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솔길을 걷는 마음

우리가 사는 사회가 과거에는 농경사회였는데 어느새 산업사회로 바뀌고 이제 또 정보사회라는 말이 나온지도 이미 오래 되었다. 발달된 현대문명을 수용하면서 생활패턴이 많이 바뀌어졌다. 의·식·주가 고급화되고 이어 행문화(行文化)가 급속히 발달하였다. 사회 발전단계가 의식주 3건이 갖춰지면 다음은 행(行)이라고 중국의 손문도 말한 바가 있다.

행문화란 가고 오는 교통문화를 말한다. 사회활동을 하면서 오고 가는 공간이동의 반경이 점점 넓어지고 이에 소요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관광이나 여행을 하면서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도 옛날에 비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선진국일수록 국토 가운데 도로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고속도로나 철도 등 도로망이 좋아야 국토관리가 효율적으로 된다고도 한다. 우리나라도 전국이 고속도로로 연결되었다. 경부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하더니 남해안 서해안 고속도로도 등장하였다.

고속도로는 차가 많이 다니는 큰 길이며 속력을 내어 빨리 갈 수 있는 길이다. 수많은 물동량들도 이 길을 통해 수송이 되며, 산업의 동맥역할을 한다. 따라서 고속도로가 많다는 건 그 나라의 경제지수가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국력신장이 도로와도 관계가 있는 모양이다.

마이카 시대 라는 말은 이미 퇴조된 말이지만 주말이 되면 자가용 승용차들이 산골짜기 마다 들어와 장사진을 이룬다. 이제 산중의 암자들도 차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나 있어야 한다. 찻길이 없으면 일부 등산객을 제외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큰절에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차량이 밀려 교통이 혼잡하다. 하도 많이 밀려오는 차량들을 감당하기 위하여 산중에도 주차공간을 확보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세계 유수의 자동차 공업국으로 부상한 우리나라는 국토는 좁은데 차량은 날로 증가해, 도시 뿐 아니라 시골에도 주차문제가 골칫거리가 되어간다고 한다. 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치고 주차 위반에 걸려 보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차를 타고 가기는 가는데 내려 일을 보아야 할 때 차를 주차하기 위해 요금을 또 내어야 하는, 어찌 보면 매우 넌센스 같은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이것이 현대의 문화풍속이다. 몇 년 전 미국 뉴욕에 갔을 때 맨해턴의 어느 주차장에는 1시간 주차료가 100불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차를 이용하는 건 빠른 이동을 통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라고 할 것이지만, 한편 힘 안들이고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것이다. 차를 타고 가면서 음악도 듣고 TV도 본다. 시청각 문화가 사람의 이목을 어지럽게 하는 시대가 아닌가? 보아야 할 게 많고 들어야 할 게 많다는 것은 오관의 신경이 감지하는 대상이 많아 신경이 푹 쉴 겨를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이러한 바깥 경계를 향해서 달려가는 외부지향적 신경발사가 곧잘 내면의 건조를 가져와 버린다는 것이다. 창밖으로만 보내려고 하는 시선이 때로는 내부의 안정을 잃어버린다. 보지 않고 듣지 않을 때는 갑자기 공허해진 마음이 정서적 불안을 유발하는 것이다. 오관에 의한 감각적 자극이 감정의 충동도 가져온다. 엉뚱한 느낌이 일어나 우발적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수도 있다. 여과되지 못한 감정이 절제되지 못한 행동을 일으킨다.

어린이들의 경우는 정서적 성장 환경이 크게 달라졌다. 산과 강이나 들판, 또는 나무들을 보고 정서적 성장을 하던 시대가 아니다. 도화지에 자연을 보고 산을 그리며 하늘의 구름을 그리고 혹은 바다를 그리고 갈매기를 그리며 자라는 시대가 아니다. 매일 TV를 보아야 하고 컴퓨터로 오락게임을 해야 하는 환경이 되어버렸다. 그림을 그리라면 로봇과 인형을 그리는 아이들이 되었다. 나무를 그리고 하늘과 구름을 그리며, 바다를 그리는 아이들이 없어졌다. 이 모두 문화의 변화라고 보아야 할 사항들이다.

이른바 도시문화를 시멘트 문화, 아스팔트 문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층으로 지어진 즐비한 아파트 단지가 시멘트 문화이고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거리의 길이 아스팔트나 시멘트 길이다. 포장이 되지 않은 흙길을 걸어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흙길은 차가 다니기가 매우 불편하여 차를 쓰려면 길부터 포장해야 한다. 과학문명이 길을 탄탄하게 만들어주고 차를 타고 다니게 해 주었다. 집값 보다 비싼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질 좋은 물질의 소유가 생활의 만족도를 높여주는 행복지수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그러나 사람의 심성은 물질적 고급에 포장되지 않는다. 순수한 정서적 자연이 천연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에는 오솔길을 다니는 사색의 길이 있어야 하고 숲속의 옹달샘 같은 가슴 속의 샘물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라 해도 좋고 지혜라고 해도 좋은, 맑은 물이 솟아나는 심천(心泉)이 있어야 한다. 숲속의 오솔길을 걸으며 고독한 산보자(散步者)가 되어보는 것도 자신의 정서를 순화하는 일이 될 것이다.

라즈니쉬는 종교에 귀의하는 마음을 오솔길을 찾는 마음이라고 하였다. 사색의 원천을 놓고 말할 때 인생은 확실히 오솔길 인생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6월 제 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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