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상 드러낸 대승경전의 꽃, 여러 가지 단독 경전 한데 모아 집대성
입법계품의 구도과정 감동, 일즉일체 종지 드러낸 보살행 강조
대승경전의 꽃이라고 하는 《화엄경》은 반야계 경전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로부터 “반야는 공관(空觀)의 시작이요, 화엄은 공관의 끝”이라고 일컬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에서 시작과 끝은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화엄경》의 갖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으로서 이 이름 자체가 경전 전체의 대의를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그 뜻풀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대(大)라고 하는 것은 크다는 뜻인데 단순히 작다고 하는 소(小)에 대한 상대적인 대가 아니라 절대적인 ‘대’로써,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의미의 극대(極大)를 의미합니다. 이어서 ‘방(方)’이란 방정하다·바르다는 뜻이고 ‘광(廣)’은 넓다는 의미이니까 합하여 ‘대방광’하면 시공(時空)을 초월한다는 뜻이 되고, 거기에 불(佛)을 붙여 ‘대방광불’하면 시, 공을 초월한 부처님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 다음 ‘화엄’의 원어는 간다비유하(Gandavyuha)인데 즉 여러 가지 꽃으로 장엄하고, 꾸민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화’는 깨달음의 원인으로서의 수행에 비유한 것이고 ‘엄’은 수행의 결과로서 부처님을 아름답게 장엄하는 것, 즉 보살이 수행의 꽃으로써 부처님을 장엄한다는 의미이지요.
그러나 이때에 중요한 것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들만을 뽑아서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 무심히 피어있는 이름 모를 잡초들까지도 모두 다 포함된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을 일명 《잡화경(雜華經)》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화엄경》의 산스크리트 원본은 산실되어 버리고 단지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만이 현존하고 있는데, 한역은 두 가지의 대본(大本), 즉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와 실차난타(實叉難陀)의 번역본이 있습니다.
전자는 번역된 권수가 60권이기 때문에 《60화엄》이라고도 하고 또한 번역한 시대가 동진(東晋)이므로 《진경(晋經)》, 현장 이전의 번역이므로 《구역(舊譯)》이라 부르는 반면, 후자는 권수가 80권이라서 《80화엄》 또한 당나라 때의 번역이기 때문에 《당경(唐經)》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반야(般若)가 번역한 《40화엄》이 있으나 이것은 대본(大本)의 입법계품에 해당하는 부분적인 번역입니다.
그리고 9세기말에 번역된 티베트본인 《서장화엄경(西藏華嚴經)》도 현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판본이 몇 가지나 되다가 보니 자연히 구성조직도 조금씩 틀리는데, 즉 《60화엄》은 칠처팔회(七處八會 : 일곱 장소에서 여덟 번의 법회) 34품으로 구성되어 있고 《80화엄》은 칠처구회(七處九會 : 일곱 장소에서 아홉 번의 법회) 39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크게 삼분(三分)하여 지상편(地上篇), 천상편(天上篇), 지상회귀편(地上回歸篇)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화엄경》은 처음부터 현재의 체제로 만들어진 경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사상을 같이 하는 여러 가지 단독 경전을 모아 집대성한 것입니다. 그 시기는 대체로 4세기경으로 보고 있고 장소로는 서역의 우전국(于전國 : 현재 중앙아시아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화엄경》은 많은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그 심오한 내용을 원고지 몇 장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정말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될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화엄경》은 보통 부처님의 자내증(自內證)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를 그대로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리불이나 목건련과 같은 훌륭한 제자들도 벙어리와 귀머거리처럼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는 얘기일 겁니다.
그러나 한 방울의 거품을 보고서 바다 전체를 보았다고 한다거나 반대로 바닷물을 다 마신 후에야 그 맛을 알겠다고 한다면 이 또한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경전의 한 구절 한 구절의 낱말에 구애받지 마시고 좀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화엄경》 전체를 하나의 대 서사시(敍事詩)나 대 드라마로 이해한다면, 보다 좀더 친근감이 있는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화엄경》의 핵심적인 사상 몇 가지를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화엄경》의 중심사상은 한마디로 실천적 보살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십지품’에서 보살의 수행이 진행됨에 따라 마음이 향상되어 가는 과정을 환희지(歡喜地)로부터 법운지(法雲地)에 이르기까지 열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소 추상적인 감이 없지 않은데 비하여 ‘입법계품’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친근감이 있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세계인 ‘법계(法界)에 들어간다(入)’는 의미로서의 ‘입법계품’은 《화엄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부분인 동시에 경전 전체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럽 종교문학의 걸작이라고 하는 《천로역정(天路歷程)》에다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선재동자’라고 하는 젊은 구도자를 등장시켜서 차례차례로 53인의 선지식들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고 결국 깨달음을 얻는 구도담(求道談)입니다. 이러한 선재의 구도과정을 통해 끊임없는 노력, 즉 정진이 바로 불교임을 강조하고 있지요.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선재동자가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가는 선지식, 즉 선재가 스승으로 삼는 대상은 지위와 신분 그리고 성별에서도 전혀 차별이 없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보살이나 비구, 비구니를 비롯해서 국왕이 등장하는가 하면 외도(外道)와 바라문 그리고 상인과 어부, 심지어는 창녀까지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경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어떤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대승적인 평등사상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르치는 스승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앞서 언급하였듯이 《화엄경》을 일명 《잡화경(雜華經)》이라고 부르는 이유, 잡화 즉 여러 가지 꽃으로 부처님을 장엄할 때 그 여러 가지 꽃 중에는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꽃은 물론이거니와 이름 모를 풀꽃까지도 포함되어 있듯이 일체중생이 모두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부처님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왜냐하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우리는 상대가 있음으로써 거기서 배울 것을 얻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마치 산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이름 모를 풀들도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면 잡초에 지나지 않지만 한의사들 눈으로 보면 모두가 약초로 보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똑같은 풀이라도 잡초로 볼 때는 잡초일 뿐이지만, 약초로 볼 때는 모든 풀이 약초가 되듯이 내가 상대를 선지식으로 볼 때 상대방도 역시 나를 선지식으로 대해 줄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수행이 필요하고 또한 그 수행과정을 하나하나 쌓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화엄경》은 이 문제를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是便成正覺 : 처음 발심했을 때에 바로 깨달음을 이룬다)이라는 논리로 간단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보통 시작이 반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그보다 진전하여 ‘처음이 바로 끝이다’라는 논리라고나 할까요. 예를 들면, 우리 불자님들이 절에 갈려고 마음을 일으킨 바로 그 순간 이미 각자의 발원은 성취되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화엄경》에서는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연기의 세계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현상적으로 보면 개개의 사물들이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개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는 설명입니다.
마치 바다의 섬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떨어져 보이지만 바다 밑으로 보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인다라망(因陀羅網)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소위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이라고도 표현하는 사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에서 우주 전체의 모습을 보고 그 풀잎에 맺혀있는 한 방울의 작은 이슬에서 온 중생의 아픔을 느끼는 원리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사상은 경전에만 국한되고 있는 이론이 아니라, 현대물리학에서도 충분히 증명이 되고 있어 더욱 공감이 갑니다. 예를 들면 우리 몸의 세포 하나 하나에는 우리 몸을 복제할 수 있는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세포 하나만 있으면 우리 몸 전체를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세포 하나를 통해 몸 전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일즉일체(一卽一切)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 셈이지요. 이를 사회생활 속에 적용시켜보면 우리는 서로가 연관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화엄 사상의 기본 입장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