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사에 800년대 당나라 중기때, 백장선사(749-814)라고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백장선사가 백장산에서 설법을 하는데, 어떤 한 노인이 항상 와서 듣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다른 사람들이 다 물러간 뒤에도 혼자 남아 있기에 백장선사가 궁금히 여겨 물었습니다.
“서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고 하니, 그 노인이 말하기를 “나도 과거 가섭부처님 시대에 이 산에서 살았었는데 어느날 학인이 나에게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하고 묻기에 나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불락인과.不落因果)’라고 답했습니다. 그 과보로 인해 500년동안 여우의 몸을 받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스님께서는 자비심으로 제도하여 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백장선사는 “그대가 나에게 다시 물어보라.”
노인이 다시 묻되, “스님께 묻겠습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선사가 대답하되, “인과에 어둡지 않느니라(불매인과,不昧因果)”고 하였다.
노인이 이 말 끝에 크게 깨닫고는 하직을 아뢰면서 말하되, “이제 스님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여우의 몸을 벗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우의 몸을 벗어 뒷산 바위 아래에 둘 것이니 불가(佛家)의 법도에 따라 장례를 치루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불락인과’라는 한마디 때문에 여우가 되었던 사람이 ‘불매인과’라는 한마디를 듣고서 어째서 여우의 몸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는지, ‘불락’과 ‘불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석가모니 부처님께 와서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부처님이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대답을 하셨다면 부처님조차 여우의 몸을 받았을까요?
감히 저는 이렇게 이야기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인과에 떨어지고 안 떨어지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의심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치를 환히 아는 사람은 인과에 떨어진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그 도리도 모르는 사람은 “내가 말을 잘못 했나” 하고 자꾸 의심을 하게 되어 그 의심 하는 자체가 여우가 되는 것입니다. 즉 ‘불락’과 ‘불매’라는 말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미혹으로부터 생겨나는 의심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불매는 불락이니 불매니 하는 마음이 움직이기 이전의 근원적 상황에서 분별의 차원을 초월한 ꡐ불매인과ꡑ라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말이 떨어지기 이전의 자리를 바르게 쳐다보는 정법안목으로 공안을 바로 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해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9월 제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