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각종 법회와 재

3. 각종 법회와 재 불자들은 사찰에서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으로 열리는 각종 법회나 재에 참여함으로써 부처님 말씀을 듣고 신행생활을 더욱 공고히 다지면서 수행과 기도 공덕을 쌓아나갑니다. 특히 재가 열리는 날에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불보살님이나 영가에게 공양물을 올리고 그 가피력으로 소원을 빌며 공덕을 닦아왔습니다. 재란 불보살님이나 스님, 그리고 선망 부모 등에게 공양물을 베풀고 그분들의 은덕으로 바라던 바 소원을 성취하거나, 궁극적으로 업장소멸이나 정토왕생 내지는 불보살 친견을 간구하는 법회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보시 공덕의 특별한 가피력인 셈입니다. 특히 불법승 삼보 중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을 불공(佛供)이라 합니다. 이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의 표시로 올리는 모든 물질적 정신적인 행위를 일컫습니다. 예불도 부처님께 귀의하며 그 공덕을 찬탄하며 올리는 정신적 행위이므로 이 불공의 범주 내에 들어갑니다. 전통적으로 부처님께 올리는 대표적인 공양물로 향ㆍ차ㆍ등ㆍ꽃ㆍ과일을 들지만 쌀이라든가 돈을 올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요즘은 부처님에 대한 공양인 불공으로부터 공양물을 올리고 치루어지는 각종 행사, 즉 기도, 불교 기념일, 천도제사, 기타 법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매달 절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관음재일ㆍ성도재일ㆍ약사재일이 그렇고 석가모니부처님의 출가재일, 성도재일, 열반재일과 조상님을 천도하는 우란분재ㆍ49재ㆍ천도재, 물이나 육지에서 외롭게 떠도는 혼령을 위로하는 수륙재, 후생에 복된 삶을 위하여 전생인 현재에 미리 닦아나가는 생전예수재 등이 그렇습니다. 여기서 각종 재 의식에 즈음하여 공양을 올릴 때, 우리 불자들이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와 내 것이라는 자아의식과 집착을 버리고, 오로지 부처님을 향하여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바치는 마음으로 공양을 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것이 일상 속에서 이웃에게 보시하는 행위로 이어진다면 그야말로 값진 공양의 실천이요 훌륭한 또 하나의 재의 형태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방생법회는 갇혀 있는 생명을 살리는 운동으로서 생명 해방운동이요, 생명살리기 운동이며 궁극적으로 환경보호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외래어종을 방생하여 오히려 생태계를 파괴시키거나 잘살고 있는 물고기를 잘못된 환경에 풀어주어 오히려 죽게 만드는 폐해를 낳기도 하는 형식적인 방생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2. 집성제

2. 집성제 그러면 왜 이렇게 모든 존재들이 고(苦)의 상태에 있는가? 존재하려고 힘들이는 것은 갈애(渴愛)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갈애로부터 번뇌가 생깁니다. 갈애가 있기 때문에 윤회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무명에 의해 고(苦)가 발생하는 과정을 열 두 가지의 인과의 고리로 설명한 것을 12연기라고 합니다. 인간의 감정, 욕망, 질병, 충동, 노쇠, 질병, 죽음 등은 하나의 현상입니다. 이 현상은 어떤 원인에 의해 생성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커다란 인과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또한 생성소멸 한다는 연기의 법칙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고(苦)도 그것을 일으키는 원인과 조건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2. 육바라밀의 실천

2.육바라밀의 실천 이러한 여러 가지 수행과 기도 외에도 행복과 해탈에 이르는 길로서 불교에서는 다양한 실천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8만4천 법문이 모두 그 내용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중에서 육바라밀(六波羅蜜)은 대승불교의 보살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6섯 가지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간명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육바라밀이란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반야(般若) 바라밀을 말합니다. 첫째 보시란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베푸는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말을 베풀어 괴로움에 빠진 이웃의 마음에 평화를 주며, 물질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재물을 베풀어 기쁘게 해주며, 진리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는 감로의 법문을 내립니다. 이름하여 나의 지식, 나의 재산, 나의 사랑, 나의 말, 나의 모습 그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나의 존재 자체가 세상에 평화를 주는 밑거름이 되지요. 자비의 실천은 이런데서 나오기 마련입니다. 둘째 지계란 계율을 지키며 잘 간직하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올바로 행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스러운 말이나 폭력을 행사하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며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는 도덕적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셋째 인욕이란 참고 감내하는 행위입니다. 어떠한 고난이 닥치거나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굴하거나 성내지 않고 그것을 끝까지 인내하면서 극복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성내지 않고 길게 용서하며 참아내는 행위는 내 마음은 물론 이 사회를 조화와 평화로운 상태로 이끌게 됩니다. 넷째 정진이란 끊임없는 불굴의 노력을 말합니다. 적당히 쉬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흐트러짐이 없이 마음과 몸을 다해서 움직이며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보면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나가는 것이며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일체의 망상을 접고 쉼없이 마음을 다하여 정신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선정이란 정진을 통해 마음이 어느 한 대상에 집중되어 통일된 상태를 일컫습니다. 그렇게 통일된 상태에서는 나도 잊어버리고 상대도 잊어버립니다. 그저 맑고 순순한 의식만이 살아 숨쉴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순간에 사태를 아무런 가감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물의 실재를 정확히 응시하는 지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를 여섯 번째 반야(般若)라 합니다. 이러한 반야의 지혜로 관조하여 나와 너의 분별, ‘나’라는 의식조차도 떠나기 때문에 보시를 함에 있어서도 무차별적 보시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요 인욕행을 실천함에 있어서도 ‘나’라는 그림자조차 없기에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육바라밀의 근저에는 지혜 바라밀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수행의 목적이 지혜를 얻기 위한 과정이란 점에서 반야바라밀의 실천이야말로 대승불교 최상의 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을 요약하여 정리해 보면 정진의 힘으로 선정에 이르고, 선정의 경지에서 반야의 지혜를 얻어 일상생활 속에서 보시 및 인욕, 지계를 실천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육바라밀의 실천을 통하여 나는 물론 이 사회가 맑고 깨끗해져 불국토가 실현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걸림없는 자유로운 삶이요, 참 불자의 신행생활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도와 수행도 육바라밀의 실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