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의 집에 초상이 났다. 그 집의 호주였던 거사님이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끝내 운명해버린 것이었다. 부인이 독실한 불교신자였는데 어느날 스님을 찾아와서 눈물을 글썽이며 천도재를 의논하는 중에, 돌아간 남편에 대해 여러 가지 회상을 하다가 이런 말을 하였다.
수족이 마비되어 거동을 못한 채 5년을 식물인간처럼 방안에 누워지냈는데, 그새 간병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어서 쾌차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정성껏 간호를 하다가, 3년이 지나도 일어나지 못하기에 차라리 못 일어날 바엔 어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도 들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돌아가고 보니 산송장처럼 있더라도 죽지는 말고 집에 있어주었으면 고맙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가족끼리 함께 사는 가정에 있어서 식구들이 있는 자리는 공간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있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였다. 사실 사람이 살아 차지하는 자리는 공간적인 자리가 아니다. 누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는 지리적 장소보다는 한 사람의 존재가 정신적 지주가 되거나 사랑의 지주가 되어 주위의 의지처가 되어줄 때, 그 자리는 실로 우주의 공간보다도 더 큰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의 자리에 이상이 생기고 있다. 무슨 말이냐? 사람이 처한 자리에 존재의 의미가 분명히 살아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인가? 그것은 사람 사는 것이 인간다운 본분에서 많이 이탈된 이상증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데도 많은 모델이 있다. 이 모델이 어떤 분야이건 이상적 모범을 시범해 주어야 하는데 그 시범이 없어지고 있는 판국이다. 따라서 사람이 지켜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위상(位相)이 실추되고 비인간화가 초래된다. 이것은 물론 과학문명의 발달 내지는 산업화나 기계화의 후유증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인간이 자기 삶에 대한 참가치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보사회에 접어든 기술발전은 인간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반인륜적 작태를 서슴없이 연출한다. 생명공학이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배아복제가 시도되고, 이미 낙태 등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행되며 마치 낙태가 인간의 권리인양 착각되고 있다. 유물론적 인생관에 사로잡힌 물신숭배와 도덕윤리에 대한 불감증은 비인간화를 재촉하는 인간의 위기임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아예 무관심하거나 자포적인 심리로 될대로 되라 하고 방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서도 인간 소외의식에 스스로 빠져 이유도 모르는 채 남과의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불안해하고 초조해 한다. 자기 인생의 주체는 상실하고 남은 어떤가 하고 남을 의식하면서 타인지향적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문제를 남이 하는 식으로 모방만 해 살아가려는 이 서글픈 현실이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자기 인생의 고유성을 묻지 않는다는 말이다. 삶의 근본적인 의미는 상실한 채 스포츠, 오락, 술, 섹스, 심지어 마약에 탐닉하면서 불행하게도 자신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인간 본연의 자리에서 이탈된다. 예를 들면 인연 속에 맺어지는 인간의 관계를 두고 말할 때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어머니가 어머니답지 못하며 남편이 남편답지 못하며 아내가 아내답지 못하다는 말이다. 부모에게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고 모든 인간의 신분상에서 결격의 요인이 자꾸 생기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제 자리를 벗어난 자리 이탈이다. 이 이탈자들의 세상은 자기 절제를 잃어버리고 천박한 충동에 휩싸여 아무렇게나 행동하여 행실에 도덕적 모범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하여 인간의 격을 무너뜨리는 장본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것은 정신적 자세이다. 달리 말하면 도덕적 자질에 있다. 인간의 정신이 위대한 것은 자기 억제와 금욕을 행할 수 있는 의지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수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성 회복은 수행으로 이루어진다. 수행하는 자세야말로 나를 나답게 하고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인간을 학습적 존재라고 한다. 배워 익혀서 스스로의 자기 인물을 정신적으로 형성하여 키워 가는 것이다. 무엇을 배우는가? 자기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의 공덕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내가 내 자리에 바로 앉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3년 12월 제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