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靜山空萬籟沈 밤은 깊고 산은 비어 만상이 잠겼는데
寂寞燈下費孤吟 적막한 등불 아래 홀로되어 읊조리니
庭前唯有靑松韻 뜰 앞에 소나무가 우우우 소리 내어
添却騷人一段心 오히려 내 마음을 달래 주누나.
고요한 적막 속에 산속의 밤은 깊어졌다. 만상이 잠들어 있을 때 희미한 등불 아래 이 세상에 가장 외로운 사람 하나 있어 홀로 밤을 샌다. 그는 만상이 잠들어 있을 때 깨어 있기를 좋아 했다. 마치 야신(夜神)이 초대한 손님처럼 밤을 지키는 나그네가 되었다. 오늘 밤 따라 온갖 심회가 서린다. 산당에 앉아 있는 자신이 하나의 정물(靜物)처럼 느껴진다. 물아일여(物我一如) 속에서도 물아의 대화가 일어난다. 우우우 소나무 가지 사이로 송뢰가 일고 그것이 잠 못 드는 사람의 심중을 알고 어떤 화답을 보내는 것 같기만 하다.
하나의 정물이 되어 밤의 산을 지키면 어둠 속에 살아나는 침묵의 언어들이 있다. 산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우주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시원(始原)으 알 수 없는 태고의 원음 같은 것이 들려오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바로 자기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영혼의 모음일 수도 있다. 산이 깊으면 밤이 더 깊고, 밤이 깊으면 사람의 마음도 더 깊어진다. 바다의 밤과 사막의 밤이 산속의 밤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암추붕(雪巖秋鵬)이 남긴 설암잡저(雪巖雜著)에 수록되어 있는 이 시는 원제목이 야중즉사(夜中卽事)라 되어 있다. 한 밤중에 일어난 일이란 뜻으로 다분히 즉흥적으로 읊은 시상이 전개되고 있는 시이다. 선시에 보면 밤을 배경으로 지은 시들이 꽤 많다. 밤이 그만큼 시를 짓는 적시가 되는 것은 밤의 고요함과 작자의 고독이 잘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마치 세인들이 밤에 잠을 못 이루며 그리워하는 것이 있듯이 수도자들도 자기 내면을 깊이 응시하는 것은 아무래도 밤의 고요할 때가 더 좋기 때문이 아닐까?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8월 제9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