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인생을 아름다운 시(詩)로 남기다

인류의 역사 속에는 한 생애를 슬프게 살다간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개인이 처한 불우한 환경이 각양각색으로 있고 시대에 따른 사회제도 속에 수많은 역경을 본의 아니게 당하고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슬픈 생애를 산 사람들이 후세에 와서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기도 한다.

누구나 슬프고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들으면 때로는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는 수가 있다. 물론 남의 슬픔을 내 슬픔처럼 이해하고 동정하는 마음 때문에 그럴 것이다. 어떻든 사람이 살면서 감동을 할 수 있는 순간을 가지는 것은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코믹한 일에 웃는 것은 쉽지만 우리 마음에 순수한 감동이 와 닿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요 며칠 허난설헌의 시집을 읽었다. 조선조를 대표하는 여류 한시인(漢詩人)이었던 그녀의 생애와 시를 읽고 슬픔을 금치 못했다. 허난설헌 하면 소설 [홍길동]을 지은 허균의 누나였다는 사실은 제법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그렇게 슬픈 생애를 살면서 아름다운 시를 많이 남겼다는 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녀는 명문가의 집안에 태어나 어렸을 적에는 총명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미모에 집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자랐다. 오빠인 허봉과 동생인 허균이 글공부 하는 사이에 끼어 어깨 너머로 글을 배운다. 신사임당의 고향이기도 한 강릉에서 태어나 이름을 초희(楚姬)라 했으며, 난설헌은 그녀의 호이다. 타고난 문예적 자질이 뛰어나 8살에 한문으로 상량문을 지었다 한다.

집안과 교분이 있던 당대의 대시인 이달(李達)에게서 시를 배우며 남다른 시상詩想을 독창적으로 만들어 내는데 능했다. 15살에 시집을 가고부터 그녀에게는 불행이 시작된다. 시집살이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작은 벼슬에 나아갔으나 기방(妓房)을 출입하며 부부의 사랑을 지켜주지 않았다. 게다가 성질고약한 시어머니로부터 혹독한 학대를 받아야 했다. 친정마저 당쟁에 얽혀 화를 입고 몰락하고 만다.

이때부터 초희는 여자의 한을 시로서 달래며 산다. 설상가상으로 피붙이 아들과 딸이 어린 나이에 죽어버린다. 아들과 딸을 잃고 난 뒤에 지은 곡자哭子라는 시를 읽고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셨다.

아들과 딸을 잃고 _ 哭子

지난해는 귀여운 딸을 잃었는데 去年喪愛女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을 잃다니 今年喪愛子

슬프고 슬프다! 광릉 땅이여, 哀哀廣陵土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 雙墳相對起

사시나무 가지에 쓸쓸한 바람 불고 蕭蕭白楊風

도깨비불 무덤가에 어리어 비치네. 鬼火明松楸

소지올려 너희들 혼을 부르며 紙錢招汝魂

무덤에 물 한잔씩 부어 놓으니 玄酒奠汝丘

혼이라도 형제인줄 알긴 알겠지 應知弟兄魂

밤마다 서로 얼려 잘 놀아라. 夜夜相追遊

아무리 뱃속에 아이 또 가진다 해도 縱有復中孩

어찌 그 아이만 잘 자라기 바라겠는가. 安可冀長成

부질없이 황천의 말을 읊조리면서 浪吟黃臺詞

애끓는 피눈물에 목이 멘다. 血泣悲呑聲

이 시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의 슬픔을 공감하게 한다. 자식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 인생 전체의 슬픔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시에는 조선조의 엄격한 유교의 윤리의식에 묶여 억압당한 여권(女權)의 슬픔이 묻어 나오고 삶의 자유를 그리워하는 향수가 짙게 배여 있다.

천재시인 난설헌은 이처럼 애절한 시를 남기고 꿈꾸는 새가 되어 먼 하늘을 향해 날아갔는지 모른다.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한 생애를 마감했는데 죽을 때도 임신한 몸으로 죽었다고 한다. 얼마나 모진 인생에 대한 한이 남았으면 그랬을까. 임종에 임했을 때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다시는 조선 땅에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8월 1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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