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여스님─맑고 향기롭게

맑고 향기롭게 / 무여스님 ‘불교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교는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것이다’고 대답합니다.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입니다. 곧 위로는 가장 바르고 곧은 깨달음[無上正等覺]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동시에, 아래로는 보살의 마음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다함께 부처님의 깨달은 경지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과거 일곱 부처님께서 공통적으로 경계 하여 말씀하신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로 불교를… 무여스님─맑고 향기롭게 계속 읽기

무여스님─마음을 쉬어라

– 마음을 쉬어라

-무여스님-

종교는 달리 말하면 행(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들은 꼭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을 한다, 도를 닦는다, 마음공부를 한다, 참선을 한다’는 등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하지만, 모두가 ‘마음을 닦는다’ 는 뜻입니다.

흔히들 마음은 태허공(太虛空) 같다고 합니다.

곧 텅빈 허공과 같다고 합니다.

마음은 허공과 같다는 것입니다.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습니다.

마음은 물체가 아니므로 물체를 닦듯이 닦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형체가 없는 이 마음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 것인가? 이 미혹중생의 때 묻은 마음을 어떻게 닦아야 마음을 올바로 닦는 것이 되는가? 그것은 마음을 맑게 하는 것입니다.

흐리고 탁해져 있는 중생의 마음! 그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흐리고 탁한 이유는 무엇일까 요? 그것은 번뇌망상 때문입니다.

중생들은 세세생생을 살아오면서 이런 저런 인연으로 얽히고 설켜 탐진치 삼독심을 일으키게 됩니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여러 마음들이 번뇌망상을 치성하게 하고 막 들끓게 하는 것입니다.

이 흐려지고 탁해진 마음을 바르고 맑게 하는 것을 ‘마음 닦는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마음을 닦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마음을 쉬는 것입니다.

번뇌망상의 마음을 놓는 것이고, 번뇌망상의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운다, 마음을 쉰다, 마음을 놓는다는 것은 다 같은 말입니다.

이는 일체 생각을 하지 않고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곧 번뇌망상 때문에 이 마음이 탁하고 흐려져 있으므로 생각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번뇌망상으로 인해 흐려지고 탁해진 마음은 마치 파도 치는 바다와 같습니다.

남해안이나 동해안에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올 때면 온 바다 밑의 더러운 것들이 전부 소용돌이를 쳐서 바닷물이 탁해집니다.

이때는 바로 1m 아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날씨가 맑아지고 바다가 잔잔해지고 고요해지면 바다 밑이 아주 깨끗 하게 잘 보입니다.

10m 아래까지도 깨끗하게 보입니다.

또 비유하자면 장마철에 계속 흐리고 비가 오다가 어느 때 어느 곳에는 햇빛이 반짝 나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늘 번뇌망상이 잔뜩 치성하다 가도 어떤 순간 그치는 수가 있습니다.

번뇌망상이 뚝 끊어진 자리, 그 자리가 부처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공부를 하거나 불교적인 분위기에 서 생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 자체가 놓여지고 마음이 쉬어지게 됩니다.

우리 마음도 번뇌망상을 피우지 않고 고요해지면 맑아 집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안락해집니다.

마음만 편해 지는 것이 아니라 몸까지도 편안해집니다.

편안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즐겁기까지 합니다.

기쁘다고 할 수도 있고 즐겁다고도 할 수 있는 오묘한 기분을 느끼게 됩 니다.

그것을 흔히들 ‘법열(法悅)’이라고 하는데, 법 에서 느끼는 그 기쁨이라는 것은 삶의 진정한 행복이 됩니다.

법열을 느껴보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면 반쪽 인생 밖에 못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아주 맑아져 안락을 느끼는 그런 상태가 되면 큰 병이 아닌 사소한 병이나 괴로움은 저절로 낫게 됩니다.

참선, 염불, 수행을 잘 하면 건강은 저절로 좋아집니다.

여기에서 만족하지 말고 더욱 깊게 들어가면 더 진정 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이때는 선정의 경지, 삼매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맑고 밝은 상태가 되면 자연스럽게 행동까지 거룩해집니다.

부처님쪽으로 차츰 차츰 가까워지며, 거룩하고 존경스 럽고 훌륭한 모습이 저절로 드러나게 됩니다.

일반 불자들이 이 경지에 이르기에는 다소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맑고 향기 나는 그런 사람이 되리라’ 고 하면서, 부단히 노력하고 애쓰는 생활이 진정한 불자로 가는 길이 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월간 [법공양] 9월호에서-

무여스님─기도하는 자의 마음가짐

기도하는 자의 마음가짐

-무여스님-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데도 정성껏 해야 되지만 부처님에 대한 정성도 아주 대단해야 돼요.

해인사에 계시는 일타 스님의 법문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타 스님 부모님은 아들을 낳기 위해서 정성을 다해서 기도를 드렸답니다.

부처님에게 기도를 올릴 때만 정성을 올린것이 아니고 농사를 지을 때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공양미를 짓는 논밭에는 대변을 주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농사에는 대변을 줘야 잘 자라고 맛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럽다고 대변을 안 주었다는 것입니다.

고운 풀만 베어다가 거름으로 사용했답니다.

벼가 다 익으면 제일 먼저 익은 것을 낫으로 베는 것이 아니고 손으로 직접 벼를 훑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아를 잘 찧었답니다.

이렇게 정성껏, 그것도 관세음보살님이나 대방광불화엄경을 부르면서 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되시는 법진 거사는 절에 갈 준비가 다 되면 깨끗한 무명옷으로 갈아입고 손수 만든 무명베 자루에 쌀을 담아서 지고 마곡사 대원암까지 가서 불공을 드렸답니다.

집에서 절까지는 80리나 되었답니다.

어느 해는 쌀을 짊어지고 대원암으로 가는데 배가 싸르르 아프더니 방귀가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참으며 가다가는 시냇물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그만 방귀를 “뽕-” 하고 뀌고 말았어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러 가다가 방귀를 뀌다니.

방귀 냄새가 쌀에 묻었을 것 아닌가? 불경스럽기도 하지.

방귀 냄새가 섞인 쌀로는 공양을 올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일타 스님 아버지는 쌀을 도로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 다음날 또 다른 벼를 손으로 훑어서 또 방아를 잘 찧어서 또 새로 자루를 만들어서 80리 길을 지고 걸어서 불공을 드리러 갔다는 것입니다.

일타 스님 일가가 41명이 출가를 했답니다.

그런 지극한 신심이 아마 41명이 출가한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떤 비구니 스님은 재나 불공을 올리려고 공양물을 사러 가면 반드시 단층 건물의 가게에서는 과일이나 과자 같은 것을 산다고 합니다.

2층이나 3층집은, 2층이나 3층에서 온갖 잡일을 하는 가게에서 공양물을 사면 부처님께 불경스럽다는 것입니다.

살 때도 주인이 보면 신경질이 날 정도로 하나하나 고르고 조금만 흠이 있거나 모양만 안 좋아도 사지 않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한 걸망 사서는 버스나 열차를 타면 선반이 있으면 선반에 올려놓지만 선반이 없으면 아무리 무겁더라도 무릎 위에 올려놓지 절대로 바닥에 두지 않습니다.

산을 넘다가도 쉴 때 깨끗한 풀이나 바위 위에 두고 쉬면 좋을 텐데 꼭 무릎 위에 놓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 올릴 것을 어떻게 땅바닥이나 바위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비구니 스님은 부처님께 올릴 마지를 뜰 때에도 반드시 마스크를 하고 손수 아주 정성껏 뜬답니다.

법당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옷을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고 들어간답니다.

기도자는 일타스님의 부친인 법진거사나 이 비구니 스님 같은 그런 정성이 있어야 됩니다.

기도자는 옛날 새색시가 처음 시집와서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나 시아버지 앞에 아주 조심스럽게 떨리는 손으로 정성을 다해서 시중을 들듯이 그렇게 하세요.

흔히 법당에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들기도 하고 심지어 먹을 것을 먹기도 하는데, 법당은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곳입니다.

살아 계신 부처님을 모신듯이 정성을 다해야 기도다운 기도가 됩니다.

이렇게 아주 간절 간절한 그런 기도가 끝나면 반드시 축원(祝願)을 하십시오.

축원은 꼭 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은 축원을 해야 하고 싶은 생각을 더 내시고 간절한 마음을 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축원은 평생의 소원과 일상의 소원으로 나뉩니다.

평생의 소원은 일생의 목표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표가 있어야 됩니다.

목표를 설정해서 그 목표를 향해서 열심히 사는 사람과 막연하게 의식주에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하고는 훗날 결산을 하듯이 인생을 마무리해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일생의 목표가 평생의 소원입니다.

불자의 평생소원이라면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부처인 자기를 계발해서 부처님과 같은 인격과 도덕을 갖추는 것입니다.

불자뿐만 아니라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완성이 목표가 되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