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본인의 물음

이번 여름엔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로 두 차례 일본엘 다녀왔다. 전에도 들른 적이 있었지만 직접 일본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은 별로 없었다. 늘 글로서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일본과 일본 사람을 이해하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우리 학생들이 일본 ‘기우현’의 오오가끼시에 있는 오오가끼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집에서 이틀간 홈스테이를 하게되어 일본을 방문하여 직접 그들과 부딪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공식방문단에는 안내자도 통역도 없었다. 일본말은 전혀 모르고 영어도 수준 이하인지라 떠나기 전까진 솔직히 불안했다. 그러나 내심으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면 일본이 한자 문화권인지라 급하면 한자로 필담을 하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공식 행사인 시청이나 학교방문 등에는 그쪽에서 통역이 나와 별 문제가 없었지만 그 밖의 시간 내내 ‘반갑다, 고맙다’는 말 이외에는 서투른 영어를 구사하였고, 급하면 주머니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기가 바빴다. 나이가 좀 든 일본인들은 영어보다는 다들 한자를 쓰면 반가와 했다. 나도 그쪽이 훨씬 편했지만.

우리 일행이 주로 만난 사람들은 학교의 교장, 교감, 교류협력 담당자, 학생부장 등과 시청의 홍보과 국제교류담당 직원들과 시의 예산지원을 받는 국제교류협회 직원들이었다. 처음 나고야 공항에 도착할 때부터 떠나올 때까지 깍듯한 대우를 받았지만 방문단장이라는 이름이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하게 하였다.

나를 당황하게 한 일은 도착한 날 저녁식사 시간에 일어났다. 지금까지 오오가끼시와 창원시는 우호협력도시로 80여 차례 서로 민간과 시 차원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창원시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나로서는 부담 없는 식사자리로 알고 참석하였다. 참석자는 우리 일행 셋을 합쳐 일곱 명이었다. 문제의 사나이는 공항에서부터 가장 반갑게 우리를 맞아준 ‘이노우에’라는 국제교류협회의 차장이었다. 그는 인쇄된 것도 아닌 PC로 찍은 규격도 제 마음대로인 명함에다 서투른 한글로 ‘이노우에’라고 ‘토’를 달아서 내게 정중히(?) 건네 주었다.

잠시 후 술과 안주를 시켜놓고 이런저런 인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마른 체구와 약간은 긴 얼굴에 검은 테 안경을 끼고 있으면서 계속 웃음을 띄고 있더니만 뭘 좀 물어보아도 괜찮겠느냐고 한다. 자기는 언론이나 책을 통해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고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다고 했다.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했더니 이 친구가 가방을 뒤적이더니 자료를 한 뭉치 꺼내 옆자리에 놓고는 하나하나 물어왔다.

제일 먼저 작년 ‘한국-일본 월드컵’ 때의 신문기사를 내어 보이면서 한국의 길거리응원단과 붉은 악마들이 들고 있는 응원도구에 왜 KOREA가 COREA로 표기되었느냐 하는 것과, 정말로 일본의 대중문화의 유입을 한국에서는 법적 제도적으로 막느냐, 북한이 핵과 장거리 미사일 등을 갖는 것이 한국의 입장에서(동족인데) 위험을 느끼느냐, 오오가끼시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10년 전엔 천명에 가까웠는데 현재는 2백여명으로 줄었는데 왜 그렇게 줄었다고 생각하느냐는 등의 질문이었다. 질문 하나하나 마다 식탁 위에 자료를 제시해 놓고 이야기하는 점도 두려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같이 한국과 일본간의 민족감정과 자존심이 걸려있다는 점이다. KOREA의 C를 왜 일본이 K로 바꾸었는지, 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일본문화를 경계하는지, 북한의 핵무장을 왜 일본이 더 두려워하는지 등을 그가 듣고싶어하는 의도를 읽었기에 설명을 해주었지만, 재일교포들이 월드컵 이후 일본으로 귀화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우고자한 마지막 질문엔 자신이 없었다.

웃는 얼굴로 진지하게 물어오는 ‘이노우에 히데오’, 호텔로 돌아와 다시 그의 명함을 꺼내보니 한쪽 구석에 역시 한글로 ‘어서오세요’라고 적어 놓지 않았는가. 이 사람이야말로 일본인 중의 일본인이다. 한국인의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철저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사람이다. 두렵다. 부럽다. 쓸개도 배알도 없는 나와 같은 동족들이 어떻게 하면 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을까. 그보다는 언제쯤 내가 범세계인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나무관세음보살.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3년 9월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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