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강의 일정 때문에 서울을 자주 다닌다. 울산역이 생기고부터 교통이 편리해져 KTX기차를 타고 가면 반야암에서 봉고나 승용차를 타고 나가는 시간까지 합쳐 3시간이면 서울에 도착한다. 3,4월에는 1주일에 3~4일씩 서울에 묵게 된다.
경복궁 옆에 있는 법련사에서 강의를 하다 가끔 쉬는 시간에 창밖을 내다보면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 속에 옥상에 심어둔 나무가 보이는 집이 있다. 빌딩의 숲을 이루고 있는 도시의 높은 건축 사이에 20여 층이나 되어 보이는 옥상에 누가 플라스틱 통이나 나무 상자 안에 심어둔 것인지 사철나무 한 그루가 푸른 잎을 달고 외롭게 서 있었다.
이 나무를 무심코 바라보다가 ‘왜 하필이면 그 넓은 땅을 두고 고층의 옥상에 너는 심어져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잘 못 정해 고층의 옥상에 심어져 있다는 게 나무의 불행처럼 느껴졌다.
물론 인위적으로 누군가 사람의 취향에 의해 옥상에 심어졌을 것이다. 삭막한 도시 공간을 나무 한 그루라도 심어 정서적 분위기를 좋게 하려는 노력의 흔적으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예로부터도 사람 사는 생활공간에 나무를 심어 놓고 살려고 하였다. 정원을 가꾸고 공원을 만들고 시내의 거리를 조경하는 일은 현대사회에 와서도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나무가 없는 세상은 곧 자연이 없는 세상처럼 보통 사람들의 생활의 정서를 빼앗아 가는 결과가 될 것이다.
중국 송대(宋代)의 소동파(蘇東坡: 1036~1101)는 “고기는 먹지 않고 살 수 있어도 집 옆에 대나무가 없으면 안 되겠다.” 하였다. 존재의 법칙을 연기법으로 설명하는 불교의 입장으로 말하면 사람과 나무는 동물과 식물의 대칭적 관계로 ‘동물이 없으면 식물이 없고, 식물이 없으면 동물이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래서 사람 사는 장소에 나무가 있게 하고 싶고 숲을 키우고 싶은 것이 인간의 정서적 바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명의 발달과 함께 도시가 발달 되고부터 사람들의 생활환경이 자연과 멀어지면서 정서적 빈곤증에 시달리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옥상에 심은 나무는 이 정서적 빈곤증을 치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수 있을 것이다. 옥상에 보이는 한 그루의 나무를 통해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도시인의 비애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록 인류의 역사가 문명의 개가를 노래하며 도시의 빌딩이 공중으로 높이 치솟아 올라도 나무 밑에 말없이 앉아 자기 삶의 문제를 생각해 보는 원시적 사색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야 인생의 의미가 바르게 살아나지 않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두고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무 밑에 태어나서, 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나무 밑에서 설법을 하고, 나무 밑에서 돌아가셨다.”
이 말은 곧 나무 밑은 부처님 탄생의 자리며 성도의 자리, 열반의 자리였다는 말이다. 불교에 있어서 나무 밑이 가지는 의미는 이처럼 중요하다. 나무 밑의 사색과 명상이 불교의 정서적 색채가 되었다. 또 초기불교 시절에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나무 밑에 의지하여 수행할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수행자에게 있어서 나무 밑은 집과 같은 것이었다.
때문에 나무 밑을 좋아하고 즐겨 찾는 사람은 곧 수도자의 자질이 갖추어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사람과 나무는 불가분리의 관계로 맺어지는 인연이 있음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나무를 멀리하고 사는 생활환경이 된다면 그야말로 급한 일 때문에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라즈니쉬는 “종교를 믿는 것이 숲속의 오솔길을 찾는데서 시작되는 마음이다.” 하였다. 사람의 주변에 나무가 많이 있으면 분명히 정서적 환경이 좋아질 것이다. 새봄을 맞아 올해도 나무를 심어야 하겠다.
해마다 반야암 주위에 나무를 사다 심곤 한다. 며칠 전에도 언양 장에 가 비싼 금송을 사오고 주목과 라일락을 사다 심었다. 나무를 심는 것은 내 꿈을 심고 희망을 심고, 식물에 대한 사랑을 심는 일이다. 또 아무도 모르는 내 인생의 슬픔을 묻어버리는 일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4월 1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