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스님─ 기도를 방해하는 요소들

기도를 방해하는 요소들 -광덕큰스님 – 기도 염불하는데 방해 요소는 여러 가지 있다.

대개 우리의 순수한 본성, 공덕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명이라는 망상 구름인데, 우리가 일심 염불할 때 우리를 장애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무명이란 본래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가 본성을 잊고 있는데서 주어지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심으로 염불하는 자리에는 무명의 구름이 없다.

오직 본성 공덕이 그대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1.

일심으로 염불하라 그러나 염불하더라도 일심이 된다는 것이 용이한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뭉게 구름 같은 생각이 떠 오르고 오히려 염불하는 생각을 사로잡는다.

이것에 무명에서 나오는 망상이다.

이 망상을 퇴치하는 방법은 일심 염불뿐이다.

망상을 상대하지 않고 오직 염불만 하는 것이 최상책이다.

망상에 빠져 들면 일심은 아니다.

2.

마음에 어두운 생각을 갖지 말라.

그 밖에 또 한 가지 있다.

마음의 법칙의 활용이다.

대개 우리의 본 생명은 무한한 조화력이고 성취력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마음의 조정자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염불하면서 생각 속에 불안을 안고 있거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거나, 실패, 병고 등 소극적이며 어두운 현상 경계를 마음에 두고 있을 때 우리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다.

마음에 어두운 무명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본성이 가지는 긍정적이며 밝고 적극적인 생각을 마음에 채우고, 오히려 소망하는 것이 완전히 이루어진 상태를 명확하게 자기 마음에 그리고 신념의 풀로 굳게 부치고 부동하고 평화로운 마음, 활기 넘치는 마음으로 염불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3.

참된 소망을 가져야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할 것은 본성 공덕에 어긋나는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 즉 부처님의 공덕 바다는 우애와 협력, 자비와 조화, 향상 진보가 본질적 양태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투쟁 대립이나 다른 이의 파멸이나 불화를 가져오는 소망을 세우고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진보를 방해하는 기도도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물론 강한 염력을 집중적으로 작용시켜 남을 해치는-사리사욕에 치우치거나 불합리한 소망을 이룰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다.

진리의 근본 뒷받침이 없는 일시적 성공은 조만간 전복된다.

4.

가족, 이웃과 대립하지 말라 부조화한 인간 과계, 즉 가족이나 친구 간의 갈등이나 대립만큼 또한 괴로운 것도 없다.

기도를 통하여 파국에 이른 인간관계에 해결될 길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에도 부부 또는 형제, 친구 등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다음에 일반적 경우를 말해 본다.

무엇보다 일심 염불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5.

기도는 언제하는 것이 좋은가? 잠들기 전, 또는 아침이 좋겠으나 어느 때나 틈나는 대로 기도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6.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 염불하기 전에, 또는 평소 생각하기를 모두가 하나의 대 진리, 즉 부처님 공덕의 나툼이며 그 본성이 불성이라는 것을 깊이 믿어야 한다.

그래서 모두는 형제 자매다.

겉보기에 아무리 무도(無道)하고 거칠게 보이더라도 실로는 불공덕의 나툼이며 지극히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그는 진정한 나의 존경과 사랑과 이해를 바라고 있다.

그는 남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하고 있으며 나로부터 이해를 절실히 바라고 있다.

잘못을 용서하고 싶어도 그의 본성에 실로 용서받을 허물이 없는 것이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존경한다.

그에게 감사한다.

이런 생각을 몇 번이고 일으켜서 자기 마음 속에 상대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이해를 가득 채우고 이것이 실로는 우리의 본 생명인 부처님 공덕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을 관하여야 한다.

그리고 일심으로 염불한다.

이 관(觀)과 염불이 중요하다.

이렇게 할 때 사람과의 통로는 열린다.

모두 나의 이해자가 되고 협력자가 되고 대립은 풀릴 길이 열린다.

이렇게 기도하고 관하고 성실을 말과 행동으로 표할 때, 모든 이웃과 협력 관계는 이루어진다.

-광덕큰스님 저, ‘행복의 법칙’에서 발췌 –

광덕스님─ 기도 성취하는 사람

기도 성취하는 사람 -광덕 스님- (월간 佛光) 불교에 있어 기도한다는 것은 법성진리의 힘을 활용하는 것이다.

법성진리는 일체 존재의 근원이며, 일체 진리의 근원이므로 법성진리의 발동으로 이루어 지지 않는 것은 없다.

바른 믿음 바른 기도에 의해서 사태는 반드시 바뀌고 기도는 성취된다.

그런데도 때로는 바르게 기도를 했어도 사태가 한층 악화하는 듯한 상태가 나타날 때가 있어 기도하는 자를 놀라게 한다.

혹이나 기도 성취가 되지 않고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고 흔들릴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부처님의 대지혜, 대자비, 대신력을 의심해서는 아니 된다.

기도 중에 사태가 악화하는 듯 나타나는 것은 과거에 지은 바 진리에 어긋난 어두운 마음의 축적이 소멸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음 속에 미혹한 생각이 허물어져 갈 때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다.

마치 종기의 뿌리가 삭아 나오느라고 아픈 증상이 일시적으로 더하는 것과도 같다.

모든 병이나 불행이나 재난은 이것은 마음에 이루어진 어두운 상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미혹상태가 축적되어 어느 정도를 초과했을 때 병이나 불행이나 재난의 상태로 나타난다.

미혹이 적은 사람은 그 독소가 신체 내부에서 중화되거나 흡수되어 큰 병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미혹 축적의 정도가 심하면 병적 증세를 나타내면서 그 미혹상태는 소멸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병은 낫는다.

이렇게 보면 거친 마음의 축적이 허물어 지느라고 나타나는 고통도 실로는 자기 마음이 정화되고 병이 치유되는 과정인 것을 알 수 있다.

기도가 성취되지 않을 때 그 원인도 여러 가지다.

부처님을 믿지 않거나 현상에 대하여 공포심을 내거나 사태가 악화될 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

기도하면서도 이런 문제는 과학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거나 부처님 신력을 이론과 한계를 지어 생각하고 있을 때 기도는 성취되지 않는다.

한때 고통스런 증세가 나타났을 때 ‘병이 악화된다’ 생각하고 악화된 상태를 마음에 생각하고 공포심에 빠진다면 사태는 생각한 대로, 두려워한 대로 악화되어 간다.

부처님께 기도할 때 부처님께서 어떻게 치유하여 주실 것인가.

불행을 제거하여 주실 것인가.

기도성취 과정을 전적으로 부처님의 대자비와 지혜에 맡겨 버릴 것이다.

기도는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부처님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

우리는 가지가지를 소망하고 그 소망을 이룰 방법을 연구하고 그 결론에 대해서 혹은 불안해하고, 혹은 기뻐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현재의 완성뿐만 아니라 영원한 완성, 궁극적 완성, 기나긴 시간 가운데 오늘의 우리 상황을 생각하신다.

그리고 대자비, 대지혜로써 우리를 살피시고 인도하신다.

우리 생각을 비우고 오직 부처님을 믿자.

부처님께서 우리의 완성과 대성취를 바라시는 것은 우리로는 상상도 안 된다.

온전히 부처님께 모두를 맡기고 마음을 비우며 일심염불 감사할 따름이다.

광덕스님 ─세상을 탓하지 말고 마음을 바꾸라

세상을 탓하지 말고 마음을 바꾸라

-광덕스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침의 말씀을 듣고 깊이 믿으며, 남을 부러워하지 않고,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며, 스스로가 행하고 있는 일을 돌이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이 하는 것을 표준삼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아 힘써 닦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믿지않는 사람은 자기 일만을 생각하여 마음이 좁고 언제나 초조 불안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배후에 있는 부처님의 힘, 크신 자비를 믿음으로써 마음이 크고 넓어져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남의 이목을 탓하지 않고 내 자신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 자기 마음 자기 행에 중심을 항상 두고, 스스로 행하고 있는 것을 돌이켜 봅니다.

우리 개인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개성은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이 개성을 어떤 사람은 업보라고 할지 몰라도 사실인즉 개성은 부처님 큰공덕 바다가운데 있는 하나의 싹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잘 키우면 무한공덕의 열매가 거기서 열립니다.

사람마다 얼굴 생김이 다 다름으로 개성이 느껴지고, 저만의 아름다움, 특성을 갖는 것입니다.

꽃밭에 똑같이 빨간 꽃만 있으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꽃이 어울려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운 것이며, 그 천지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몸짓, 발짓도 기계처럼 똑같아서는 역시 멋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개성 하나하나는 모두가 귀합니다.

그런데 이 귀한 개성의 뿌리를 잘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착실하게 행하고 나 자신을 돌이켜 보되, 남이 어떻게 하고있는지 너무 남한테 한 눈 팔지 마십시오 이것이 첫째 대목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부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몸을 소중히 여기되 집착하지 말라.

겉으로는 나 혼자 이렇게 외롭게 일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아도 내 배후에, 내 생명 깊은 곳에 부처님이 함께하고 있고, 부처님의 큰 자비가 함께 있다는 생각으로 흔들리지 말고 초조하지 말고 불안하지 말고 여유있는 너그러움으로 씩씩하게 대해 가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는 사람은 이 몸을 무상(無常)한 것으로 보고 괴로움이 모여드는 근원이라고 보며 악한 일이 흘러나오는 뿌리라고 보고 그 몸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몸을 소중하게 기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즐기고 탐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을 배워 얻고, 법을 이웃에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몸을 다듬지 않으면 목숨을 온전히 하기 어렵고 목숨이 온전하지 못하면 거룩한 가르침을 받아서 몸으로 행할 수도 없고 또한 널리 전하지도 못합니다.

물을 건너고자 하는 사람은 뗏목을 잘 간수하며, 말 타고 여행하는 사람은 말을 잘 돌보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은 그 몸을 소중히 지켜야 합니다.

또한 부처님을 믿는 사람은 의복을 입어도 헛된 치레에 마음을 두지 않으며 수치스러운 것을 가리고 추위와 더위를 막는 데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음식을 먹어도 식욕에 사로잡히지 아니 하고 몸을 길러서 진리의 가르침을 배우고 또한 이것을 남을 위하여 설할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집에 머물러도 또한 이와 같이 향락을 생각하거나 허영을 채우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진리의 집에 머물러 번뇌의 도적을 막고 그릇된 가르침의 풍우를 피하기 위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일에 일신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하여 교만한 마음을 두지 않으며, 오직 깨달음을 위하고 진리의 가르침을 위하며 타인에게 도움 줄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재가불자들은 항상 부모를 섬기고 가족과 자신을 섬기며 부처님을 섬길 마음이어야 합니다.

타인에게 보시할 때는 마음을 비우고 탐심을 없앨 것을 생각하며 사람들의 모임에 있을 때는 부처님 모임에 들 것을 생각하고 어려움을 만났을 때는 무엇에도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얻고자 하여야 합니다.

부처님께 귀의하고서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대도 얻기를 바라고, 법에 귀의하고서는 대중과 더불어 깊은 가르침의 바다에 들어가 큰 지혜를 얻기를 원하며, 승가에 귀의하고서는 대중들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온갖 장애를 없앨 것을 원하여야 합니다.

삶의 진정한 가치 우리들이 항상 배우는 전법지상,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것을 최상의 믿음으로 삼고, 정진으로 삼고, 보은으로 삼고, 마침내 전법을 함으로써 불국토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 우리 불자들의 전법지상입니다.

우리의 몸은 이 모든 법을 닦고 이루어가며 부처님의 법을 전해줄 것이기에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거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양할 때 합장하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하는 사람도 있고, 좀 더 길게 부처님 은혜를 생각하는 게송을 외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때로는 부처님 크신 은혜에 비하면 내 공덕이 적은 것을 참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반드시 빼놓지 않는 것이 “도업(道業)을 이루기 위해서 이 밥을 먹노라.”

하는 오관게의 끝대목입니다.

‘우리가 왜 사는가.

’ ‘우리가 살아가는 가치가 무엇인가.

’ 우리가 사는 목표는 진리를 깨닫고 진리의 법을 이웃에 전해주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이 몸뚱이가 이 몸뚱이로써 끝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이룬다고 하는, 생사를 벗어난다고 하는 불멸의 생명을 이루는 그러한 궁극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법을 전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구원받은 사람, 완성자의 덕을 몸소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것을 최상의 공덕으로 삼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몸을 먹이고 거두는 것도 이렇기 때문에 거두고 먹이는 것이니까 그 목적을 향해서 성실하게 잘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보를 보면 몇 말씀을 적어두었는데 함께 보기로 합시다.

“부처님은 진리다.

눈물로 호소하지 말고 마음을 바꾸라.”

부처님 앞에서 눈물로 무엇을 구하고 원하고 그럴 수도 있는데 부처님은 인정에 팔리는 분이기보다는 진리이신 까닭에 내가 먼저 마음을 바꿔서 진리로 마음을 바꿔라.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고 욕심을 부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애걸복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는 자는 받는다.

이것이 영원한 인과법칙이다.”

주지도 아니 하고 남한테 친절도 베풀지 아니 하고 남한테 조금의 노력도 하지 아니하고 남이 나한테 많이 갖다주기만 바라는 그런 이기주의는 통하지 않습니다.

호흡을 하더라도 호흡을 들이마시고 토하고 해야 사람이 삽니다.

그러나 들이마시기만 하고 토하지 않고 틀어막고만 있다 보면 죽을 것입니다.

토해내야 삽니다.

“주는 자가 받는다.”

이것은 영원한 법칙입니다.

“환경이 나쁘다고 욕하지 말라.

마음을 바꾸자.

처처에 새 천지가 열린다.”

천지가 나쁘고 이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을 바꾸고 보면 환경도 바뀌고, 밉게 보이던 사람들도 내가 마음을 바꾸고 보면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웃도 마찬가지이며, 천지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환경을 탓하지 말고 마음을 바꾸라.

처처에 새 천지가 열린다”는 것을 우리 불자들이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