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그래 그게 당신한테 뭐가 문제요`

`그래? 그게 당신한테 뭐가 문제요?` –

법륜스님

즉문즉설 – ▒ 문 저희 남편은요, 공무원인데..

학력이 좀 짧아서 그런지 몰라도 승진이 안 돼요.

중학교만 나오고 시골에서 고생 많이 하다가 공무원 시험 보고 7급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서기관이 됐는데 과장을 하다가 과장 보직도 떨어지고..

엄청 괴로워하고 작년에는 우울증에 걸려 약도 먹고 그랬거든요.그 힘들어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가 안됐었는데..

이번에 승진이 또 안 됐어요.

작년처럼 심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많이 힘들어해요.

잠도 잘 못 자고..

집착하지 말라고 그래도 해결을 못 하고..

▒ 답 지금 자기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남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남편 얘기요..) 그래, 남편 고쳤으면 좋겠다 이거죠? 요점이..

(네) 남편을 어떻게 고쳐? 자기도 자기를 못 고치는데..

그런 남편을 보는 내가 힘들다는 거죠? 질문의 요지가..

(아니에요) 그럼 자기는 하나도 힘 안 들어요? 그런 남편을 보는 것이? (이해가 돼요) 이해가 되는데 뭐가 문제예요? (남편이 괴로워하지 않고 좀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그러니까 남편을 좀 고쳐줬으면 좋겠다..

이 말이잖아요? (그렇죠..) 남편 고쳐서 내 문제 해결할 수 있으면 사람들이 무슨 문제가 되겠어요? 겨울에는 많이 안 추웠으면 좋겠다, 여름에는 많이 안 더웠으면 좋겠다 비는 적당히 왔으면 좋겠다, 사업은 잘됐으면 좋겠다 남편이 직장에서 잘 적응했으면 좋겠다, 승진했으면 좋겠다 승진은 못 해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지금 이 얘기잖아요? (지난번에 절에 같이 갔었는데 절을 하다가 눈물을 쏟더라고요)남편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래? 그게 당신한테 뭐가 문제요?’ 이렇게 묻는 게 나예요.

남편이 죽은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예요? (남편이 괴로워하는 것을 어떻게..) 남편이 괴로워하는 것을 자기가 어떻게 해요? 나도 자기 문제에 대해서는 조언을 할 수 있지만, 자기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어요.

그럼 내가 하느님이게..

자기는 뭐가 문제냐니까? (괴로워하는 남편을 보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남편이 승진을 못 했다 그러면, 구조조정할 때 누군가는 나가기도 해야 하는데, 승진 못 되는 일이야 당연히 있지.

그럴 때 내가 승진 못 했다는 것을 문제삼으면 괴롭고 직장에서 나간 사람도 있는데, 그래도 나는 직장에 있다는 것을 보면 어때요? 다행이지.

그래서 어느 쪽을 볼 거냐 문제예요.

내가 여기서 내려가다가 넘어져서 다리가 하나 부러졌다면 부러진 다리만 보고 멀쩡할 때를 생각하면 재수가 없는 것이고 안 부러진 다리를 보고 생각하면 그래도 한쪽 다리는 안 다쳤으니 잘된 일이고..

그러니까 일어난 일은 똑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다행으로 될 수도 있고, 불행으로 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차가 굴렀어..

팔이 하나 부러졌어.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까 아무도 안 다쳤는데 내 팔만 똑 부러졌어..

재수 없죠? 그런데 나는 팔이 부러졌는데 다른 사람은 다 죽어버렸어..

그럼 어때요? 재수 좋지.

그래서 재수 좋고 재수 없고..

그런 건 따로 없어요.

일어난 상황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녜요.

지금 남편 일도, 승진에 집착을 하는데 승진이 안 되니까 괴로움이 되는 것이고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에 비하면 굉장히 좋은 경우에요.

우리 사회에서 직장에서 쫓겨나서 데모하고 난리인 경우도 많잖아요?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그런 사람들 생각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지.

아이가 1등만 하다가 이번에 시험을 잘못 쳐서 2등을 했다 그러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1등을 하지, 2등 했다고 괴로워하고 술 먹고 난리를 피우면 1등이 되나? 5등이 되나? 자기 남편도 이제 자꾸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밀려나겠지.

다음에는 승진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쫓겨날지도 몰라.

왜? 우울증 약이나 먹고 그러면..

그렇죠? 그런 남편을 보는 자기가 안타깝잖아? 그런 것처럼 내가 보기에는, 남편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자기가 안타깝다 이거예요.

자기가 괴로워한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잖아? 똑같애.

남편이 그런 조건에서 좀 긍정적으로 보고 자신을 콘트롤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자기 바람이라면 스님이 질문자를 볼 때에는, 그런 남편을 보면서 마음을 좀 편안하게 해서 남편을 감싸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거 가지고 그렇게 난리 피지 말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지, 남의 일에 너무 촛점을 맞추면 안 돼요.

아무리 부부라도, 아무리 자식이라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그런 남편을 이해하고 봐내면 돼요.

그래도 고생하면서 직장에 다니고 있잖아? (네..) 그리고 굳이 남편하고 이야기를 한다면, 남편을 고치려고 하지 말고 그래도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남편이 중학교만 졸업해서 그 정도면 많이 올라갔잖아? 그러나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

더 올라가고 싶겠지.

하지만 세상은 뜻대로 안 돼요.

그래서 자기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하면 ‘부처님 감사합니다.

우리 남편, 어려운 가운데서도 직장에 다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하고 직장을 그만두면 ‘그래도 지난 20년 동안 직장에 다녀 우리 가족이 여기까지 오게 돼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해야..

남편이 힘들고 막 헤맬 때 아내가 그런 마음을 내야 아내하고 같이 있으면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거예요.

스님 말을 어떻게 생각해요? (울면서) (감사합니다) 고마운 줄 알아야 하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여기 박수 한번 쳐주세요..

(대중들 박수)

법륜스님─ ‘출가’란 스스로 주인되는 삶

‘출가’란 스스로 주인되는 삶 법륜 스님 출가’란 지금까지의 삶이나 의지해 왔던 것들, 추구해 왔던 가치관에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사주 팔자적인 삶, 지은 업에 따른 인연 과보의 삶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변화의 주체로서 자기가 주인이 되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내 운명의 주인이 어떤 신이나, 내가 알지 못하는 과거의 업이나 태어난 생년월일이 아니라, 바로 내가 행과 불행을 좌우하는 삶의 주체로 서는 것이다.

왜 그것을 출가라 하는가? 출가(出家)란 집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집’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집을 짓는 것은 자기를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평평한 바닥을 만들고 바람을 막기 위해 벽을 쌓고, 햇빛과 비를 막기 위해 처마와 지붕을 만들어서 그 속에서 안온함을 추구한다.

이것이 집이다.

그러나 또한 집은 우리를 속박하기도 한다.

벽과 천장이, 바닥이 나를 가둔다.

또 집이란 ‘우리가 사는 공간’이란 의미를 넘어서서 ‘고정 관념’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지는 모든 판단이나 느낌의 근거가 되는 고정 관념이라 볼 수 있다.

자기가 태어나고 살았던 고향 같이 익숙한 생각이다.

고향은 안온함이 있지만, 그 곳에만 있으면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한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모순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집을 짓고 있을까? 우리는 부모를 의지하고 산다.

우리는 부모가 안 계시면 쓸쓸해 하고 허전해 한다.

부모는 방바닥과 같은 존재로 내가 의지하고 사는 기초이다.

결혼해서는 아내나 남편을 기둥으로 삼거나 자식을 서까래로 삼고, 돈으로 벽을 만들고, 사회적 지위로 천장을 만들고, 명예로 갖가지 장식을 하고, 이런 것에 의지해서 안온함을 추구한다.

그런데 인생을 살펴보면 부모로 인하여 갖은 속박을 받고, 아내나 남편으로부터 여러 가지 속박을 받는다.

그리고 자식과 돈 때문에 속박받고, 사회적 지위나 인기로 인해서도 속박을 받는다.

이처럼 행복과 자유와 안온함을 가져온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그런 것들로 집을 짓지만, 사실 이 집은 갖가지 괴로움과 속박의 원인이 된다.

비유하면 편안하게 살기 위해 열심히 집을 짓지만, 집 짓는 중에 처마가 뚫어져서 빗물이 들어오고, 그것을 고쳐 놓으니 이번에는 벽이 갈라져서 빗물이 새고, 그걸 고치고 나니 방바닥이 갈라져서 가스가 새어 들어오고, 그걸 고치고 나니 다시 기와가 깨어져서 방안으로 빗물이 떨어지는 격으로 편안하게 살기 위해 집을 지었지만, 죽을 때까지 집 고치다가 세월 다 보내고 한 번도 제대로 안온하게 자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모순이 있다.

출가란 그 집이 속박과 고통의 원인임을 알고 불사르고 그 집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집이 속박과 괴로움의 원인이 될 때, 그 집을 불사르거나 그 집에서 나오려 하지는 않고 이 집이 문제니까 다른 집으로 가자 해서 그 집을 나오기도 하는데, 이것은 ‘가출’이지 ‘출가’가 아니다.

가출은 그 집이 고통의 원인임을 여실히 깨달아 놓아 버리는 게 아니라, 그 현상에 집착해서 다른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그 집에서 나오면 잠시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 같지만, 조금 있으면 또 같은 고통을 받는다.

이혼하고 혼자 살다가 외로워서 다시 결혼하고, 자식 없던 사람이 자식을 낳고, 취직 안 되던 사람이 취직이 되면 기쁘다.

그런데 시일이 경과하면서 그것이 다시 고통의 원인이 되어서 직장 가진 것을 후회하고,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사업 벌인 것에 대해 후회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걸식을 하고 분소의를 입고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주무셨다.

깨닫기 전에도 그랬고 깨달은 후에도 그렇게 사셨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깨닫기 전에는 좋은 옷이나 좋은 음식이나 좋은 집을 철저하게 거부하셨지만, 깨달은 후에는 거부는 하지 않으시고, 초대를 하면 응하셨다.

인연 따라 그 경우가 있으면 응하시긴 했지만, 그것에 메이지는 않으셨다.

그걸 보고 뎃바다타가 부처님을 비난했다.

“부처님, 출가 수행자는 다섯 가지 규칙을 꼭 지켜야 합니다.

첫째는 반드시 분소의를 입어야 합니다.

둘째는 반드시 걸식을 해야 하며, 셋째는 음식은 반드시 하루 한 끼만 먹어야 하고, 넷째는 절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잠을 자야지 처마 밑에서 자면 안 됩니다.

”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무 밑이나 숲에서 자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비가 올 때는 처마 밑에서 잘 수도 있다.

걸식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신심 있는 재가 신도의 공양을 받을 수도 있다.

하루 한 끼만 먹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환자나 어린아이는 두 끼를 먹을 수도 있다.

고기를 먹지 않고 수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보시받은 음식에 섞여 있을 때는 먹을 수도 있다.

분소의를 입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분소의가 없을 때는 새 옷을 입을 수도 있다.

” 그런데 부처님이 새 옷 입어도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는 헌옷이 있는데도 새 옷 입고, 비가 오지 않는데도 꼭 집안에 들어가 자려 하고, 몸이 아프지 않는데도 끼니대로 다 먹으려 하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 거다.

또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뎃바다타처럼 고행을 하고 사는 것만이 불교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좋은 옷이나 떨어진 옷을 입든 안 입든, 음식을 어떤 것을 먹든 거기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고통의 근원은 무엇인가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니까 그것을 놓으라는 것이다.

어떤 거사님이 내게 상담하러 찾아 와서는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왜 하는 일마다 다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 그래서 그 이유를 들어보니, 대학 입시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고시 시험에도 떨어지고, 또 직장을 구했는데 세 번이나 쫓겨났고, 사업을 했는데 네 번이나 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여자를 만났는데 세 번 다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얼굴이며 모습이 아주 멀쩡하게 보여.

그래서 “초등 학교도 못 나온 사람도 있는데, 당신은 대학 시험을 두 번이나 친 걸 보니까 고등 학교도 나왔다는 소리 아니오? 또 대학 시험을 두 번이나 칠 정도로 집안에 경제력이 있었다는 이야기고, 고시 공부를 했다는 것은 누가 그 뒷받침을 했다는 거고, 또 고시를 칠 정도라면 머리도 괜찮았다는 이야기 아니오? 회사에서 세 번이나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세 번 취직을 했다는 이야기여서 능력이 있으니까 그렇게 세 번씩이나 취직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 않느냐? 또 여자를 세 번이나 만났다는 건 여자를 끄는 힘도 있다는 것 아니오.

능력이 있으니까 세 사람이나 만났지, 없으면 어떻게 만났겠어요?” 이 거사님의 경우 마음이 괴로운 것은 욕심 때문이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전생에 죄가 많은 것도 아니고, 사람도 괜찮은데 현재의 자기 능력보다 자기의 상을 너무 높게 설정하고 있어서 스스로를 비하하고 좌절시키는 것이다.

거사님이 뭔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능력 이상의 것을 추구하니까 늘 일이 안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이 이치를 깨달아 자기 능력이 오십일 때 오십인 줄을 자각하게 되면, 절망과 좌절, 자학이 사라지고 행복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가해야 한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불태워 버려야 한다.

지금 마음으로 스님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스님인데 머리 기르고 다녀도 되니 얼마나 편한가.

내가 앉아서 다른 여자나 남자와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절에 출가한다고 들어와서는 생각의 기준을 늘 결혼해서 사는 친구한테 두고, 자기 개인 공간이 있어야 한다, 취미 생활을 해야 된다고 한다면 문제다.

일본 승려들이 결혼한다고 욕하지만, 그분들을 그렇게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된다.

집에서 가정 생활을 하더라도 아침에 자가용을 타고 절에 출근해서 승복으로 갈아입으면 절도 있는 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저녁에 퇴근하면 사복 입고 나와서는 보통 사람처럼 산다.

그런데 우리는 태도가 분명하지 않다.

태도가 분명하지 않으니까 시비 분별심이 많다.

그리고 출가를 하면 부처님께서 분소의를 입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주무시고 걸식하며 사셨던 그 정신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복도에서 자더라도 숲에서 자는 것보다는 안온하고, 걸식하여 주는 밥 먹는 것보다는 절에서 먹는 밥이 훨씬 고급이고, 옷도 훨씬 잘 입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어제까지 살아왔던 안온함의 기준을 붙들고서 세수할 데도 없고,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자며, 이렇게 적게 먹고 힘이 없어서 어떻게 절을 하느냐고 생각해선 안 된다.

일 주일을 아무것도 안 먹어도 사실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이렇게 시비 분별을 하게 되면 자기가 선택해서 출가하고는 자기 스스로를 괴롭히는 꼴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건 출가했다고 말할 수 없다.

출가란 생각이 바뀌는 거다.

머리 모양과 옷 모양만 바뀌는 게 출가가 아니다.

머리칼을 자른다는 건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고,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기득권을 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남자다 왕이다,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버림을 뜻한다.

거지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출가해야 한다.

우리가 늘 참회 기도를 하는 이유는 부처님의 삶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너무도 부족한 점이 많아서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부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부처님의 삶을 늘 살펴보면서 비록 시대와 지역이 달라졌다 하더라도 그 기본 정신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고 무엇을 입고 어떤 것을 먹든 간에 우리는 어쨌든 그분보다는 좋은 상황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혼자라서 외롭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세속에서 보내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세속 일에 관여한다.

그러니 우리가 수행자라면 부처님께 엎드려 절할 뿐이지 시비를 논할 것이 없다.

그리고 방석 하나를 깔거나, 발우 공양을 하거나, 휴지 한 장을 쓸 때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개선할 일이 있으면 불평과 불만을 할 게 아니라, 의견을 나누고 건의하고 조절하고 살아야 한다.

출가하여 산다는 것은 보살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저 과거 연등 부처님이 계셨을 때, 선혜 동자로 출가한 이래 우리는 그분을 보살이라 불렀다.

그래서 도솔천의 호명 보살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스물 아홉에 출가하기 전까지 우리는 그분을 보살로 부르진 않는다.

원력을 가지고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 코끼리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왔지만, 태어나는 순간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본분을 잊어버리고 세상을 살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두 살 때 농경제에 참석하여 농부의 고통을 보고 벌레의 죽음을 보면서, 동서남북 사대문을 나가서 늙고 병들고 죽어 가는 사람의 고통을 보면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시작했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속에서 수많은 갈등을 하다가 욕구의 충족을 따라 사는 이 길이 해탈의 길이 아님을 확연히 알자 출가를 하셔서 자신의 본분을 되찾으셨다.

그래서 깨달은 중생인 보살이 되셨다.

새로 태어나고 거듭나셨다, 부활했다고도 볼 수 있다.

비록 몸은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삶의 방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발심하고 살아왔던 삶의 연속선상으로 회복되었다.

꿈속을 헤매다가 잠이 깨어 제 자리에 돌아왔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꿈꾸는 상태에 있으니까 자기가 이 세상에 올 때 그냥 떨어졌는지 어떤 원력을 갖고 이 곳에 나투었는지 바로는 모른다.

부처님 법을 만나 공부를 하여 그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되면 자기의 참 모습, 자기의 원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서 편안해지는 거다.

노력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원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온 그 본래 모습으로 회복했기 때문에, ‘아이구, 내가 삼사십 년 동안 엉뚱한 짓을 하고 살았구나!’를 자각하기 때문에 그 전의 수많은 생으로 연결된다.

자기의 삶이 시간적으로 길어지고 자신의 존재를 여실히 꿰뚫어 봤을 때 우리는 이 육신만을 나로 삼는 게 아니라, 수많은 내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공간적으로도 넓어진다.

이제까지는 어리석어서 오직 이 몸만을 나로 삼아서 남편과(혹은 아내와) 이웃과 다투다가 깨닫게 되면 민족이나 인류, 지구의 생존 문제도 자기 문제가 되어 염려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자기의 문제가 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는데, 그럴 때 모든 두려움도 함께 없어진다.

법륜스님 ─두 가지 모양없는 존재의 참모습

법성게(法性偈) :두 가지 모양없는 존재의 참모습

-법륜스님-

법성게는 불/법/승 삼보 중 법보(法寶)에 속하고, 경/율/론

삼장 중 논장(論藏)에 속합니다.

논장에는 대승의 논장과 소승의 논장이 있는데 법성게는`대승

의 논장`입니다.

그 이유는 법성게가 대승경전인[화엄경]을 기본 경전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논장(論藏)이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고 쉽게 전하기

위해 부처님의 말씀을 요약하거나 주석을 단 것 중에서,

그 시대의 붓다라 할 만한 선지식의 글을 논장이라 하여 法과

같이 취급합니다.

법성게는 이런 `논장`의 반열에 들어갑니다.

이 「법성게(法性偈)」는 신라의 고승인 의상 조사께서 쓰신

글이지요.

7字로 이루어진 30구절, 그래서 총 210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그 양이 방대

하고 내용이 깊다 하는「대방광불화엄경」을 축약해서 그 진수

를 뽑은 글입니다.

불교는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경전이 있는데, 크게 소승 경전

과 대승 경전으로 나누지요.

대승 경전은 방등부와 반야부, 법화 열반부, 그리고 화엄부의

넷으로 나누는데,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직후 설하신 경전이

이 화엄경입니다.

대중의 근기에 맞게 방편으로 말씀하신 게 아니라, 3·7일 동안

보리수 아래에서 깨친 바를 그대로 설하신 것이지요.

이 대방광불화엄경은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60권본, 실차난타가

번역한 80권본, 그리고 반야가 번역한 40권본이 있는데,

법성게는 의상 대사께서 60권본을 모본으로 해서 축약해서 쓰

신 글입니다.

중국에 화엄경이 들어오면서 많은 화엄행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중에서 화엄종은 독립적인 하나의 종파로 성립한 것이지요.

화엄종의 2대 조사로 지엄 화상이 계셨습니다.

의상 조사께서 중국에 건너가서 스승으로 모셨던 분이 지엄

화상입니다.

동문으로 같이 공부하신 분이 현수 대사입니다.

이 현수 대사는 중국 화엄종의 3대 조사로서 화엄종을 뿌리내

리게 하는 데 큰 공로가 있으신 분인데, 그 분께서 오히려

의상 조사를 높이 받들었다고 합니다.

특히 의상 조사께서는 그 내용이 깊고 복잡한 화엄경을 완전

하게 이해하셔서 그것을 이 짧은 시구 속에 다 담았을 뿐

아니라, 끝없이 계속되는 법계도(法界圖)에 210자로 딱 맞추어

그 내용을 축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법성게(法性偈)」에서 `법`이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성품`은 참모습을 말하는 것이어서, 존재의 참모습, 진리를

노래한 것이 바로 `법성게`라 할 수 있습니다.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법의 성품, 존재의 참모습이란 어떤 것인가를 노래하고 있어요.

다시 한 번 읽어 보면

⊙법성이란 둥글고 두루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고,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며 이름도 모양도 없어 일체가 끊어졌으니

이것은 깨달음의 지혜로만 알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이지요.

또 성품은 극히 미묘하여 스스로의 성품인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법의 참성품, 본래의 성품은 두 가지 모양이 없다고 했는데,

오늘 우리가 보는 세계, 우리가 보는 존재의 모습은 어떠냐?

여러 모양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모양이냐? 존재는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또 사람들의 행동에는 착하고 나쁜 것이 있고 빠르고 느린 것

이 있고, 선한 행위 악한 행위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생각을 봐도 그래요.

옳고 그른 생각이 있습니다.

또 존재의 모습에는 아름답고 추한 것이 있어요.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있고, 신령스럽거나 신성시 여기는 것

이 있는 반면 보거나 만지기만 해도 부정 타는 깨끗하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풀에도 약이 되는 것이 있나 하면 독이 되는 것이 있고, 큰

것 작은 것이 있고,넓은 것 좁은 것, 늘어나는 것 줄어드는

것이 있어요.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두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법의 성품, 존재의 참모습은 두 모양이 없다 하니, 우리가 아

는 것과는 정반대 얘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지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진리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법칙이나 사실을 말하지요.

불변하는 이치, 존재의 참모습을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상식을 가지고 삶을 살고, 그 상식을 보편 타당한

객관적인 기준으로 삼아 남과 사회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상식은 옳다고 고집할

만한 불변의 진리인가, 아니면 한 단편적인 생각이고 주관인가.

하나의 주관이라면 그 상식을 잣대로 삼아 옳고 그름을 판단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겠는가?

그렇다면 지혜롭게 사는 삶은 무엇이고 존재의 참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이 법성게를 공부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얼음 한 덩어리가 있어요.

세 살 먹은 아이에게 얼음으로 구슬을 만들어 돌구슬이나

유리구슬과 같이 주면 어린이는 같은 구슬이라 생각할 겁니다.

얼음 구슬을 포함해서 다섯 개의 구슬을 주면 아이는 자기

구슬이 다섯 개라고 알고 그릇에 담아 놓아요.

그러다가 밖에 나가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다가 한참 만에 방

안에 들어왔더니 구슬이 네 개밖에 없어요.

아이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구슬 하나가 없어졌어.

사라졌단 말이야.

그리고는 이렇게 말할 거예요.

“그런데 누가 물을 부었지?” 구슬이 사라지고 물이 생겼다.

즉 아이가 얼음이 사라지고 물이 생겨났다고 말하는 것은 얼음

따로 물 따로 각각의 존재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얼음이나 물이라는 어떤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얼음과 물이 각기 다른 존재가 아니라,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고 물이 얼면 얼음이 된다는 걸 어른들

은 알지요.

얼음 구슬이 사라지고 누가 밖에서 물을 부은 것이 아니라,

얼음이 물로 변했을 뿐, 단지 이 모양에서 저 모양으로 바뀌었

을 뿐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사물을 조금만 관찰해도 무엇이 생기고 사라졌

다는 말은 사실 존재의 어느 한 부분이나 순간에 한정되었을

때만 맞다는 걸 알 수 있죠?

또 존재의 참모습은 신성한 것도 부정한 것도 아니에요.

같은 떡집에서 떡을 만들어서는 주문한 곳에 배달 갔는데,

한 곳은 절이고 한 곳은 초상집이었어요.

그래서 떡을 똑같이 썰어서 얹어놓았는데, 부처님 전에 올렸던

떡은 신성함이 깃들어 있어 먹으면 재수 좋고, 초상집에 올려

놓은 떡은 먹으면 재수 없어 부정 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다면 떡 속에 정말로 신성하고 부정한 것이 있을까?

떡 자체에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지요.

생각을 일으켜 모양 짓는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생각을 일으켜서 더럽다 깨끗하다, 신성하다 부정하다고 모양

을 짓는 거지, 실제의 존재 그 자체에는 신성한 것도 부정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생각 놓아 버리면 신성한 것도 부정한 것도 아

니니까 부정 탈 아무 일도 없지만, 그 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그것을 하면 재수 좋고 또는 부정 탄다는 논리가 생겨

나게 되요.

힌두교도들은 소를 신성하게 생각합니다.

그들 관념 속에는 소는 여자보다도 더 좋은 업을 가졌다고 봐요.

그래서 여자가 죽으면 다음에 뭘로 태어납니까?

소로 태어나고, 그 다음에는 남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쇠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교도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해요.

그래서 돼지고기를 먹게 되면 몸이 더럽혀져서 좋은 곳에 갈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강제로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그 사람들에게 먹이면

죽는 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밖에서 보면 소가 신성한 것도 돼지가 부정

한 것도 아니지요.

그것은 사람들이 일으킨 생각이나 관념이지 실제의 소나 돼지

자체는 신성한 것도 아니고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이지요.

또 깨끗하고 더러운 것, 아름답고 추한 것도 정말 그 자체에

아름답다거나 추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맛 같은 것은 어떨까요?

전라도에 가면 홍어를 잡아서 푹 썩혀 놓은 음식이 있죠.

그 냄새를 맡으면 그 곳 사람들은 우와, 참 잘 익었다! 이래요,

익숙치 못한 우리가 냄새 맡으면 막 구역질이 날 정도인데

말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오징어 냄새나 청국장 냄새 좋아하죠?

미국 사람들은 그 냄새 맡으면 코 막고 야단법석입니다.

우리가 인도 가서 인도 카레 냄새를 맡으면 비위 약한 사람들

은 먹었던 게 올라옵니다.

그런데 인도 사람은 한국에 와서 제일 못 맡는 게 뭐냐?

된장하고 김치 냄새입니다.

그런데 아프다가도 자기들 카레 한 그릇만 먹었다 하면 병이

탁 나아 버려요.

실재하는 존재 그 자체에 아름답고 추하다든지, 맛있고 맛없

는 게 있어요?

우리의 습관, 관념에 따른 것이지요.

그러면 이렇게 그려진 자기 관념이나 습관은 객관적일 수가

있어요?

주관적입니다.

그런데도 이 주관적인 자기 생각을 절대화해요.

마치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인양 말이지요.

이 경우 우리가 알고 있다 하는 게 뭐냐?

전도 몽상된 것이지요.

잘못 알고 있다 이 말입니다.

가정 문제도 그래요.

직장 생활하는 거사님의 예를 들어봅시다.

오늘 퇴근하려 하는데, 친구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는 말을

듣게 됐어요.

그래서 친구를 위로하고 돕기 위해 그 집에서 이야기도 해

가며 같이 보내 줍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옆자리에 근무하던 회사원 하나가 또 아

파서 병원에 입원했다 해요.

그래서 또 병문안 갑니다.

그 다음날은 누구 이사하는데 도와 주러 가.

그러면 사람들은 “이야~, 그 친구 진짜 보살이야, 보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지만 집에 가면 부인은 뭐라

그래요?

“정신 나갔어, 당신?” 이렇게 됩니다.

제가 지난번에 미국에서 `깨달음의 장` 수련을 진행하는데,

저녁 8시에 입재하기로 한 보살님 한 분이 참가한다 하고는

안 와요.

30분 이상을 기다리니까 오셨는데, 이 분이 수련이 진행되는

동안 자기는 결혼 생활 15년에 아직 한 번도 남편에게 잘못

했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요.

그래서 내가 당신 참 고집이 세군요.

하니까,

자기는 고집이 안 세다는 겁니다.

결혼 15년에 잘못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남편한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그게 왜 고집이냐는 겁니다.

그런데 `장`을 진행하기 전에 차에서 부인을 내려 주면서

그 남편이 저보고 저쪽으로 좀 가자고 그러더니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스님, 여기 와서 며칠 있다 가면 사람됩니까? 이러더라고요.

며칠 있으면 사람 되는지 물어보고 갔는데, 본인은 15년 동안

잘못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했어요.

조금 범위를 넓혀 사회적으로 옳다 그르다 하는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시비를 가릴 때는 그 기준이 있어야 되겠죠?

그런데 그 기준이 뭐냐?

그 나라의 윤리나 법 이런 게 되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나라마다 다 같아요? 다 다릅니다.

같은 나라에서도 시대나 세대마다 다 달라요.

조선 시대에는 보통 십육칠 세가 되면 결혼했어요.

그래 여자가 스무 살이 넘으면 어휴, 노처녀가 되서 이젠 시집

가기 글렀네.

라는 말을 했어요.

그런데 요즈음 스무 살짜리가 시집간다 하면 뭐라 합니까?

아니 저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벌써 남자 맛을 알아?

이렇게 말한다 이겁니다.

조선 시대에는 여자가 결혼식 올리고 첫날밤도 같이 자지 못

하고 남편이 갑자기 죽었다 해도 그 집에서 살아야죠.

살지 못하고 딸이 친정으로 오면 친정에서는 이게 무슨 집안

망신이냐고 호통치고는 시집으로 되돌려 보냈어요.

그래도 또 오면 `나쁜 여자`가 되고 제발 정신 차려 거기 붙어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서른이 되어 시집가도 그것도 1년 산 것도 아

니고 3, 4년씩 살다 남편이 죽고 혼자 있으면 뭐라 그래요?

아직도 나이가 서른이라 앞날이 창창한데 왜 거기 사냐고?

그래도 집에 안 오고 그 집에 붙어 있으면 부처님한테 기도하죠.

`아이고, 저것이 미쳐서 저기 붙어 있는데, 제발이지 정신 차려

서 다시 시집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요.

부처님이 어떤 기도를 들어 주어야 할까요.

동성 동본 문제도 그렇죠.

조선 시대에는 동성 동본인 남녀가 같이 결혼하면 짐승 취급했죠.

그런데 신라 때는 어땠어요? 왕족인 `성골`은 오히려 다른 성을

가진 사람하고 결혼하면 피가 섞였다,

더러워진다 해서 순수하게 자기들끼리 결혼하면 순종인 성골

이라 하고, 한 번 섞이면 진골이라 해서 계급을 한 단계 낮추

어 차별했어요.

그래서 `존재의 참모습은 둥글고 두루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

는 것입니다.

`

다만 마음이 망념을 일으켜 만 가지 모양을 만들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