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학스님─기도발이 왜 안 받는가

기도발이 왜 안 받는가?/2007,산림기도 회향 법문

-우학스님-

오늘 설판기도 회향에 즈음해서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금강경 ‘능정업장분 제십육 부분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부차수보리 선남자선여인 수지독송차경 약위인경천 시인 선세죄업 응타악도 이금세인 경천고 선세죄업 즉위소멸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거기까지 보시겠습니다.

설판기도 올리면 드리는 ‘일일명상록’은 다들 받으셨지요? “네” 오늘 양력 3월 12일자의 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남의 단점을 즐겨 비방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의 단점이 된다.” “아침에 보고 오셨습니까?” “네” 이걸 화장대나 책상 위에 두고 하루에 한 편씩 꼭 명상을 하시기 바랍니다.

참선과 명상을 서양에서는 ‘meditation’이라고 해서 다 같이 씁니다만, 동양쪽에서는 좀 다르게 구분해서 씁니다.

‘참선’은 오로지 화두를 챙기거나 부처님을 열심히 외우는 수행으로 보고 ‘명상’은 자기식대로 여러 번 반복해서 생각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건 ‘일일명상록’이니 꼭 하루에 한 편씩 되씹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설판기도’란 일반기도와는 좀 다르고 좀 더 기도를 가일차게 용맹정진 하듯이 한번 해보자 해서 다부지게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기도기간도 길고 또 마음가짐도 좀 달라야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를 하면 백퍼센트 성취되는 것은 분명한데, 성취가 안 될 때도 많고 기도중에 우환이 생기는 수도 또한 많습니다.

그렇다면 기도 성취를 하는 방법들은 많이 얘기를 했는데 기도 성취가 안 되고 오히려 기도중에 가정이 시끄럽거나 또는 일이 참 안 될 경우가 있는데 왜 그런가 역으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기도발이 안 받는가? 첫째, 과거 전생의 업장이 너무 두터워서입니다.

(과거 전생의 문제)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건강의 경우에 있어서도 과거 전생에 지은 업장이 두터워서 건강이 현재에 와서 좋지 못한 사람이 있어요.

과거 전생의 일이었기 때문에 지금 감당하기가 대단히 힘이 듭니다.

어릴 때부터 장애아로 태어난다거나 또 성장해서도 딴 사람들보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늘 조심해야 됩니다.

늘 조심할 수밖에 없어요.

조심하지 않으면 본인이 고통스러운 거지요.

저도 늘 기관지가 약해서 찬물 같은 거 안 마시고 따뜻한 물 마시고, 만일에 조심하지 않으면 금방 기관지가 상하고 감기가 오고 그렇습니다.

제가 쭉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기관지가 약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조심을 하지요.

겨울 같은 때나, 심지어 기온차가 심한 여름 때조차 자면서 마스크를 착용합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참 별스런 사람이다’ 싶을 때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감기에 걸려서 애를 먹어도 내가 워낙 조심을 하니까 큰 독감 같은 건 잘 안 오고 어쩌다 지나가는 감기 정도는 걸리지요.

그게 바로 제 스스로 늘 조심하고 단속하기 때문에 선천적으로는 좀 약하지만, 가볍게 가볍게 지나가고 크게 아프지는 않더라 그런 얘깁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자기 업장은 자기가 알아요.

대충 나는 복이 어디쯤 되는지…

사는 모양을 보거나, 가족들과 친구들 또는 이웃들이 자기를 대하는 걸 보면 자기가 얼마나 선근종자가 있는지, 과거전생부터 복을 짓고 살았는지 그게 스스로 느껴집니다.

자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스스로 생각했을 때 ‘내가 과거 업장이 좀 두텁구나’ 이런 생각이 들거든 기도를 다부지게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보면 잘 안 해요.

잘 안 할 뿐만 아니라 보면 ‘팔자대로 살지 뭐’ 하면서 숫제 안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팔자대로 살 것 같으면 나는 이미 호흡기가 망가져서 벌써 죽었을 겁니다.

그것처럼 그냥 막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 업장이 두텁다 싶으면 열심히 기도를 해야 돼요.

아까 읽으셨던 ‘능정업장’ 이라고 하는 금강경 제십육분은 ‘업장을 능히 맑히는 대목’인데 제가 한글로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수보리야,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며 읽고 외우는데도 만약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면 이 사람은 전생에 지은 죄업으로 마땅히 악도에 떨어질 것이지만, 금생의 사람들이 업신여김으로써 전생의 죄업이 모두 소멸되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바로 여기까지 아까 보셨습니다.

“내가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열심히 수행을 하는데도 왜 내가 사람관계가 힘들고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드냐?” 그나마 기도하니까 이 정도로 그쳤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벌써 악도(惡道)에 떨어질 것이었다, 그런 얘기를 하고 있어요.

내가 기도를 하는 중에 자꾸 어려운 일이 닥치면 ‘아, 내가 기도를 함으로써 그래도 이나마 다행이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셔야 돼요.

설령 그것이 죽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아, 내가 기도를 하니까 내가 이 정도로 그냥 죽는구나.’이렇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둘째, 기도의 양보다 현재에 짓는 업이 너무 커서 그럴 때가 있습니다.(현재의 문제) 제가 잘 아는, 타지에 사는 인격이 훌륭한 어느 보살님이 계십니다.

자기가 어떤 사람에게 많은 돈을 떼였고 결국 그 사람은 감옥에 가게 됐습니다.

교도소에 면회를 가서 분하고 화가 안 풀려 면회 중에 “너는 정말 나쁜 여자다.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의 돈을 가로채서 고통을 줄 수가 있느냐?” 고 했답니다.

보살님이 다른 종교를 믿는 그 사람에게 “너는 거기 가서 기도 할 때 남 돈을 떼어 먹을 그런 기도를 했느냐?” 고 화가 나서 퍼부었단 겁니다.

현재의 큰 악업(남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은 악업이지요)의 무게가 너무 커서 현재의 기도가 감당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즉, 현재에 내가 하는 기도의 양보다 현재의 업이 너무 두터워서 어려운 일이 자꾸 닥치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셋째, 기도하는 것이 시원찮아서 그렇습니다.

즉 기도 방법이 바르지 못하거나, 기도도량이 바르지 못하거나, 기도를 처삼촌 벌초 하듯이 다부지게 하지 않아서 기도발이 잘 안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전생의 문제가 되었든지, 현재의 문제가 되었든지, 또는 기도를 다부지게 안 해서 그렇든지 간에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즉 어떻게 하면 현재 기도발이 잘 받아서 행복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현재의 내가 바로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현재 열심히 다부지게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것 밖에 다른 대안이 없어요.

하여튼 아까 세 가지로 인해서 일어난 문제는 다른 방법이 없고, 현재 숨 붙어 있는 순간까지, 다음 생까지라도 열심히 기도정진 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 됩니다.

오늘 설판기도 회향이라 했는데 21일 기도를 함에도 불구하고 일이 잘 안된다면 아까 말씀 드린 세 가지 이유 중의 하나 때문입니다.

일 년 내내 기도를 할 생각을 해야 돼요, 일 년 내내.

그러면 오히려 조금씩 있는 가정사의 어려움 정도는 기도가 있음으로써 자기 마음 닦는 수행이 같이 되는 거니까 오히려 마장인 그것이 약이 돼요.

절대 그것을 “내가 기도하는데도 왜 이렇게 어렵나?” 그런 생각을 절대 하시지 말고, “이게 나한테 주어진 기도의 소재다, 기도 숙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하신다면 살면서 부딪치는 조금의 난관은 절대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제가 기관지가 안 좋고 위가 안 좋을 때도 있기 때문에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먹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건강한 측면이 있어요.

만약 너무 건강하면 ‘막행막식’하기 쉽고, 그런 사람의 건강이 부서질 때는 한꺼번에 부서집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복도 그와 같습니다.

늘 기도하면서 조심하면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설령 과거 전생에 지은 복이 없다 하더라도 지금 나의 기도의 힘, 나의 조심하는 삶의 정성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행복된 삶을 살게 하는 하나의 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판기도 회향을 하면서 그동안 기도는 열심히 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21일 기도에서 끝내지 말고 꾸준히 일 년 내내 기도를 하시고, 일 년 끝나면 또 일 년 닥치니까 또 기도하고 이렇게 해서 우리 남은 생 동안 열심히 기도하는 삶 되시길 바랍니다.

관세음보살

우학스님─기도는 즐거워야한다

기도는 즐거워야 한다

-우학스님-

불교의 일부 교의(敎義)에서는 인생을 부정적으로 보는 면이 없잖아 있다.

이 세상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고 인간의 사대(四大)육신은 모든 오물(汚物)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방법에도 부정(不淨)의 관(觀)이 요구됨으로써 다분히 불교가 소승적인 염세주의의 늪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수행과정에서의 이런 부정관이 전혀 무익하고 쓸모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 본래의 대승적 견지에서는 재고할 점이 많다.

궁극을 가르치는 법화경, 화엄경 등 대승경전에서는 이 세상을 아름다은 연화장(蓮華藏)세계로 보고 있다.

스스로 눈을 뜨고 보면 연꽃과도 같은 눈부신 세상이 펼쳐져 있음을 가르친다.

따라서 대승불교에 있어서는 그 수행의 방법론도 부정관이 아니라 자비관(慈悲觀)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자비관이란, 기도할 때 관세음보살님 등 한없이 자애로운 불보살님의 상호를 머리속에서 놓치지 않고 관(觀)하는 것이다.

신라시대 의상스님은 백화도량 발원문에서 자비관을 ‘세세생생 관세음보살님을 머리에 이고 다니겠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비관의 수행을 하다보면 관세음보살님의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눈길이 그 마음 가득 부처님으로 채워진다.

따라서 자연, 마음이 즐거울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해오던 나름대로의 기도가 특별한 주제가 없었던가 또는 기도 중에는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고 짜증스러웠다면 이 자비관의 기도를 해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일이 즐겁지 않으면 능률도 떨어질 뿐 아니라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도 못한다.

특히, 기도는 하루 이틀 하다가 말일이 아니므로 억지나 오기를 부려 마지못해 하다보면 오히려 삶의 스트레스가 되기 쉽다.

기도 중에 나타나는 마장의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단, 기도는 좋아서 해야 한다.

자비관의 기도는 부처님을 머리속에 생각하는 관법(觀法)이므로 직접 부처님을 뵙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부처님을 관한다면 곧 부처님이 늘 자신과 함께 하시는 일이 되므로 세상의 어떤 경우에 놓이더라도 두렵지 않다.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현실이 더없이 훌륭한 수행과목으로 느껴진다.

기도가 공부 못하는 아이들 앞에 놓여진 밀린 숙제가 되어서는 안된다.

기도에 질질 끌려 다니다 보면 기도자는 언제나 어려운 상황아래 놓인 듯 착각한다.

즉, 기도자가 기도의 주체가 아니고 그 상황들이 주체가 되어 곧 잘 헐떡거리게 된다.

수능시험이 끝나면 법당이 썰렁한 경우가 그렇다.

기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도에 임하는 자세때문에 복을 쫓아가는 기복의 형식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내가 스스로 기도의 주인공이 되고, 기도가 늘 즐거우려면 그 수행방법이 긍정적이어야 한다.

늘 자비스러운 부처님을 생각하는 이 자비관의 기도는 관음기도에서 특히 좋은 수행법이다.

처음에는 늘 부처님 사진을 갖고 다니면서 ‘부처님 떠올리기’ 수련을 해야 한다.

어느 단계에 올라서면 기도는 마냥 즐겁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환희지(歡喜地)에 올라선다.

어쨋든 기도는 즐겁게 해야 한다.

우학스님─기도는 오로지 한 부처님으로

기도는 오로지 한 부처님으로

-우학스님-

불교적 기도는 다양하다.

여기에는 사경,독송,정근,다라니주력 등이 있다.

그런데 기도라고 하면 주로 같은 부처님 명호를 반복해서 외우고생각하는 정근 기도를 말한다.

정근 기도를 할 때 주의할 점은 여러 부처님 명호를 많이 섞어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어느 신도님과의 상담 중에 1시간 정근기도를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부처님 명호를 몇 십분 씩 배분해서 염 하는 이야기를 듣고 아연실색한 적이 있다.

듣다 보니 나름대로 일리는 있었다.

가정에 평안을 위해 관세음보살 정근을, 자녀 학업성취를 위해 문수보살 정근을, 돌아가신 이의 천도를 위해 지장정근을, 내세 극락 가기 위해 아미타불 정근을, 옆집 아주머니가 하니까 남묘호랑개교를 한다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다 보면은 불현듯 다른 부처님께 미안하기도 하고 혹시나 여타의 부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으면 어떻하나하고 불안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을 저 희랍의 신이나 우리 인간들처럼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나오는 괜한 망상들이다.

불교는 다신교가 아니다.

여러 부처님 명호가 있다고 하여서 그런 부처님들이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신들의 존재처럼 계시는 것이 아니다.

단지 화신의 이름일 뿐 실제적인 모습으로 계시는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즉 용처에 따라 때로는 관세음보살로 때로는 지장보살 등으로 나투신다.

형상을 떠난 참 부처님의 끝없는 화현이므로 어느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던지 결국에는 진리이신 법신불을 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정근 기도를 한답시고 한 마음 한 부처님으로 몰입하여 들어가지 않고 이분 저분의 부처님 명호를 찔끔찔끔 부르다 보면 마음이 흩어져서 선정력 즉,삼매의 힘을 얻을 수가 없다.

우리의 세포는 7년이면 완전히 바뀐다는 학계의 학설에 맞추어 만일 7년 이상 외우면서 기도한 부처님 명호가 있다면 누가 뭐라고 하던지 오직 그 부처님 이름만 불러야지 다른 제삼자의 불필요한 예기를 듣고 헷갈려서는 안된다.

거듭 말씀 드리자면 기도는 오직 화두 일념으로 참선하듯이 한 부처님으로 밀어 붙일 일이며 욕심을 부려 온갖 부처님 이름을 총동원 시켜서는 곤란하다.

어느 부처님 이름을 부르든지 결국에는 광명 그대로 계신 법신불께 귀결되고 자연스레 상황에 따른 가피를 입게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 불교에서는 주로 관세음보살님을 많이 신앙하고 있는데 이는 신행 편재상 아주 바람직하다.

아이들도 줄줄 외는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님이 바로 관세음보살이요, 무슨 기도든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그 유명한 천수경이 관음 신앙의 결정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