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寶父母恩重經 대보부모은중경 ━━━━━━━━━━━━━━━━━━━━━━━━━━━━━ 어느날,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때에 부처님께서 사위국 왕사성 기타숲 외로운 이를 돕는 절에서 큰 비구 삼만팔천 사람과 보살 마하살들과 함께 계시었다. 그때의 세존께서 여러대중을 데리고 남쪽으로 가시다가 해골 한 무더기를 보셨다. 부처님은 해골더미를 향하여 이마를 땅에 대고 정중히 예배하시었다. 이를 보고 아난이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삼계의 큰 스승이시고 사생의 아버지 이시오매 여러 사람이 귀의하고 공경하는 터 이온데 여찌하여 해골더미에 예배하시나이까.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시었다. 아난아. 비록 네가 나의 큰 제자로서 출가한지 오래지만 사리를 널리 아지 못하는 구나. 이 한 더미의 해골이 전생의 조부모도 되었을 것이요. 또 여러 대의 내 부모도 되었을 것 이므로 내가 지금 예배하는 것이로다. 아난아 네가 이 한 더미 해골을 가지고 두몫으로 나누어 보라. 만일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요. 여자의 뼈라면 검고 가벼울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남자와 여자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 의복과 생긴 모양으로 능히 구별할 수 있지만 죽은 뒤에는 마찬가지. 백골이 다름 없거늘 저더러 어떻게 분별하라 하시나이까. 아난아.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적에 절에 가서 경읽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삼보앞에 예배하기도 하고 염불도 하였을 것이므로 뼈가 희고 무거울 것이요, 여자는 아이를 한번 낳을적 마다 서말 서되의 피를 흘리고 여덟섬 너말의 젖을 먹여야 하므로 뼈가 검고 가벼우니라. 아난이 이 말을 듣자 가슴을 오리는 듯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오면 어머니의 은혜를 갚사 오리까? 아난아. 자세히 들어라 내가 이제 너를 위하여 어머니가 아기를 배어, 낳느라고 열달 겪어야 하는 지독한 고통을 말하리라. 어머니가 아기 밴지 첫째 달에는 풀 끝에 맺힌 이슬방울이 아침에 있다가도 한나절이 지나면 없어지듯이 새벽에는 모여 있다가 흩어져 버리느니라. 둘째 달에는 잘 끓는 우유 죽이 한 방울 떨어진 것 갔느니라. 셋째 달에는 엉기어진 피와 같느니라. 넷째 달에는 점점 더 사람의 모양을 이루느니라. 다섯 달째엔 어머니 뱃속에서 다섯 가지 부분이 생기나니 그 다섯 부분이란 머리가 그 한 부분이요, 두팔이 그 두 부분이요 두 무릎이 그 다섯 부분이니라. 어머니가 아가 밴지 여섯째 달에는 어머니 배속에서 여섯 정기가 열리나니 눈이 한 정기요, 귀가 두 정기요, 코가 세 정기요, 입이 네 정기요, 혀가 다섯 정기요, 뜻이 여섯 정기니라. 그리고 일곱째달에는 어머니 뱃속에서 삼백육십 뼈마디와 팔만 사천 털구멍이 생기느니라. 여덟째 달에는 뜻과 지혜가 생기고 아홉 구멍이 자라느니라. 아홉째 달에는 아기가 어머니 배속에서 먹기를 시작하는데. 복숭아 오얏 마늘이나 오곡은 먹지 않느니라. 어머니의 생장은 아래로 향하고. 숙장은 위로 향하여 한 더미 산이 있는데, 이 산 이름이 세 가지니, 한 이름은 수미산. 한 이름은 업산 한 이름은 혈산이니라. 이 산이 한번 무너지면 한줄기 피로 화하여 아기의 입으로 흘러 들어 가느니라. 어머니가 아기 밴지 열째달에는 마침내 낳게 되는데 아이가 만일 효순한 자식이면 두손을 합장하고 나오면서 어머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오역의 자식이면 어머니의 태를 깨트리거나 다리로 어머니의 골반을 버티기도 하여 어머니로 하여금 천개의 칼로 배를 찌르는 듯. 만개의 창으로 가슴을 쑤시는 듯 하게 하느니라. 이러한 고통을 겪으면서 이 몸을 낳은 뒤에 또 열 가지 은혜가 있느니라. 여러 겁 내려오는 인연이 지중하여 금생의 어머님의 태중에 들어서 달수가 차갈수록 오장이 생기었고 일곱달 접어들면 육근을 이루었네. 이 몸이 무겁기는 태산도 가벼웁고. 굽이치는 바람결 겁나나니 비단옷 생각 없어 입어도 보지 않고 머리만 경대에 넣은 티끌만 가뜩하네. 태안에 아기 배어 열 달이 다가 오니 순산이 언제련가. 손꼽아 기다리네. 나날이 기운이 없어 중병든 사람 같고. 어제도 오늘날도 정신이 혼미하다. 무섭고 두려움 이루 다 기억하랴, 눈물만 시름없이 옷깃을 적도다. 슬픔을 머금은 채 친척께 하소연이 아마도 이번에는 죽을까 겁이 나고 어지신 어머님이 이내 몸 낳으실때 오장을 육부까지 찢기고 어기는듯 정신이 혼미하고 몸 마저 무너지니 끝없이 흐르는 피, 소와 양 잡았는듯. 아기가 충실하다 말 들을 땐 반갑고 기쁜 마음 비길데 없었건만. 기쁨이 진정되니 슬픈 맘 다시 나며 아프고 괴로움이 온몸에 사무치네. 부모의 깊은 은혜, 바다로 비유하리. 귀엽게 사랑하심 한땐들 어길 건가. 단것은 모두 뱉아 아기를 먹이시고 쓴것만 삼키면서 얼굴도 찡기지 않네. 사랑이 깊으시니 참을 길이 없고 은공이 높으시매 슬픔이 몇 굽일세. 어머님의 일편단심 아기배 불리어서 사흘을 굶으신들 어찌 다 마다하리 이내 몸 젖은 자리 백번이나 싫다하리. 아기는 어느 때나 마른 곳 눕히시며 두 젖을 번갈아서 아이 배 불리시고 찬바람 쏘일 쇠라 소매로 가리우네. 아기를 돌보노라 잠한번 편안히 자랴. 두둥실 둥둥실 끌어안아 놀리시니 아가만 편하다면 무언들 사양하며. 어머님 이내 몸이야 어댄들 어떠하리. 어머니 크신 은혜 땅에나 견주리까. 아버님 높은 공덕 하늘에 비기리까. 높고 큰 부모 은덕 천지와 같사오니.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 뜻 다를쏘냐 눈과 코 없더라도 조금도 밉잖거늘 손과 발 못쓴다고 시름함이 있으리. 배 갈라 낳은 자신 병신이든 귀여워 온 종일 사랑해도 내 정성 그지없네. 지난 날 이내 얼굴 꽃보다 어여뻐라. 옥같이 아름답고 솜같이 보드라워 양미간 그린 입술 버들잎 부끄럽고 두뺨의 도홍빛은 연꽃도 수줍었네. 은혜가 깊을수록 내 얼굴 야위었고. 기저귀 빠느라고 손발이 거칠었네. 아들딸 기르노라 고생을 말도 마라. 어머니 꽃얼굴에 주름살이 잡히었네. 죽어서 영이별도 잊을 수 없거니와. 살아서 생이별은 내마음 끊노매라. 아들이 집을 떠나 타향에 가게되면 부모의 슬픔마음 그곳을 따라가네 이 맘은 밤낮으로 자식을 생각하고 흐르는 두 눈물이 천줄기 만줄기라. 원숭이 새끼 사랑 창자를 끊다더니. 부모의 자식걱정 그 보다 덜 하리리까. 어버이 크신 은혜 바다에 비길껀까. 산보다 크신 은혜 어떻게 갚사오리. 자식의 갖은 고생 대신 하기 소원이요. 아들딸 괴로우면 부모맘 편치 않아 아들딸 길을 떠나 먼 곳에 간다하면 밤이면 추울세라. 낮이면 줄일세라. 아이들 잠깐동안 괴로움 받더라도. 부모의 근심걱정 하루가 삼추로다. 아버지 어머니의 그 은혜 어떻떠냐. 자식을 생각는 맘 잠시도 쉬오리까. 서거나 앉았거나 마음이 따라가고 멀거나 가깝거나 애정은 다름없네. 늙으신 부모 나이 백살이 되어서도 여든된 아들 딸을 행여나 걱정하네 부모의 깊은 은정 언제나 끊질 건가. 이 몸속 다한 뒤에도 잊을수 없을진저. 부처님은 또 아난에게 이렇게 말씀 하시었다. 내가 중생들을 보니 비록 사람은 되었으나 마음과 행실이 어리석고 미련하여 부모의 큰 은혜와 공덕은 생각하지 못하고 공경하지 아니하며 은혜를 저버리고 인자한 마음이 없어 효도하지 아니 하면 의리가 없느니라. 어머니가 아기를 밴지 열달동안 일어나고 앉은 것이 자유롭지 못하여 무거운 짐을 진것같고. 음식이 잘 내리지 아니하여 오랜 병을 앓은 사람 같으며 만삭이 되어 순산할 때에는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잠깐 동안 좋고 나쁜 것이 아기에게 해가 될까 염려하며 양이라도 잡은 것 같이 피가 흘러 자리를 적시느니라. 이러한 고생을 겪으면서 아기를 낳고는 쓴 것은 삼키고 단것은 뱉아서 아기를 먹이면서 업어 기르고 부정한 똥오줌을 받아내면서 부정한 것을 빨래하되 귀찮은줄 모르며 더운 것도 참고, 추운 것도 참으면서 고생되는 것을 싫어하지 아니하며 마른 데는 아기를 누이고 젖은 데에선 어머니가 자며 삼년동안 어머니의 흰피 젖을 먹여서 어린아이가 자라나면 학문과 예절을 가르치고 시집 보내며 벼슬도 시키고 직업도 구하여 주며 수고로 지도하여서 애써 기르는 일이 끝나더라도 은정이 큰 것이라 말하지 아니 하느리라. 아들 딸이 만일 병이 들면 부모도 병이 나고 자식의 병이 나아야 부모의 병도 비로소 나으니라. 이렇게 갖은 애를 써서 기르면서 어른 되기를 희망하였건만, 자식이 성장한 뒤는 그러한 은공도 모르고 도리어 불효하고 불공하여 부모와 함께 말할적에는 대답이 불순하고 눈을 흘기고 눈동자를 굴리면서 능멸히 여기며 형제간에 욕설하고 싸우며 친척들을 헐뜯고 예의가 없어 규모를 따르지 아니하며 부모의 이러는 말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형제간에 말할 적에는 일부로 어거장 치며 나가거나 들어올 때에도 어른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말과 행동이 버릇없고. 괴상하며 제멋대로 일을 행하느니라. 부모로는 훈계하여 책망하고 어른들은 그른 것을 일러줄 것이어늘 철없다 용서하고 손자들이 덮어주기만을 하여 점점 자라면서 머털없고 괘괘하여 순종하지 아니하고 잘못된 일도 항복하지 아니하며 도리어 성을 내느리라. 좋은 친구를 버리고 나쁜 사람을 사귀며 습관은 천성이 되어서 드디어 허망한 일을 꾀하기 쉬우며 혹 남의 꾀임에 빠져 타향으로 돌아다니면 부모를 멀리 여의고 고향을 등지며 혹은 장사를 한다거나 군대에 따라 다니면서 엄벙덤벙 세월을 허송하다가 어찌되어 결혼을 하게 되면 살림에 끄달리어 오래도록 본집에 돌아오지 아니하느리라. 이렇게 타향으로 다니면서 삼가하고 조심하지 아니하다가 혹 남의 모략에 빠져 그른일을 범하기고 하여 그로 말미암아 형벌을 받고 옥중에 구금도 되며 혹 모진 병환에 걸리어 무수한 곤경을 당하거나 혹 앵난을 만나 춥고 배고픔을 면한길이 없게 될 적에 돌아 돌보아 주는 사람은 없고 여러 사람의 천대를 받으며 혹은 길거리에 나앉아 필경에 죽게 되더라도, 구호할 사람이 없고 죽은 송장까지도 땅속에 묻히지 못하여 붇고 썩으며 볕에 쪼이며 바람에 불리며 해골이 낭자하여 타향의 모래바닥에나 풀밖에 뒹굴게 되면 부모 친척들과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되느니라. 부모의 마음은 자식을 따라 길이 걱정하기도 하고 혹은 피눈물을 흘리다가 눈이 어둡기도 하며 혹은 너무도 슬퍼하다가 병이 되기도 하며, 혹은 자식을 기다리다가 몸이 쇠약하여 죽게되면 외로운 혼이 원한이 되어서 끝끝내 잊어버리지 못하며. 혹은 아들이 효순 가도의 효를 본받지 아니하고 이단의 무리들과 어울려 불한하고 포악해져서 나쁜 짓을 일삼는다거나 남을 구타도 하고 절도 강도를 감행하기도 하여 이웃에 까지도 폐해를 끼치기도 하며 술먹고 노름하고 여러 가지 죄를 저질러 형제간에 누를 끼치거나 부모에게 걱정을 시키기도 하며 집안에 집을 나갔다가 늦게야 돌아오기도 하면서 어버이로 하여금 근심케 하느니라. 부모의 헐벗고 배 곯는 것은 아는 체 하지 않고 조석이나 초하루 보름으로 봉양할 것은 꿈도 꾸지 아니하며 부모가 나이 늙어 얼굴이 쭈그러지고 기운이 쇠하게 되면 남이 볼까 부끄럽다고 구박하기도 하며 자심하기도 하며 혹은 아비가 홀로 되거나 어미가 홀로 되어 외딴 방에 혼자 있게되면 마치 남의 늙은이가 객으로 와서 의탁하는 것이 생각하여 방을 치우거나 마루를 닦는 일이 없고 한번도 살펴보거나 문안하는 일이 없으면 방이 차고 더운 것이나 옷입고 밥먹는 것 을 아는 체 하지 아니하여 탄식하게 하고 밤낮으로 슬퍼하게 하며 혹시 맛있는 음식을 보면 싸가지고 돌아와서 부모에게 드려야 할것이언만 남들이 비웃는다 하여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고운 음식을 가져다가 처자를 먹일 때는 체면도 불구하고 비루한 짓을 저지르며 아내와 첩과 약속한 일은 꼭꼭이 행하면서도 어버이의 말씀과 부탁은 조금도 어렵게 생각하지 아니 하느니라. 만일 딸 자식이 행여 출가하게 되면 집에서는 그렇게 효순하던 것도 남편을 맞은 뒤에는 점점 불공하게 되어 부모는 조금만 꾸짖어도 곧 원망하면서도 남편에게는 매를 맞아도 달게 여기며 성이 다른 남에게는 정이 깊고 사랑이 간절하면서도 자기의 골육 친척에게는 도리어 생소하며 혹 남편을 따 라 타향에 옮겨가게 되면 부모를 이별하고서도 사모하는 생각이 없이 소식을 끊고 편지 한장 보내지 아니하매 부모로 하여금 간장이 끊어지듯이 생각케 하나니 부모가 딸의 얼굴을 한번보고 싶어하는 것이 목마를 때에 물을 생각하듯이 잠깐도 쉬지 아니 하느니라.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한량없건마는 자식이 불효하는 죄악은 말로 형언할수 없느니라. 그 때의 대중들이 부처님께서 부모의 은덕 말씀하심을 듣고 몸을 일으켜 땅에 던지며 스스로 부딪쳐 온몸의 털구멍마다 피를 흘리며 기절하였다가 소생하여 높은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가슴이 쓰리고 마음이 아프옵니다. 저희들이 지금에야 많은 죄를 지은 줄을 알겠나이다. 이전까지는 캄캄하게 깨닫지 못하였나이다. 이제사 비로소 잘못된 줄을 알고 보니 쓸개까지 부서지는 듯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바라옵건대 세존께서 불쌍히 여기사 구원하여 주소서. 어찌하여야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갚겠나이까. 부처님께서 정중하고 청아하신 음성으로 대중에게 말씀하시었다. 내가 이제 너희들을 위하여 분별하여 설명하리니 자세히 들어라. 설혹, 어떤 사람이 왼 어깨에 아버지를 업고 오른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서 수미산을 백번 천번을 돌아서 가죽이 떨쳐 뼈가 드러나고 뼈가 닳아서 골수가 흐르도록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 없느니라. 설혹, 어떤 사람이 흉년을 당하여서 어버이를 위하여 그 몸의 살을 오려내고 뼈를 갈아 티끌같이 하기를 백천겁이 지나도록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 없느니라. 설혹, 어떤 사람이 손에 잘 드는 칼을 잡고 부모를 위하여 자기의 눈을 도려내어 부처님께 바치기를 백천겁이 지나도록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느리라. 설혹, 어떤 사람이 어버이를 위하여 잘 드는 칼로 자기의 염통을 오려내어 피가 흘러 땅을 적시는 고통을 백천겁을 지나도록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 없느니라. 설혹, 어떤 사람이 어버이를 위하여 백천자루 칼로 자기 몸을 쑤시되 왼쪽에서 찔러 왼쪽으로 뽑기를 백천겁이 지나도록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 없느니라. 설혹, 어떤 사람이 어버이를 위하여 몸에 불을 켜서 여래에게 공양하기를 백천겁을 지나도록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 없느니라. 설혹, 어떤 사람이 어버이를 위하여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며. 백천개의 창끝으로 일시에 몸을 쑤시기를 백천겁이 지나도록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 없느니라. 설혹, 어떤 사람이 어버이를 위하여 백천겁이 지나도록 뜨거운 무쇠 탄환을 삼키어 온 몸이 타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 없느니라. 이때의 대중들이 부처님깨서 말씀하시는 부모의 깊은 은덕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뿌리며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지금 저희들은 막중한 죄인이올시다. 어떻게 하면 부모의 깊은 은혜를 갚을 수 있겠나이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깊은 은혜를 갚으려거든 부모를 위하여 이 경전을 쓰며 부모를 위하여 이 경전을 경전 읽고 외우며 부모를 위하여 죄를 참회하며 부모를 위하여 삼보에게 공양하며 부모를 위하여 제계를 받아 지니며 부모를 위하여 보시하여 복을 지을 것이니 만일 이런 행을 행하면 효도하는 아들이라 할 것이요. 이런 행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니라. 부처님은 다시 아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불효한 사람은 죽은 뒤에 아비옥에 떨어지게 되나니, 이 큰 지옥은 넓이와 길이가 팔만 유순이요 사면에 무쇠 성이 둘러 있는데 무쇠 그물로 둘러싸고 그 땅은 벌겋게 닿은 무쇠로 되었으며 모진 불이 훨훨 타서 맹렬한 불길이 번개같이 번쩍이며 끓는 구리 즙과 무쇠 물을 죄인의 입에 불어 넣으며, 새, 뱀과 구리로 된 개가 항상 불꽃을토하며 불꽃이 지고 굽고 삶아서 살이 타고 기름이 끓어져 고통을 참고 견디우기 어려우며 쇠채찍과 쇠꼬치와 쇠망치와 쇠창이며 칼과 금이 구름 쏠리듯 비가 오듯 공중에 내려와서 사람을 갈기고 후리고 찌르고 해서 죄인을 괴롭히되 여러 겁을 지나면서 고통을 받아 잠깐도 쉴 사이가 없으며 또 다른 지옥에 들어가서 머리에 불 화로를 이고 무쇠 차로 사지를 찢으며 창자가 쏟아지고 골육이 낭자하게 되어 하루에도 천번 살고 만번 죽나니 이렇게 고통을 받는 것은 모두 전생에 불효한 오역죄를 지었으므로 이러한 죄보를 받을 것이니라. 그때의 대중들이 부처님께서 부모의 은덕을 말씀하심을 듣고 눈물 흘리며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희들이 오늘날 어떻게 하여야 부모의 깊은 은덕을 갚겠나이까. 만일 부모의 은덕을 갚으려거든 부모를 위하여 경전을 다시 널리 펼치면 이것이 참으로 부모의 은덕을 갚는 것이니라. 경전 한 권을 만들면 한 부처님을 뵈올 것이오. 백권을 만들면 백 부처님을 뵈올 것이요. 천권을 만들면 천 부처님을 뵈올 것이요. 만 권을 만들면 일만 부처님을 뵈올 것이니. 이 사람의 경전을 만든 공덕으로 말미암아 여러 부처님들이 항상 오시어서 보호하시므로 이 사람의 부모로 하여금 천상에 태어나서 여러 가지 즐거움을 받으며 영원히 지옥고를 면하게 할 것이니라. 이 때의 대중가운데 있던 아수라가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인비인과 하늘과 용하차와 건달과와 여러 작은 나라 임금들과 전륜성왕들과 모든 대중의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곽과원을 세웠다. 저희들이 오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차리리 이 몸을 티끌 같이 부수어서 백천겁을 지날지라도 맹세코 여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겠나이다. 차라리 백천겁 동안에 혀를 백유순되게 빼어내어 보섭으로 갈아서 피가 흘러 강이 되더라도 맹세코 여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겠나이다. 차라리 백천자루 칼로서 이 몸을 좌우로 찌르고 뽑아내더라도 맹세코 여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겠나이다. 차라리 철망으로 이몸을 묶어서 백천겁을 지나더라도 맹세코 여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겠나이다. 차라리 작두와 방아로 이 몸을 찢고 부수어 천만 조각을 내어 가죽과 살과 뼈가 모두 가루가 되기를 백천겁을 지나더라도 마침내 여래의 가르치심을 어기지 않겠나이다. 이때, 아난이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 아난아, 이 경은 대부모은중경이니 이렇게 이름하여 너희들이 받들어 가질 지니라. 이때의 대중 가운데 천상 사람 세간 사람과 아수라 등에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아주 기뻐하여 믿어 받들고 그대로 행하여 경애하며 물러갔느니라. “옴”의 뜻 ━━━━━━━━━━━━━━━━━━━━━━━━━━━━━ [ 문 ] 진언 앞에는 대개「옴」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진언은 해석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옴자에 대하여 뜻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 답 ] 진언은 번역하지를 않는 것이 관례입니다. 진언은 범어이므로 당연히 뜻이 있습니다. 수행상 번역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므로 옛부터 번역하지 않았는데 뜻도 여러 가지를 지니고 있어 한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옴자에 대해서 참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옴은 범어 (om)의 음사입니다. 기도할 때에 쓰는 말로 신성한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여 인도에서는 불교 이전부터 기도어로써 쓰이고 철학 종교서의 첫머리에 두었다고 합니다. 원래의 음은 아(a)-우(u)-움(m)의 합성된 것으로써 부라만교에서 특별히 존중하는 3신을 뜻하기도 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진언 첫머리에 두는 것은 다 아는 바입니다. 수호국계다라니경에서는 옴은 부처님의 법신․보신․화신의 3신을 나타낸 것이라고하여 옴자를 관할 것을 권하고 있고 그 공덕으로 무상보리를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옴자에는 귀명, 공양, 3신(三身), 깨달음, 섭복(攝伏)의 5가지 뜻이 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옴자가 법신, 보신, 화신 3신을 포함한 큰 뜻을 지닌 것으로 안다면 옴자를 염하고 관하는 방법도 얼마간 이해가 될 줄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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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이란
금강과 같이 견고하여 어떠한 번뇌와 집착도 깨뜨려버릴수 있는 부처님 말씀이라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읽혀지고 유통되었던 경전이다. 원명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또는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이라고도 한다. 반야부 계통의 경전 중 반야심경(般若心經)과 더불어 가장 많이 독송되었다. 금강경은 반야부 계통 경전의 핵심인 공사상(空思想)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해공제일(解空第一)인 수보리(須菩提)가 금강경의 주인공이란 점은 이 경전의 내용을 짐작케 하고 있다. 하지만 공(空)자가 한 자(字) 도 나타나지 않는 것도 금강경의 특이한 점이다. 아직 공의 개념이 정립되기 전의 경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금강경의 성립시기를 원시대승(原始大乘) 시대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금강경은 내용이 3백 송(頌) 정도 되기 때문에 삼백송반야(三百頌般若)라고도 부른다. 특히 금강경은 선종의 6조 혜능(慧能)이 크게 깨달은 경전으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의 대목이 그것이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킬지니라”. 금강경의 핵심과 요체가 들어 있는 문구라 할수 있다. 일체의 집착에서 해탈초월한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금강경은 전 세계 각지에서 널리 읽히고 있는 불교의 베스트셀러다. 아시아의 번역본은 물론이거니와 19세기에 들어서는 영국 불란서 독일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 한역은 6종이 나와 있으나 구마라습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한역으로는 조선 세종때 시작되어 성종때 완성된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가 있다. 주석서는 금강경의 명성에 걸맞게 헤아릴수 없이 많이 나왔다. 대략 8백여가지의 주석서가 있다고 한다. 심지어 유가와 도가에서도 주석서를 낼 정도이니 금강경이 얼마나 인기있는 경전인지를 잘 알수 있을 것이다. 금강과 같이 견고하여 어떠한 번뇌와 집착도 깨뜨려버릴수 있는 부처님 말씀이라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읽혀지고 유통되었던 경전이다. 원명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또는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이라고도 한다. 반야부 계통의 경전 중 반야심경(般若心經)과 더불어 가장 많이 독송되었다. 금강경은 반야부 계통 경전의 핵심인 공사상(空思想)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해공제일(解空第一)인 수보리(須菩提)가 금강경의 주인공이란 점은 이 경전의 내용을 짐작케 하고 있다. 하지만 공(空)자가 한 자(字) 도 나타나지 않는 것도 금강경의 특이한 점이다. 아직 공의 개념이 정립되기 전의 경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금강경의 성립시기를 원시대승(原始大乘) 시대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금강경은 내용이 3백 송(頌) 정도 되기 때문에 삼백송반야(三百頌般若)라고도 부른다. 특히 금강경은 선종의 6조 혜능(慧能)이 크게 깨달은 경전으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의 대목이 그것이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킬지니라”. 금강경의 핵심과 요체가 들어 있는 문구라 할수 있다. 일체의 집착에서 해탈초월한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금강경은 전 세계 각지에서 널리 읽히고 있는 불교의 베스트셀러다. 아시아의 번역본은 물론이거니와 19세기에 들어서는 영국 불란서 독일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 한역은 6종이 나와 있으나 구마라습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한역으로는 조선 세종때 시작되어 성종때 완성된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가 있다. 주석서는 금강경의 명성에 걸맞게 헤아릴수 없이 많이 나왔다. 대략 8백여가지의 주석서가 있다고 한다. 심지어 유가와 도가에서도 주석서를 낼 정도이니 금강경이 얼마나 인기있는 경전인지를 잘 알수 있을 것이다.
금강경 (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대립 분별 집착 버려야 참마음 禪은 일상속 반야실현 강조 금강경에는 “여래께서는 마음의 흐름은 마음의 흐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흐름이라고 한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즉비(卽非)의 논리가 마음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금강경은 바로 이어 “과거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러면 한 순간도 쉼 없이 흘러가는 마음은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 우리는 커다란 것을 단번에 파악할 수 없을 때, 작은 부분으로 쪼개어 하나 하나를 살펴보고 다시 이를 결합하여 전체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마음을 과거·현재·미래로 쪼갠다. 이 때 미래는 아직 오직 않은 것이어서 알 수 없는 것이며, 과거는 이미 가버린 것이어서 붙잡을 수 없다. 불가득이다. 그러면 현재는 어떤가. 올해는 내년과 작년 사이에 있어 제법 긴 시간인 것 같다. 그러나 이번 달은 지난달과 다음달 사이에 있으며, 오늘은 내일과 어제 사이에 있다. 우리는 하루를 시간으로, 시간을 분으로, 분을 초로 쪼갤 수 있으며, 이렇게 쪼개는 일은 조금이라도 길이가 있다면 언제까지나 가능하다. 더 이상 분할되지 않는 것은 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제 소위 ‘현재’는 미래와 과거의 경계에 지나지 않게 된다. 현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심도 불가득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현재이며,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현재이다. 결국 시간은 현재가 중첩된 것이며, 현재가 흘러가면서 남기는 궤적이다. 그런데 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무리 겹쳐진다고 해도 길이를 갖게 되는가. 영에다 영을 아무리 더해도 영이다. 영에 지나지 않는 현재가 아무리 쌓여도 시간의 흐름을 구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확실히 있으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분석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마음은 찾을 길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석적 사고, 분별의식을 버려야 한다. ‘말해도 30방, 말하지 않아도 30방’으로 유명한 덕산(德山, 780-865) 스님이 경에는 밝으나 아직 선의 세계를 알지 못했을 때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스님은 유식에 깊은 조예가 있으며 금강경도 깊이 연구하여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던 중 남방에서 선종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그 본성을 알면 곧 성불한다’는 말을 듣고 이는 성불의 어려움을 모르는 마구니의 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를 논파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풍주 땅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자 한 식당에 들렸다. 이 집을 운영하는 노파가 점심을 하기 전에 질문을 하였다. “등에 진 걸망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덕산이 금강경이라 대답하자, 노파는 다시 질문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님은 점심을 하고자 하는데, 점찍고자 하는 그 마음(點心)은 과거심입니까, 미래심입니까, 현재심입니까.” 이에 대해 덕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점심을 하지 못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간단히 요약하여 분별심은 버려져야 한다. 무심(無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심은 마음이 텅 비어버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무심은 곧 일심(一心)이며, 이 일심이야말로 정심(正心)이다. 과거·현재·미래는 세 개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 즉 절대적 현재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운문(雲門, 864-949) 스님의 ‘하루 하루가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는 말은 영원이 현재에 응축되어 있음을 지극히 간단하게 그러나 아주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루는 어제, 오늘의 하루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eternal now)인 것이다. 금강경에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應無所住 而生其心)는 구절이 있다. 선종의 6조 혜능(慧能, 638-713) 스님이 바로 이 대목을 듣고 깨우쳤다고 하여 더욱 유명해진 구절이다. 금강경의 이 구절은 소박하게는 대립·분별·집착을 버린 참 마음을 가져야 함을 지적하고, 그럼으로써 너와 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보시를 행할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선에서는 깨달음의 요체가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 진술이 주체적 명제로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이 일상성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상성은 절대성에 다름 아니다. 금강경은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반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절대적 반야를 일상화하고 또 일상에서 절대성을 발견하는 것은 선의 몫이다. 선종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다. 정호영<충북대 철학과 교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대립 분별 집착 버려야 참마음 禪은 일상속 반야실현 강조 금강경에는 “여래께서는 마음의 흐름은 마음의 흐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흐름이라고 한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즉비(卽非)의 논리가 마음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금강경은 바로 이어 “과거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러면 한 순간도 쉼 없이 흘러가는 마음은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 우리는 커다란 것을 단번에 파악할 수 없을 때, 작은 부분으로 쪼개어 하나 하나를 살펴보고 다시 이를 결합하여 전체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마음을 과거·현재·미래로 쪼갠다. 이 때 미래는 아직 오직 않은 것이어서 알 수 없는 것이며, 과거는 이미 가버린 것이어서 붙잡을 수 없다. 불가득이다. 그러면 현재는 어떤가. 올해는 내년과 작년 사이에 있어 제법 긴 시간인 것 같다. 그러나 이번 달은 지난달과 다음달 사이에 있으며, 오늘은 내일과 어제 사이에 있다. 우리는 하루를 시간으로, 시간을 분으로, 분을 초로 쪼갤 수 있으며, 이렇게 쪼개는 일은 조금이라도 길이가 있다면 언제까지나 가능하다. 더 이상 분할되지 않는 것은 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제 소위 ‘현재’는 미래와 과거의 경계에 지나지 않게 된다. 현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심도 불가득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현재이며,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현재이다. 결국 시간은 현재가 중첩된 것이며, 현재가 흘러가면서 남기는 궤적이다. 그런데 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무리 겹쳐진다고 해도 길이를 갖게 되는가. 영에다 영을 아무리 더해도 영이다. 영에 지나지 않는 현재가 아무리 쌓여도 시간의 흐름을 구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확실히 있으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분석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마음은 찾을 길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석적 사고, 분별의식을 버려야 한다. ‘말해도 30방, 말하지 않아도 30방’으로 유명한 덕산(德山, 780-865) 스님이 경에는 밝으나 아직 선의 세계를 알지 못했을 때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스님은 유식에 깊은 조예가 있으며 금강경도 깊이 연구하여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던 중 남방에서 선종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그 본성을 알면 곧 성불한다’는 말을 듣고 이는 성불의 어려움을 모르는 마구니의 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를 논파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풍주 땅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자 한 식당에 들렸다. 이 집을 운영하는 노파가 점심을 하기 전에 질문을 하였다. “등에 진 걸망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덕산이 금강경이라 대답하자, 노파는 다시 질문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님은 점심을 하고자 하는데, 점찍고자 하는 그 마음(點心)은 과거심입니까, 미래심입니까, 현재심입니까.” 이에 대해 덕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점심을 하지 못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간단히 요약하여 분별심은 버려져야 한다. 무심(無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심은 마음이 텅 비어버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무심은 곧 일심(一心)이며, 이 일심이야말로 정심(正心)이다. 과거·현재·미래는 세 개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 즉 절대적 현재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운문(雲門, 864-949) 스님의 ‘하루 하루가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는 말은 영원이 현재에 응축되어 있음을 지극히 간단하게 그러나 아주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루는 어제, 오늘의 하루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eternal now)인 것이다. 금강경에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應無所住 而生其心)는 구절이 있다. 선종의 6조 혜능(慧能, 638-713) 스님이 바로 이 대목을 듣고 깨우쳤다고 하여 더욱 유명해진 구절이다. 금강경의 이 구절은 소박하게는 대립·분별·집착을 버린 참 마음을 가져야 함을 지적하고, 그럼으로써 너와 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보시를 행할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선에서는 깨달음의 요체가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 진술이 주체적 명제로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이 일상성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상성은 절대성에 다름 아니다. 금강경은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반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절대적 반야를 일상화하고 또 일상에서 절대성을 발견하는 것은 선의 몫이다. 선종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다. 정호영<충북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