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무아의 세계 보려면 ‘이기적 나’ 타파하라

무아의 세계 보려면 ‘이기적 나’ 타파하라

-지광스님-

기도는 업장소멸이다.

선근의 증장이다.

‘기도를 하면 실제로 업장소멸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잠시 유식(唯識)의 얘기를 들어보자.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개체의 모든 생물 정보가 저장 돼 있는 8식 알라야식이 있다.

개성, 인격, 성격 등을 결정짓는 개체의 원천이다.

알라야식을 의지처로 해서 생에 대한 강한 집착, 생존의 기쁨, 죽음의 혐오, 불로불사의 소망, 자신의 영원불변을 추구하는 의식이 말나식이다.

말나식은 자신의 영원불변을 희구하면서 무상한 자신을 영원불변한 것으로 착각한다.

기만의 주범이라 할 수 있다.

둘은 한 몸으로 개체성을 지지하는 것은 알라야식이고 지지받는 것은 말나식이다.

그런데 또 지지받는 말나식이 자신을 지지하는 알라야식을 지지하며 개체성을 지탱하고 있다.

이들 두 의식 가운데 과거의 선험적 모든 체험정보가 들어있다.

현실세계의 의식집결지라 할 수 있는 제 6의식은 끊임없이 선험정보인 말나식으로부터 오는 정보를 수신해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런데 기도할 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고성염불을 하게 되면 염불묘음으로 외부의 정보가 차단되는 동시에 말나식으로부터 오는 선험적 에고이즘의 정보가 두뇌 전두엽으로 유입되는 것도 막아버린다.

이른바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반응이 가능한데 현재식 6식과 과거식 7식의 연결이 기도 참선 등으로 차단되어 버린다.

그 결과 선험적 정보 등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기능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이 거듭되면 알라야식과 말나식이 점점 위축될 수밖에 없다.

기도 참선뿐만 아니라 과학자가 연구에 깊이 몰두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강한 집중상태가 형성돼 7식 8식의 에고이즘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탁월한 과학자, 연구자들이 위대한 영감과 만난다든지 기도 참선 중에 위대한 지혜와 만난다든지 하는 예가 비슷한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염심불산(念心不散), 삼매현전(三昧現前) 등 고성염불 십종 공덕의 가르침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유식에서 전식득지(轉識得智)라 하는 경계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기도 참선 사경 등 갖가지 수행에 몰두할 때 위대한 가피와의 만남은 이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기도 정진을 통해 외경을 차단하고 내부의 선험적 정보들과의 만남을 저지한다면 과거의 축적된 정보 등은 쓸모없이 되어버릴 것이고 점차 부처님 경계가 드러나게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다.

갖가지 업식의 타파를 위해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수행은 진정 먹구름 같은 업식, 업장을 걷어내며 닫힘의 세계에서 열림의 세계로 나아가는 첩경인 것이다.

그 같은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혁신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수행자의 삶을 해탈자의 길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행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기적인 자기중심적 자아는 깨지고 무아(無我)의 세계, 부처님의 세계가 열려가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부처님 세계로 나아가게 되고 지극한 용기와 신심이 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위대한 용기와 신심을 바탕으로 모든 유정중생들을 열반의 세계로 이끄는 영웅들을 가리켜 보살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탁월한 교육이란 인간의 사고방식과 품행을 바꾸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현실중생들에게 수행자의 삶을 열어가도록 이끄는 불교 교육이야말로 참으로 이상적인 교육이라 말할 수 있다.

‘이기적인 나’ 중심에서 부처님을 향해 나가는 길이 수행자의 삶이고 그 가운데 무량한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 하시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를 체험한 수행자는 소극적 삶에서 적극적인 존재로 돌변하며 부처님의 위대한 전사가 되는 것이다.

수지신시광명당(受持身是光明幢)의 정신이 바로 그를 의미한다.

정신혁명이 가치관 신념체계의 근본적 변혁을 의미한다면 이는 참다운 수행을 통해 얻어질 수밖에 없고 그 역시 위대한 부처님 가피의 소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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