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대립 분별 집착 버려야 참마음 禪은 일상속 반야실현 강조 금강경에는 “여래께서는 마음의 흐름은 마음의 흐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흐름이라고 한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즉비(卽非)의 논리가 마음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금강경은 바로 이어 “과거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러면 한 순간도 쉼 없이 흘러가는 마음은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 우리는 커다란 것을 단번에 파악할 수 없을 때, 작은 부분으로 쪼개어 하나 하나를 살펴보고 다시 이를 결합하여 전체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마음을 과거·현재·미래로 쪼갠다. 이 때 미래는 아직 오직 않은 것이어서 알 수 없는 것이며, 과거는 이미 가버린 것이어서 붙잡을 수 없다. 불가득이다. 그러면 현재는 어떤가. 올해는 내년과 작년 사이에 있어 제법 긴 시간인 것 같다. 그러나 이번 달은 지난달과 다음달 사이에 있으며, 오늘은 내일과 어제 사이에 있다. 우리는 하루를 시간으로, 시간을 분으로, 분을 초로 쪼갤 수 있으며, 이렇게 쪼개는 일은 조금이라도 길이가 있다면 언제까지나 가능하다. 더 이상 분할되지 않는 것은 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제 소위 ‘현재’는 미래와 과거의 경계에 지나지 않게 된다. 현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심도 불가득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현재이며,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현재이다. 결국 시간은 현재가 중첩된 것이며, 현재가 흘러가면서 남기는 궤적이다. 그런데 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무리 겹쳐진다고 해도 길이를 갖게 되는가. 영에다 영을 아무리 더해도 영이다. 영에 지나지 않는 현재가 아무리 쌓여도 시간의 흐름을 구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확실히 있으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분석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마음은 찾을 길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석적 사고, 분별의식을 버려야 한다. ‘말해도 30방, 말하지 않아도 30방’으로 유명한 덕산(德山, 780-865) 스님이 경에는 밝으나 아직 선의 세계를 알지 못했을 때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스님은 유식에 깊은 조예가 있으며 금강경도 깊이 연구하여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던 중 남방에서 선종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그 본성을 알면 곧 성불한다’는 말을 듣고 이는 성불의 어려움을 모르는 마구니의 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를 논파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풍주 땅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자 한 식당에 들렸다. 이 집을 운영하는 노파가 점심을 하기 전에 질문을 하였다. “등에 진 걸망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덕산이 금강경이라 대답하자, 노파는 다시 질문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님은 점심을 하고자 하는데, 점찍고자 하는 그 마음(點心)은 과거심입니까, 미래심입니까, 현재심입니까.” 이에 대해 덕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점심을 하지 못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간단히 요약하여 분별심은 버려져야 한다. 무심(無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심은 마음이 텅 비어버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무심은 곧 일심(一心)이며, 이 일심이야말로 정심(正心)이다. 과거·현재·미래는 세 개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 즉 절대적 현재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운문(雲門, 864-949) 스님의 ‘하루 하루가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는 말은 영원이 현재에 응축되어 있음을 지극히 간단하게 그러나 아주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루는 어제, 오늘의 하루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eternal now)인 것이다. 금강경에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應無所住 而生其心)는 구절이 있다. 선종의 6조 혜능(慧能, 638-713) 스님이 바로 이 대목을 듣고 깨우쳤다고 하여 더욱 유명해진 구절이다. 금강경의 이 구절은 소박하게는 대립·분별·집착을 버린 참 마음을 가져야 함을 지적하고, 그럼으로써 너와 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보시를 행할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선에서는 깨달음의 요체가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 진술이 주체적 명제로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이 일상성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상성은 절대성에 다름 아니다. 금강경은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반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절대적 반야를 일상화하고 또 일상에서 절대성을 발견하는 것은 선의 몫이다. 선종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다. 정호영<충북대 철학과 교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대립 분별 집착 버려야 참마음 禪은 일상속 반야실현 강조 금강경에는 “여래께서는 마음의 흐름은 마음의 흐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흐름이라고 한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즉비(卽非)의 논리가 마음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금강경은 바로 이어 “과거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러면 한 순간도 쉼 없이 흘러가는 마음은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 우리는 커다란 것을 단번에 파악할 수 없을 때, 작은 부분으로 쪼개어 하나 하나를 살펴보고 다시 이를 결합하여 전체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마음을 과거·현재·미래로 쪼갠다. 이 때 미래는 아직 오직 않은 것이어서 알 수 없는 것이며, 과거는 이미 가버린 것이어서 붙잡을 수 없다. 불가득이다. 그러면 현재는 어떤가. 올해는 내년과 작년 사이에 있어 제법 긴 시간인 것 같다. 그러나 이번 달은 지난달과 다음달 사이에 있으며, 오늘은 내일과 어제 사이에 있다. 우리는 하루를 시간으로, 시간을 분으로, 분을 초로 쪼갤 수 있으며, 이렇게 쪼개는 일은 조금이라도 길이가 있다면 언제까지나 가능하다. 더 이상 분할되지 않는 것은 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제 소위 ‘현재’는 미래와 과거의 경계에 지나지 않게 된다. 현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심도 불가득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현재이며,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현재이다. 결국 시간은 현재가 중첩된 것이며, 현재가 흘러가면서 남기는 궤적이다. 그런데 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무리 겹쳐진다고 해도 길이를 갖게 되는가. 영에다 영을 아무리 더해도 영이다. 영에 지나지 않는 현재가 아무리 쌓여도 시간의 흐름을 구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확실히 있으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분석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마음은 찾을 길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석적 사고, 분별의식을 버려야 한다. ‘말해도 30방, 말하지 않아도 30방’으로 유명한 덕산(德山, 780-865) 스님이 경에는 밝으나 아직 선의 세계를 알지 못했을 때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스님은 유식에 깊은 조예가 있으며 금강경도 깊이 연구하여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던 중 남방에서 선종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그 본성을 알면 곧 성불한다’는 말을 듣고 이는 성불의 어려움을 모르는 마구니의 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를 논파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풍주 땅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자 한 식당에 들렸다. 이 집을 운영하는 노파가 점심을 하기 전에 질문을 하였다. “등에 진 걸망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덕산이 금강경이라 대답하자, 노파는 다시 질문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님은 점심을 하고자 하는데, 점찍고자 하는 그 마음(點心)은 과거심입니까, 미래심입니까, 현재심입니까.” 이에 대해 덕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점심을 하지 못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간단히 요약하여 분별심은 버려져야 한다. 무심(無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심은 마음이 텅 비어버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무심은 곧 일심(一心)이며, 이 일심이야말로 정심(正心)이다. 과거·현재·미래는 세 개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 즉 절대적 현재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운문(雲門, 864-949) 스님의 ‘하루 하루가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는 말은 영원이 현재에 응축되어 있음을 지극히 간단하게 그러나 아주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루는 어제, 오늘의 하루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eternal now)인 것이다. 금강경에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應無所住 而生其心)는 구절이 있다. 선종의 6조 혜능(慧能, 638-713) 스님이 바로 이 대목을 듣고 깨우쳤다고 하여 더욱 유명해진 구절이다. 금강경의 이 구절은 소박하게는 대립·분별·집착을 버린 참 마음을 가져야 함을 지적하고, 그럼으로써 너와 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보시를 행할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선에서는 깨달음의 요체가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 진술이 주체적 명제로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이 일상성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상성은 절대성에 다름 아니다. 금강경은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반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절대적 반야를 일상화하고 또 일상에서 절대성을 발견하는 것은 선의 몫이다. 선종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다. 정호영<충북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