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이 나라는 온통 붉은색이다. 적어도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는 풍경은 그렇다. 이 거대한 쇼를 연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회심의 미소를 지을 만도 하다. 그러나 50여년전 6·25를 겪은 세대나 그날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솔직히 섬짓함을 느낀다. 물론 긍정적인 면을 전적으로 부인하자는 뜻은 아니다. 이따금씩 손뼉치고 소리도 지를 줄 안다. 그러나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일들이 붉은 물결에 가리워져 적당히 처리될까 두려운 것이다.
얼마전 중국과 브라질의 축구경기가 서귀포에서 벌어지던 날 중국에서도 우리나라의 광화문이나 시청앞 광장에서처럼 대형 화면을 설치하고 축구 경기를 시청하는데, 도중에 당국에서 이 시설을 철거하여 화가난 군중들이 난동을 부렸다는 외신을 들은 적이 있다. 알고 보니 이 외신은 중국의 정규 언론사들이 취재하여 전한 것이 아니라 한 ‘네티즌’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중국과 같이 거대한 국가 권력에 의해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역사를 이끌어 온 나라의 힘도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거센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의 출발은 네티즌이란 시민계급으로부터 출발되었다고도 한다. 1990년대 초반 마이클 허번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이 네티즌(netizen)은 인터넷 위에서 공통적인 관심사를 가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며 새로운 공동체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 네티즌은 정보통신이라는 새로운 기술환경 즉 기술의 혁신으로부터 태동한 것이다.
전통적인 시민사회가 산업사회의 기반에 부르조아적 실체를 바탕으로 사회내적 존재로의 사회적 책임감과, 이성적 판단, 합리성과 계몽주의에 기초해 사회를 형성하는 집단이라면 네티즌은 기술연관적 존재로서 기술에 기초해 기술이 만든 공간에서 활동한다. 그들은 기술연관적 가능성과 행위의 틀 안에서 그들만의 세계에서 활동하면서 전통사회, 시민계급에 도전하고 있다.
문제는 네티즌의 세계가 상호작용성과 익명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회적 공통성보다는 전문화되고 기호화된 취향과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욕구의 분출로 이어지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사회라는 공통성보다 개인적인 가치를 우선하기 때문에 그 기능에 회의를 갖는 경우가 많다. 그들 스스로는 공개된 사회속으로 나와 떳떳하게 참여하는 것 보다 재미와 이익을 따라 네트를 즐기며 그 속에 빠진다. 그렇다면 네티즌은 사이버 공간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개인적 욕망의 분출구가 아닌가.
그러나 인터넷 등장의 가장 큰 효과는 뭐니뭐니해도 사회투명성의 증대라고 본다. 인터넷을 통해 사회구조가 바뀌고 분열 효과를 가져 왔는가 하면 구조적 규범성, 중앙집권적 통치,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고발, 시공간의 단축, 독과점 기업구조의 파괴, 유통질서의 단순화, 정보와 기술의 확산, 사회적 관심사에 대한 참여의 유도 등 과거의 성역을 무너뜨리는 선각자, 선도자의 역할도 한다.
이제는 네티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사이버 공간에서 나름대로의 여론을 형성하여, 기업이 흥망하는가 하면, 다양한 정치체제를 실험하고, 새 정치세력을 탄생시키는가 하면, 새로운 세계를 여는 등 보다 긍정적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데 기여할 것을 기대해 본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2년 7월 (제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