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김밥장수

요즈음은 서울 가는 일이 잦다. 주마다 수요일이 되면 올라간다. 목요일마다 불교TV 무상사에서 법문이 있고 금요일 저녁에는 패엽회 강의가 있어 수요일 가서 토요일 내려오는 것이 주마다 되풀이 된다. 스님들끼리 농담을 할 때 서울 사는 스님들을 ‘首都僧(수도승)’이라 하는데 수행정진 잘하는 도를 닦는 스님인 ‘修道僧(수도승)’이라는 말과 한글 발음이 똑같아 서울 살면 저절로 도를 잘 닦는 수도승이 된다는 우스갯말을 하는 수가 있다. 나도 이제 일주일에 반 이상을 서울에 사는 수도승이 된 셈이다.

토요일 내려올 때는 언제나 7시 KTX를 탄다. 보통 역에 6시 40분쯤 도착하는데 이때 택시에서 내려 역 청사 안으로 들어갈 때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열심히 김밥을 사라고 외쳐대는 한 아가씨를 본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아직 20대로 보이는 젊은 이 김밥장수 아가씨를 볼 때마다 나는 무언가 감동 같은 것을 받는다. 이른 아침부터 김밥을 가지고 나와 하나라도 더 많이 팔아보려고 외쳐대는 목소리를 들으며 우선 이 아가씨의 생활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낀다. 용모도 꽤 예뻐 보이고 세련된 몸짓으로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손님들을 향해서 음악소리처럼 자기 목소리를 힘들이지 않고 발성하고 있는 폼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집에서 갓 만들어온 따끈따끈한 김밥 사세요. 맛있습니다.”

열심히 외쳐대는 이 목소리에 나는 하나 사주지 않는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내가 볼 때는 김밥을 사는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도 장사가 되는지 역에 올 때마다 아가씨는 같은 자리에서 열심히 자기 김밥을 선전하고 있었다.

장사를 하건 무엇을 하건 사람이 특별나게 하는 행위에는 어떤 동기나 사정이 있을 것이다. 새벽에 김밥을 만들어 역으로 달려와 팔려는 사람은 부자가 아닌 가난한 사람에 속할 것이다. 이 아가씨로 말하면 결코 부잣집 딸은 아닐 것이고 어쩌면 가정환경이 불우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정을 하건대 부모 중에 누가 병석에 있거나 혹은 없어 처녀가장이 되어 있는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의 신상 사정이 어떻든 간에 내 눈에 비친 이 아가씨의 모습은 열심히,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체의 건강과 마찬가지로 사람 누구에게나 생활의 건강, 삶의 건강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건강한 생활을 해야 한다. 힘든 일이라도 떳떳하게 정성을 들여 열심히 하는 것이 건강한 생활이다. 환경이 불우해도 어떤 열등감이나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밝은 마음으로 불만 없이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야말로 개인의 생활이 건강한 것이요, 이런 사람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람 사는 생활에는 꼼수라는 게 원래 없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속이거나 부당한 방법으로 개인의 이익을 남몰래 취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꼼수다. 사회적 도덕을 무시하고 윤리를 어기면서 살아봐야 나쁜 업을 지어 좋지 않는 과보가 올 때를 미리 만들어 놓는 것일 뿐이다. 삶에는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도 분명히 하나의 진리로 간주할 수 있는 말이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불우한 장애인으로 일생을 살면서도 인간 승리의 한 모델로 추앙 받는 미국의 헬렌 켈러 여사는 맹인을 위한 점자를 발명한 후 어느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이 만약 이 세상을 바로 볼 수가 있다면 무엇을 제일 먼저 보고 싶은가요?”

이때 헬렌 켈러는 우선적으로 세 가지가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다.

“첫째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고마운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고, 둘째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이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고 싶고, 셋째 가장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보고 싶다.”

눈 먼 사람이 그렇게도 보고 싶어 했던 이 세 가지를 눈 뜬 사람들은 눈이 뜨였기 때문에 오히려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집에서 갓 만들어온 따끈따끈한 김밥 사세요. 맛있습니다.”

가끔 내 귓가에서 서울역 김밥장수 아가씨의 목소리가 메아리 칠 때가 있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12월 1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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