 없지만 천당에는 남녀가 있습니다.
어느 세계까지는.
그리고 성경에는 내가 아무리 가고 싶어
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천당이라고 그려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적인 표현으로 그
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천당도 자기가 지은 공덕만큼 가는 세상이라고 얘기를 하지만 불교는 좀
열려있고 자유롭습니다.
특수한 사람만 이런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극락엘 가실려고 마음을 먹으
면 천도재를 지내면서 꼭 빠트리지 않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원왕생 원왕생 왕생극락 견미타
친견미타” 천도재 쳐놓고 극락왕생 빠진 제사문이 없습니다.
전부 다 극락왕생을 발원하라고 영가
들에게 가르칩니다.
경전마다 극락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제가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조사해 보니까 《화
엄경》에도 수행자들은 극락왕생을 발원하라는 게 나옵니다.
《반야경》에는 서방정토극락세계
에 대한 상황이 다 그려져 나옵니다.
《법화경》(화성유품)에 보면 대통지승부처님이 계시는데
그 분의 16번 왕자 가운데 9번째 왕자가 아미타불이셨습니다.
(야광보살품)에 임종시에 간절한
마음으로 아미타부처님을 염하게 되면 그 아미타국토에 태어나게 되어 있다는 이것은 야광보살의
본래 수행의 원력 때문에 그렇다고 나옵니다.
(열반경 1품 3품 24품)에 보면 극락세계의 제반양상
에 대해서 아주 절절히 나옵니다.
경전마다에 도처에 흩어져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다
가 극락에 대한 말씀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을 하는 사람들은 견성 성불해야지 극락 같
은 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자기가 금생에 성불을 못하는 존재들은 어떻게
되나요? 그러니까 모든 제사문장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극락왕생의 원리, 정토왕생의 원리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왜 그러면 왕생극락을 끊임없이 강조하십니까?” 묻습니다.
제가 조사를 해 보니까 극락이라는 세
계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처님이 되시기 전에 가장 많이 왕래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석
가모니 부처님과 굉장히 인연이 지중한 땅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사바세계의 존재들이 가장
가까운 곳이 극락이랍니다.
그리고 악인도 염불하기만 하면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극락이고, 극락
은 내가 가겠다고 원력만 세우면 갈 수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왕생극락하면 결정코 성불하기 때문
에 중생들이 꼭 발원 해야될 곳이다 그랬습니다.
성불의 원을 세워서 수행을 하다가 결정코 금생
에 내가 성불이 쉽지 않겠다라고 판단하면 그 순간부터 염불하라는 겁니다.
원효 대사 같으신 분
도 계속 아미타불 염불을 하셨습니다.
원효대사가 성불하셨는지 안하셨는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성
불하신 분이겠지요.
우리는 “십지보살(十地菩薩)”이라고 얘기를 하니까요.
어쨌든 원효 대사께서
일생동안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분명히 아미타불 염불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정토문, 극
락은 각자의 수행의 정도로 가고 못 가는 것이 결정 된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기 나름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 의해서, 다른 것에 의해서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광활한
우주 가운데 정말 성불의 의지를 가진 자신 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