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암스님─남을 위하면

남을 위하면/

서암스님

이 세상 모두는 다 잘 살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잘 살려고 하지 잘 못 살려고 하는 사람은 아마 약에 쓰려고 구해도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남의 생명을 죽이고 도적질해서 형무소 끌려가는 사람에게 물어 봐도 잘 살려고 했다고 하지 형무소 가서 못 살려고 했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목표는 똑같이 잘 사는 것인데 방법이 어긋나서 세상이 착잡해집니다.

요즘 정치 풍토도 보면 자꾸 수없이 변동하고 있으나 그것 천 번 만 번 바꾼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근본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부처님께서는 인과의 원리를 알고 12인연법을 알아서 잘 사는 법을 제시했건만 사람들은 전부 등지고 삽니다.

그래서 말로만, 구호로만 잘 살려고 하지 점점 더 깜깜한 굴로 기어들어 가는 행동을 많이 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잘못된 정신을 바꾸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잘 하는 사람은 어디 갖다 놓아도 잘 합니다.

못하는 사람은 어디 갖다 놓아도 사고를 냅니다.

그 사람 정신을 고치기 전에는 여기 갖다 놓는다고 잘 되고 저기 갖다 놓는다고 잘 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그 근본을 고치지 않으면 어떠한 제도로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정치도 이 근본정신 세계가 바로 서는 정치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것에는 관심 없고 껍데기 제도만 자꾸 고치려 하니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부처님 법만 이해한다면 하루아침에 정돈이 됩니다.

부처님은 항상 남을 위하라, 자비 보시하라 하십니다.

남을 위한다는 소리가 사실은 자기를 위하는 길입니다.

‘자타불이(自他不二)’라 자신을 위하는 법이 다 남을 위하는 법입니다.

부처님 근본법을 전부 다 망각하고 어떠한 제도로 꿰어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중생들이 마음만 고쳐 먹으면 이 사회가 그대로 태평합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불교 정신이 아니겠어요? 남을 위하는 데는 다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남을 위하는데 무슨 다툼이 있겠습니까? 항상 반목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남을 해치는 데서 모든 문제가 일어나지, 남을 도와주는 사람들로 가득 차면 세상이 어지러워지지 않고 다 잘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평생 먹고 쓸 것 갖고 있어도 더 가지려 하고 온갖 것을 쌓아 놓습니다.

이렇게 자꾸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모아 두니까 물건이 돌아가지 않고 인심이 각박해집니다.

문을 다 열어놓고 물건이 핑핑 잘 돌아 가게 하면 마음도 너그러워지고 문에 쇳대를 채울 일도 없이 서로 잘 살 텐데, 부처님 법을 몰라서 어떻게 되든 무조건 많이 쌓여 놓고 삽니다.

내 욕심대로 하면 잘 살 줄 아는데, 정말 잘 사는 법을 모르는 것이지요.

서로 베풀어 주고 남을 도와주고 스스로 열심히 산다면 천하가 다 자기 재산이고 세상이 평화로울 텐데 모두 불법에 어긋나서 못 사는 것입니다.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지요.

혜국스님─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 진실되게 사는 법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 진실되게 사는 법 –

혜국스님

오늘은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 진실 되게 사는 방법을 이야기해 봅시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는 말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내 감정에 속지 않고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일은 쉽기로 말하면 참으로 쉬운 일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렵기로 말하면 참으로 어려운 일 중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육신, 즉 감정의 덩어리로 된 몸뚱이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넣어주고 성을 내달라고 하면 화를 불같이 내주는 등 감정이 해달라는 대로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사는 시간이 많지, 참마음이 주인되어 행동을 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팔만사천 번뇌 모든 욕심과 진심과 어리석은 망상번뇌가 우리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내 마음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임제 스님은 가는 곳마다 주인 되는 세계를 “수행자가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게 되고 도를 구하게 되면 도를 잃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떻게 주인노릇을 해야 되고 내 주인이 어떠한 자세인가를 잘 표현한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주인을 알아보겠습니까.

과연 내 주인은 어떠한 세계일까요.

모양이 있거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거나 무슨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주인자리가 아닙니다.

허공은 중생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허공에는 아무런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기 때문에 이 조계사 법당은 물론 많은 대중들이 다니거나 소리를 질러도 아무런 탈이 생기지 않습니다.

만약 허공에 모양이 있거나 색깔이 있다면 우리가 마음 놓고 허공에 의지하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허공은 먹물을 끼얹어도 물들지 않고 침을 뱉어도 묻지 않습니다.

바로 이 오염되지 않는 자리를 주인된 자리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몸 안에서 몸이 썩지 않도록 지켜주는 주인공, 법문을 들을 줄 알고 눈을 뜰 줄 알도록 하는 소소영영한 그 기운이 내 마음의 주인공일진대 주인을 내버려두고 감정이 하자는대로, 도적놈이 주인노릇 하도록 가만두어서는 안됩니다.

마음부처라고 하는 법당에 내 스스로 감정과 욕망과 도적놈을 불러들여 주인노릇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일은 부처님을 믿는 제자라면 있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주인공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를 냉철하게 돌아보십시오.

얼마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산당정야좌무언山堂靜夜坐無言 산당의 고요한 밤에 말없이 앉았으니 적적요요본자연寂寂寥寥本自然 조용하고 조용하여 본래의 모습이다.

하사서풍동임야何事西風動林野 서풍은 어찌하여 수풀을 흔드는가 일성한안려장천一聲寒雁?長天 기러기 한 소리가 장천을 울리도다.

여러분의 눈으로 자신의 눈이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입니다.”(대중) 그러면 마음을 갖고 마음을 보면 마음이 보입니까? “안보입니다.”(대중)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찾으려고 하거든요.

찾으려고 한다는 것은 찾는 내가 있고 찾는 대상이 따로 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듯이 마음이라는 것은 찾는 주인과 찾는 대상이 나눠진 상태가 아니고 주와 객이 분리되기 이전 세계입니다.

찾으려고 하면 이미 잃어버리는 것이 되거든요.

그래서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게 됩니다.

또 도를 구하면 도를 잃는 것입니다.

요즘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 급합니다.

빨리 도를 이루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도를 그렇게 빨리 얻을 수 있으면 누가 얻지 못했겠습니까.

또 “요즘 참선을 하는데, 이러이러한 것들이 보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것을 보길 원하는 마음이 아직 남았으니 보이는 겁니다.

그건 그림자지 실상이 아니에요.

보고 싶은 마음의 그림자가 밖에 나가서 황금색으로도 보이고 부처님으로도 보이고 그러는 것이니 절대로 현혹되지 마세요.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천척사륜 직하수 千尺絲綸 直下垂 일파자동 만파수 一波?動 萬波隨 야정수한 어불식 夜靜水寒 魚不食 만선공재 월명귀 滿船空載 月明歸 화두가 무엇입니까.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는 화두가 있는데, 화두가 정전백수자 이 다섯 글자입니까, 아니면 조주 스님이 ‘정전백수자’하기 전 그 마음 속에 숨겨진 의(意), 뜻입니까? 말 나온 다음의 것은 화두가 아닙니다.

그 말 나오기 전, 조주 스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여러분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닌 상태를 화두라고 합니다.

이 화두는 들어가고 나오는 자리가 아니거든요.

‘공’하면 전해질 소리인데 이걸 알아듣는 사람이 흔치 않아요.

‘뜰앞에 잣나무’라는 소리가 나오기 이전 조사 스님의 그 뜻이 화두입니다.

의심을 하기 위한 의심이 아니라 조사 스님들이 이미 보여주었으니 마음의 눈을 떠야 할 것이 아닙니까.

뜨는 방법이 의정이요 의심입니다.

화두라고 하는 것은 그 뜻이 나와 벽이 허물어져버린 상태를 보여준 것이니까 내가 찾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입니다.

내 자신을 대상화시켜 버린 것이고 찾으려고 하는 놈과 찾아야할 대상을 둘로 나눠버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뜻을 읽을 수가 없는거예요.

이 상태로는 백날이 가도 수행이 나아가지 못합니다.

유명한 역사학자 토인비는, 20세기 가장 큰 사건은 불교가 서양에 전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토인비가 지금까지 접한 모든 학문과 사상은 내 것만 옳고 남의 것은 그르다는 것이었는데, 뒤늦게 불교를 알고 보니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는 가르침이거든요.

이 불교야말로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토인비는 어떤 학문, 사상도 해내지 못한 일을 불교가 해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앞서 끌어가야 하고 언제가는 이루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참선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몸뚱이를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하죠? “예.”(대중) 아니라면 내가 가져가서 밥도 짓게 하고 더러는 팔아서 불사에도 보태고 할테니까.

여러분 몸뚱이가 여러분 꺼라면 마음대로 되야 하죠.

그런데 맘대로 됩니까? 안되죠? “예.”(대중) 앞으로 여러분 꺼라고 하지를 말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 것이라고 하는 내 몸뚱이도 마음대로 안되는데 어떻게 가족들을 내 마음대로 하고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겠느냐.

이 세상이 마음대로 되고 내 가족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걸랑 마음을 먼저 길들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주인이 되면 진실되게 살게 된다고 하신 겁니다.

우리가 화두를 들고 싶어도 내 몸뚱이 속에 있는 번뇌욕망이 (화두가) 들어오게 가만히 놔둡니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번뇌망상과 화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망상번뇌가 일어나면 번뇌망상을 화두로 바꾸는 것이로구나, 즉 번뇌망상이라는 지능을 가지고 화두라고 하는 부처를 조성하는 것이니까, 참선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번뇌망상을 부처로 만드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번뇌가 곧 보리’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할려면 화두를 정말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화두하는 그 시간 만큼은 내가 나와 같이 춤을 추는 시간이고 부처와 같이 있는 시간이구나.

일어나는 번뇌망상을 없애버리고 화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망상을 가지고 ‘어째서’ ‘왜’하고 살피다가 조금 더 나아가면 어째서도 없어지고 왜도 없어지게 됩니다.

오로지 조주 스님의 의정만 남게 된다 이 말이에요.

이렇게 분명한 것이라면 눈을 가지고 화두 수행에 나를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화두 참선법은 일생을 바칠 가치가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문제는 나만이 해결할 수 있어요.

참나를 찾아 나서는데 무슨 하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인은 씨앗 심는 것을 중요시하지만 중생은 결과만 얻으려고 합니다.

씨앗을 심지 않으면 결과가 나오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어째서’하고 의심을 품을 때 그것이 씨앗 심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부처가 된 것입니다.

이는 화두가 작용이 된 것이거든요.

거기에 의심이 가고 잘못될 것이 없는 것처럼 이유를 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컵을 들어보이며)이걸 뭐라고 합니까? “컵이요.”(대중) 이 컵을 몸뚱이라고 합시다.

이 컵 안에는 물이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는 어떤 물이 있습니까.

망상번뇌라는 물이 있습니다.

망상번뇌는 흙탕물이 되어 우리 몸안을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흙탕물이 돌아가듯이 돌아갈때는 그 안에 찌꺼기가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입니다.”(대중) 여러분이 텔레비전을 보거나 다른 사람하고 말할 땐 그 안에 있는 망상번뇌가 보일 리가 없습니다.

점점 찌꺼기를 집어 넣고 있으니 오히려 더 커져갈 뿐이죠.

그런데 가만히 놔두면 안에 찌꺼기가 가라앉습니다.

이때는 지금까지 내 속에 있던 찌꺼기가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보여요.”(대중) 망상번뇌는 바깥에서 들어온게 아니라 내 속에 있으면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화두는 이 망상번뇌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라앉게 해주는데, 대단하지 않습니까? 내 속에 있는 이 망상번뇌를 화두로 바꾸는 이게 공부입니다.

이건 딱딱 맞아 떨어지는 일이라구요.

화두 드는 수행자는 왜 뜰앞에 잣나무라고 했는지 조사관을 타파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화두 조사관을 타파하고 도를 깨닫는 걸 목적으로 해야지, 하는 도중에 뭐가 나타나거나 뭐가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세요.

여러분도 오늘부터는 화두를 등불, 스승으로 삼고 화두에 의지해서 망상번뇌에 속지 않고 살아가 보세요.

이 좋은 참선법을 만났으니 화두에 인생을 바칠 수 있는 씨앗 되기를 바랍니다.

송담스님─남을 이롭게 하면 내가 편해요

남을 이롭게 하면 내가 편해요

-송담스님-

요즘 세상 살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산속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올 사람은 오는 법입니다.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한결같이 묻는 것이 어떻게 살면 잘 사는 겁니까’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해줍니다.’네가 싫어하는 거 남한테 하지 마라.

좋아하는 것을 못해줄 망정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한테 하지 말라’고 합니다.내가 싫어하는 일을 남한테 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하나는 남이 잘못하는 것.

무조건 용서해주십시오.남을 미워하고 욕하고 원망하다보면 밤잠을 잘 못자고 밥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됩니다.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병이 드는 것은 정해진 수순입니다.잘못하긴 남이 잘못했는데 내가 괴롭고, 병은 나한테 생기니 얼마나 바보 같은 짓입니까?그렇게 말을 해 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데 그렇게 쉽게 말씀을 하시느냐고 큰소리칩니다.그렇지만 생각을 한 번 해보세요.남을 용서하는데 돈이 듭니까? 노동력이 듭니까?

뭐가 힘이 들어 어렵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그냥 무조건 용서하면 됩니다.용서는 곧 한사람을 제도하는 겁니다.그렇다고 억지로 참으면 안 됩니다.

그냥 털어버리면 됩니다.

지금 살고 있는 것도 어차피 꿈속인데, 집착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그래도 미워하는 사람이 밉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고 계속 올라오면 그 생각을 일으키는 너는 전부 잘하기만 했느냐고 스스로 되물어보세요.사람마다 부처님이 그 안에 있습니다.사람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양심이 바로 부처입니다.

양심이 있으니까 자기가 잘못한 것은 알고, 안에 있는 부처님이 알아서 잘못을 뉘우치고, 잘해야지 하는 생각도 하게 돼 있습니다.그러니 잘못하는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과 선지식만 스승이 아닙니다.잘못하는 사람도 스승인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깨우치게 해주니 더 큰 스승이지요.불평불만에 가득 차서 세상을 바라보면 온통 지옥이지만 좋은 것이든 미워하는 것이든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면 처처가 극락입니다.내가 극락에 가고 싶으면 극락에 가도록 마음을 써야지 부처님한테 애걸복걸 빈다고극락에 보내주지 않아요.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이 넘쳐나는데 세상은 왜 이리 갈등과 반목이 많은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모두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입으로만 사랑을 합니다.입으로 아무리 먹는다고 얘기를 해도 배부르지 않듯,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해서 사랑이 되는 게 아닙니다.부부 사이에도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고 자주 말해주지 않으면 서운해 하고 그러지만입으로만 하는 사랑은 가식입니다.

그리고 손자 손녀가 할아버지 할머니 보고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맞지 않습니다.진짜 사랑은 부모가 자식한테 하듯 무조건 베푸는 겁니다.그게 안 되면 거짓말로 사랑하는 겁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겁니다.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가식적인 사랑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봐야 합니다.

특히 부부간의 사랑은 존경에서 출발합니다.

존경하는 사람은 배신을 하지 않고 존경하는 사람은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습니다.그러면 왜 내 배우자를 존경해야 하는지 한번 따져볼까요?단순 계산을 해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지구 인구가 64억이라면 굉장한 경쟁을 뚫고 부부가 된 겁니다.

국회의원이 되는 일보다 대통령이 되는 일보다 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부부가 되었단 말입니다.지구상에서 남녀로 태어나 둘이 부부가 될 확률이 이렇게 귀한데 어떻게 존경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그리고 자식도 사랑한다면 인격적으로 존중해 줘야 합니다.그 아이한테 맞게 해줘야 그게 사랑입니다.

그런데 부모 욕구불만을 채우는 도구로자식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요.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우리가 전부 마음눈이 어두워서 그렇지우리 모두가 우주에서 제일가는 ‘스타’입니다.요즘 스타 보러간다고 소리 질러가며 야단들인데 그건 자기 속에 있는 사리 찾을 생각은 안하고 사방으로 남의 사리 보러 다니는 것과 꼭 같습니다.

세상사람 전부가 스타입니다.

자기한테 맡겨진 배역을 잘 소화하면 스타가 됩니다.

거미, 지네, 두 발 짐승, 네 발 짐승, 땅 속, 물 속, 하늘에 사는 짐승도 많은데 사람 몸 받아서 온 것만 해도 뜨거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사한 일입니다.사람이 됐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사람 몸 받았을 때 잘 살아야 합니다.요즘 웰빙 바람이 불고 있는데 진정한 웰빙은 지금 이 세상 잘 살아서 팔자 운명을 뛰어넘어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팔자다 하고 가만있으면 그건 바보예요.불교는 제 성품을 봐서 부처 이루고 살라는 가르침입니다.제 정신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종교는 이 세상 사는데 바르게 잘 살라고 나온 겁니다.

종교에도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맹신과 광신이 아닌 제 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바로 보고 바르게 행하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이라는 간단한 말속에 불법의 가르침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온화한 말과 밝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십시오.나는 당신만 보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남을 이롭게 하려는 원을 세우고 살아가 보십시오.그렇게 하면 남을 위하는 일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그게 바로 극락입니다.

남이 나를 원망할 일이 없으니 마음이 편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