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이 강원에서 배우는 ‘書狀(서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송나라 때의 임제종臨濟宗 승려인 대혜선사와 사대부 간에 주고받은 서간문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선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간화선(看話禪:公案禪)에 대한 독창적인 전개로 사상계(思想界)에 큰 영향을 끼친 매우 의미있는 서간문집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강원에서 서장을 읽다가 ‘선(禪)’의 미묘한 경계에 환희심을 내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선방으로 훌쩍 떠나버리는 학인들도 있었다고 하니 대혜스님의 심오하고 뛰어난 경지와 문장력에 새삼 감탄할 따름입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잠시 일전에 배웠던 글들을 되새기던 중 꽤 의미 있게 다가온 구절이 있어 몇 자 적어봅니다.
“근기가 날카롭고 뛰어난 이는 무엇을 이루고자 할 때
힘을 들이지 않고 마침내 쉽게 이루려는 마음을 내어
문득 수행하지 않고 대게 눈앞의 경계에 끄달려 본 마음을 주재하지 못하니,
이렇게 날이 가고 달이 깊어지면 미혹하여 돌이키지 못하다가
결국 도력이 업력을 이기지 못하게 됨이라”
우리들 개개인의 성격이 다르듯이 가지고 있는 근기 또한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그리하여 근기가 수승하여 조금만 기도하고 수행하여도 성취를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수행이나 기도에 있어 성취를 보기 어려운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저 또한 둔근기인지라 성취가 빠른 도반들을 볼 때면 늘 부러운 마음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저 스님은 전생에 얼마나 수행을 했기에 저렇게 빨리 성취가 되나?’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근기가 뛰어나고 똑똑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이 안다고 ‘관문상(늘 들었던 법문이라 하여 소홀히 하는 자만심)’을 내어 스승님과 도반들의 가르침을 가벼히 여기거나 ‘용이심(쉽게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내어 무엇이든 손쉽게만 이루고자 한다면 결국 신심에 바탕한 꾸준한 정진력을 잃어버리고 대상경계에 휘둘려 본심(本心, 근본 마음자리)을 놓쳐버릴 수 있습니다.
본심을 놓쳐버리게 된다면 모든 것을 자기 근본마음 자리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탐진치 삼독심이나 아만심, 집착심, 의구심이 만들어낸 업業의 자리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지혜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면 자기 주관적인 시각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시각, 즉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자신의 욕심과 집착, 어리석음으로 덧씌워진 ‘자기생각’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이 바로 업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업이란 불자님들도 다들 잘 아시고 계시듯이 욕심내고, 화내고, 어리석은 세 가지 독한 마음을 몸과 말과 생각을 통해 짓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에 대하여 대혜선사는 “도력이 불승업력이라(도력이 업력을 이기지 못하게 된다)”고 하여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남들보다 조금 나은 위치에 있다고 하여 사람이나 대상을 무시하고 가벼히 여긴다면 결국 업보의 굴레에 빠져들 것이며, 반대로 나의 주변상황과 능력이 남들보다 못하다고 퇴굴심을 내어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려 하거나, 기도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목적지가 지척에 있는데도 어리석게 주저앉아 버린다면 이 또한 업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일만 참으면 인간 몸을 받을 구미호는 ‘늘 그렇듯이’ 마지막 단 하루를 참지 못해 인간의 몸을 받지 못합니다. 밤길을 열심히 달려가다 포기하고 주저앉았더니, 다음 날 아침 목적지가 바로 앞에 있었음을 깨닫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물은 99도가 아닌 100도에서 끓으며, 또한 1도가 아닌 0도에서부터 얼어버립니다.
늘 깨어있는 마음과 불퇴전의 정진심으로 기도하는 불자님들이 되십시오. 아만에 물든 관문상이나 쉽게 이루려는 용이심,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믿지 못하는 퇴굴심은 곧 우리 본마음에 갖추어진 도력(道力)의 무한한 가능성을 무너뜨리고 괴로운 업력(業力)의 굴레에 윤회하게 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낳습니다.
“달구어진 정진의 무쇠 솥에는
시련의 눈송이가 닿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 버립니다.”
정진합시다!
신경스님, 월간반야 2010년 10월 제1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