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스님(2)─ 굶어 죽은 수행자 본 적 없다

굶어 죽은 수행자 본 적 없다 동산 큰스님

밥 대신 죽, 김장독엔 소금 1950년 겨울, 한국전쟁이 한참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피난지 부산은 말 그대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마지막 보루로 남은 부산으로 수많은 피난민들이 너도나도 모여든 때문이었다.

마지막 피난지 부산으로 모든 피난민이 모여들자 먹을 것, 잠잘 곳이 턱없이 모자랐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요, 모든 백성들의 형편이 아사직전에 이르니 사찰의 형편이라고 예외일 수가 없었다.

더더구나 왜색 대처승들이 사찰의 운영권을 손에 쥐고, 청정 독신 비구승들은 대처승들로부터 양식을 얻어먹고 사는 지경이었으니, 부산 동래 금정산 범어사의 선방인 청풍당의 살림도 말씀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조실 동산 스님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아니한다’면서 누구나 수행하겠다고 찾아오면 무작정 받아주시는 바람에 10여명 내외였던 청풍당 식구가 무려 84명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니 당장 그 많은 식구 먹는 것이 큰 문제였다.

그러나 동산 스님은 천하태평이었다.

“걱정할 것 없다.

수행자가 굶어죽었다는 소리 들어본 일 없고, 수행자가 얼어 죽었다는 소리도 들어본 일 없다.”

“양식이 모자란데 어쩌란 말씀입니까?” “양식이 모자라 밥을 짓지 못하겠으면 물을 더 붓고 죽을 쑤어 먹으면 된다.”

“그럼 반찬은 또 무엇을 먹입니까?” “그 걱정은 말고 나를 따라 오너라.”

동산 스님은 성큼성큼 걸어서 김장독 앞으로 가시더니 김장독을 열고 김치를 한쪽 꺼내보라고 명했다.

제자가 스님께 김치 한쪽을 올렸는데 직접 맛 보시더니 야단부터 치셨다.

“김치를 이렇게 싱겁게 담그면 어쩌자는 게냐?” “아입니더 스님.

이 김치는 짜거운 편입니더.”

“인석아, 전쟁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어.

그리고 피난 올 스님들이 앞으로도 많을 것이야.

이런 싱거운 김치로는 올겨울 못 넘긴다.

김칫독에 소금 한 그릇씩 더 넣도록 해라.”

이렇게 해서 청풍당의 그해 겨울 김치는 그야말로 ‘소금 할아버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앞날을 내다보신 동산 스님의 혜안 덕분에 피난 내려 온 수많은 스님들이 범어사 청풍당에서 한겨울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6.

25전, 범어사 청풍당의 겨울안거가 끝난 날이었다.

한 수좌가 동산 스님에게 급히 달려 와서 다급하게 고했다.

“스님, 큰일 났습니다.

큰 스님께서 가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큰 스님 시봉을 들던 영기 수좌가 법광(法狂)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뭐라? 영기가 법광을 일으켰어?” 동산 스님의 시봉을 들던 영기라는 수좌가 있었다.

동산 스님은 영기에게도 참선수행의 기회를 주기 위해 지난 겨울안거 동안 한철 참선수행을 하도록 허락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영기 수좌가 ‘눕지 않고 잠자지 않는’ 용맹정진을 하다가 그만 실성을 해서 미쳐버렸다는 것이었다.

불가에서는 참선수행을 하다가 도가 지나쳐 제정신을 잃고 미쳐버리는 것을 ‘법광’이라고 불렀다.

실성한 제자 업고 고향으로 동산 스님이 선방으로 가보니 과연 영기 수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조실 스님이나 앉으시는 선방 어간에 떡 버티고 앉아서 선참수좌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삼배를 올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기는 스스로 도를 깨달았다고 외치면서 껄껄 웃다가 흐느껴 울다가 하는 짓이 가관이었다.

그러나 영기의 법세는 며칠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 증상이 갈수록 심해져 자칫 하다간 큰 불상사를 일으킬 것만 같았다.

별수 없이 대중공사를 벌인 끝에 영기수좌의 병이 하루 이틀에 나을 것 같지 않으니 그의 속가로 보내기로 했다.

모두들 반대했지만 동산 스님이 스스로 그 아이를 데리고 영기의 속가에 가겠다고 나섰다.

“절에서 병이 들었으니 내가 가서 속가 부모님들에게 사죄를 드리는 게 도리이다.

자, 영기야.

나하고 함께 너희 집으로 가자.”

제자들이 한사코 반대했지만 동산 스님은 기어이 실성한 영기를 데리고 범어사를 떠났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동산 스님은 무릎이 깨지고 여기저기 피멍이 든 채 돌아오셨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으셨기에 이처럼 온 몸을 다치셨습니까?”

“아, 영기 그녀석이 냇물을 건널 적에 날더러 저를 업어서 건너라는 게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집에 안가겠다고 버티면서.

.

.

.

.

그러니 별수 없이 내가 그 녀석을 업고 냇물을 건너는데, 냇물 한가운데서 그 녀석이 발광을 하는 통에 그만 물속에 나뒹굴어 이 지경이 되었구나.

그래도 내가 직접 집에 데려다 주었으니 그나마 마음이 덜 아프다.”

상처를 냈으니 소금까지…

1964년의 봄이었다.

동산 스님은 종원 수좌와 원명 시자를 데리고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에 잠시 머물고 계셨는데 다음날 법주사에서 미륵부처님 점안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었다.

“얘 종원아, 내일 법회가 있으니 내 머리 좀 깎아줘야겠다.”

“예 그러지요 스님.”

종원 수좌가 조심조심 삭도질을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 긴장해 조심조심 하다가 오히려 손이 떨리는 바람에 동산 스님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날이 선 삭도가 스님의 머리에 여지없이 상처를 냈으니, 피가 번져 흐르기 시작했다.

종원 수좌는 떨리는 손길로 스님의 상처에 수건을 갖다대며 사실대로 고하였다.

“저.

.

스님, 제가 그만 잘못해서 스님 머리에 포를 뜨고 말았습니다요.

.

.

.

.”

“보나마나 불같은 성미에 불호령이 떨어질 일이었다.

종원 수좌는 ‘죽을 각오’를 이미 하고 있었다.

드디어, 동산 스님이 입을 여시었다.

“거 어쩐지 머리통이 시원하다 했지.

아 인석아, 얼른 가서 소금 가져와!” “예? 소금.

.

.

이라니요.

.

.

스님?” “아 인석아, 기왕에 포를 떴으면 소금까지 뿌려야 안 상할 것 아녀? 응? 허허허허.

.

.”

동산 스님의 그 웃음소리는 종원 수좌를 지옥에서 건져 올리는 자비의 손길이었다.

근본적인 잘못은 결코 용서치 않는 무서운 스님이었으나 단순한 실수는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분이 바로 ‘금정산의 호랑이’ 동산 스님이었다.

윤청광/불교신문에서

동산 스님(1)─짐승에 물려 죽어도 道 구하겠다

짐승에 물려 죽어도 道 구하겠다 동산 스님 부산 동래 범어사의 하동산(河東山) 큰 스님은 현대한국불교중흥조 가운데 한분이셨다.

동산 스님은 1890년 충북 단양에서 출생, 서울에 있던 경성의전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고모부였던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분부로 백용성(白龍城) 스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구하였다.

이 자리에서 백용성 스님으로부터 “육신의 병을 고치는 사람이 의사인데, 중생의 병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배가 아프고 종기가 나고 상처가 나는 것은 육신의 병이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마음의 병이니, 육신의 병만 고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라는 법문을 듣고 홀연히 발심, 양의사가 되는 길을 내던지고 용성 스님을 은사로 삭발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스님은 석왕사, 해인사를 거쳐 부산 동래 범어사 조실로 계시면서 기라성 같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성철 스님을 비롯해서 광덕, 지유, 능가, 정관, 무진장 스님 등 걸출한 범어사 문중의 인물을 배출했다.

청담, 효봉, 금오 스님 등과 더불어 불교정화운동을 펼치셨고 1965년 4월24일 세수 75세, 법랍 53세로 범어사에서 열반에 드셨다.

‘설법제일 하동산’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스님의 법회는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아무리 가난한 절도 동산 스님이 한 번 다녀가시면서 법회를 열기만 하면 “3년 먹을 양식이 들어온다”고 할 만큼 ‘복을 몰고 다니는 큰 스님’으로 사부대중의 추앙을 받았다.

‘설법제일’ 명성 전국에 퍼져 동산 스님이 출가하여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은사이신 용성 큰 스님은 제자를 큰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 당시 평안도 맹산 우두암에 머물고 계시던 한암 스님 문하로 제자 동산을 보냈다.

그러나 한암 스님은 얼른 동산을 받아주지 않았다.

“내가 자네를 받아주지 못하겠으니 돌아가라고 하면 어찌 하겠는가?” 한암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자 동산은 결연히 그 자리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스님께서 내치시면 암자 밖 바위틈에 토굴이라도 파고 먼발치에서라도 스님을 모시겠습니다.”

마침 날이 어두워지면서 맹수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암 스님이 다시 물었다.

“저 산짐승들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암자 밖에는 사나운 산짐승들이 우굴거리는데 그래도 바위틈에 토굴을 파겠는가?” “예 스님.

도를 구하지 못하고 취생몽사하느니 차라리 도를 구하고 토굴에서 산짐승 밥이 되는 게 나을 것입니다.”

동산이 이렇게 결연한 각오로 대답을 올리자 한암 스님이 빙긋이 웃으셨다.

“남의 집 자식이라 내쫓지도 못하겠구나.

여기서 머물게나.”

“천마리 닭 속 봉황 있다” 동산 스님이 범어사 청풍당에서 참선수행자 20여명을 지도하고 계실 때였다.

이 당시 사찰의 운영권은 대처승들이 쥐고 있었고 청정 비구 스님들은 대처승들의 눈치를 보아가며 얹혀사는 형편인지라 수좌들의 양식마저도 대처승들에게 얻어먹는 처지였다.

그런데 범어사 청풍당에서 참선수행을 하는 청정 수좌의 수가 7,8명이었을 때는 그럭저럭 스님들의 양식이 해결되었으나 그 수가 점점 불어나 20여명에 이르니 걸핏하면 저녁 끓일 양식도 없을 때가 많았다.

그러니 죽을지경인 것은 청풍당 살림을 맡은 원주 스님.

대처승인 본절 주지는 양식을 되도록이면 적게 주려고 아우성이지, 청풍당 조실 동산 스님은 찾아오는 스님은 무조건 다 받아들이지, 식량은 모자라지.

.

.

그래서 원주 스님이 동산 스님께 통사정을 했다.

“스님, 이제 제발 더 이상은 새 식구를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죽 끓일 양식도 모자랍니다 스님.”

“무슨 소리냐?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게 불가의 도리이거늘 감히 어찌 수행하겠다고 찾아오는 수행자를 내치란 말이냐?” “수행자 수만 많다고 다 도인 되겠습니까?” “이것 봐라! 닭이 천 마리면 그 중에서 한두 마리는 봉황이 나오는 법이다.”

동산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 후로도 오는 사람은 막지 않았고, 삭발출가 하겠다면 누구도 거절하지 않고 제자로 삼았다.

그래서 동산 스님의 제자가 무려 백여명을 훨씬 넘었다.

1952년 6월6일.

당시 부산에 피난해 있던 정부에서는 부산 금정산 범어사에서 전몰장병합동위령제를 거행하게 되었다.

특히 이날 위령제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삼부요인과 유엔군사령관도 참석했다.

불같은 성품 대통령을 꾸짖다 이날 법주는 동산 스님이었다.

동산 스님은 이날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오전 10시에 법회를 열기로 되어 있었는데 대통령이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때문이었다.

동산 스님이 법당에 들어서자 대통령이 중절모자를 쓴 채 유엔군사령관에게 법당 안을 설명하면서 부처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뭐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동산 스님이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이것 보시오!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분이 감히 어디서 부처님께 손가락질을 하고 있단 말씀이시오!” “아이구 이거 내가 큰 실수를 했소이다.

이 외국인 손님들에게 부처님을 소개해 드리느라고 그만 실수를 했소이다.”

“그리고 법당 안에 들어오셨으면 누구나 모자를 벗어야 합니다.”

동산 스님이 또 한번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유엔군사령관 등이 얼른 모자를 벗었다.

이날 합동 위령제를 마치고 돌아간 이승만 대통령은 범어사의 도인 스님 하동산 스님을 다시 뵙고 ‘좋은 말씀을 듣고자’ 당시 내무부장관을 맡고 있던 백성욱 박사를 범어사로 보내 동산 스님을 모셔오도록 했다.

“내 평생 나에게 호통을 친 사람이 두 분이요.

한 분은 김구 선생이셨고, 또 한 분은 범어사 하동산 스님이시니, 그 분을 꼭 내 집무실로 모시고 오시오.”

이승만 대통령은 내무부장관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그러나 백성욱 내무부장관이 동산 스님을 모시러 왔을 때 동산 스님은 한마디로 대통령의 초청을 거절했다.

“대통령이든 소통령이든 나를 보려면 자기가 와야지 내가 왜 가노?!” 윤청광〈논설위원〉/법보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