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돈을 빌려 쓰고 그것을 갚지 못하면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빚은 내가 갚아야 될 하나의 의무사항이 되어 거래상에서의 내 입장을 약하게 만들어 놓는다. 아무래도 빚을 진 사람이 빚을 놓은 사람보다 큰소리를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빚을 못 갚는 딱한 처지가 되었을 때는 채권자에게 시간을 연장해 달라는 등 사정을 하는 쪽은 언제나 채무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빚은 우선 내 입장을 약하게 만들면서 나를 근심하게 만드는 불안의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빚 없이 살기가 매우 힘들다. 아니 사회적 환경에서 볼 때는 우리 모두 빚을 지고 사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금전적 거래에서만 빚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남의 도움을 받을 때 그것을 빚이라 할 수 있고 생활 전반에 걸쳐 남의 신세를 지는 것은 모두 빚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 사는 일이 빚 없이 살 수가 없다. 공동의 운명을 갖고 사는 공공관계도 모두가 빚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가게를 차려 물건을 파는 사람이 물건 사로 올 사람을 기다린다. 사고파는 상행위를 하기 위해서 가게를 차렸기 때문에 물건 사러 오는 사람이 없다면 가게를 할 수 없는 것이다. 내 가게에 와 물건을 사 주는 사람에게 나는 빚을 지는 것이다. 그 사람 덕분에 내 가게가 유지 되는 숨은 사연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정치인을 뽑는다. 선거에 당선된 정치인들은 투표를 하여 자기를 찍어준 유권자들에게 빚을 지는 것이다. 지지해 준 사람들의 덕분에 당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각해 볼 때 이 세상은 빚지는 세상이요, 빚 갚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된다. 이를 수치로 계산하지 못하는 인연의 빚이라 한다. 사람은 인연의 빚을 지고 산다. 이 빚이 없다면 내가 살 수 없는 것이다.
근래에 나는 식도 역류증이란 병을 앓고 있다. 여름 내내 기침이 나고 가을이 되어도 감기가 낫지 않아 어떤 사람의 권유에 의하여 이비인후과에 가 검사를 하였더니 위산이 넘쳐 식도를 타고 올라와 성대를 때려 성대가 멍이 든 상태가 되었다고 했다. 원장님의 설명은 파도가 방파제를 때리는 것처럼 위산이 성대를 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말을 안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법이라고 했다. 두 달분 약을 먹고 있어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을 많이 하면 또 기침이 나고 음성이 갈아 앉는다. 나는 주로 경전을 강의하며 살아온 업 때문에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지금도 보통 1주일에 15시간 이상의 강의를 하면서 지낸다. 이곳 저곳 법회에 다니면서 강의하는 때도 많다. 그런데 어떤 법회에서 강의 부탁을 받았을 때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정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되어 정중히 거절을 하면 거듭 부탁을 해 오는 때가 있다. 부탁하는 사람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더 이상 사양거절을 할 수가 없는 경우가 생기더라는 말이다. 더구나 인간관계에서 맺어진 인연이 괄시할 수 없는 입장을 가져오는 수가 있는 것도 느꼈다. 이럴 때 나는 인연의 빚이란 말을 생각한다.
빚이란 어휘는 물론 부담스럽고 괴로움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오죽하면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꽃밭을 날아다니며 꿀을 핥던 기분 좋은 꿈을 꾸고, 깨어난 뒤에 빚쟁이가 빚 받으러 올 것이 걱정되어 꽃밭을 날던 나비가 현실이고 빚 걱정하는 사람이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의 고사가 나왔겠는가? 그러나 인연이 있다는 것은 빚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이 인연의 빚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이다. 논리로 말하면 빚은 갚으면 되는 것이고 갚도록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는 적어도 이 인연의 빚을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 못 갚아도 이 빚을 상기하고, 돈 떼 먹듯이 떼어 먹으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연의 빚은 나를 살려 주는 고마운 것이기 때문이다. 병든 환자의 몸이 수술을 받고 살아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세상은 인연의 아름다움으로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빚을 주고받는 사람의 마음은 본래 아름다운 것이다. 인연의 빚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얹어져 있어 잘하면 마음의 빛이 되고 인연이 빛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12월 제9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