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담스님─탐심이 일어 내장이 뒤집혀도 이 뭣꼬 해라

탐심이 일어 내장이 뒤집혀도 ‘이 뭣꼬’ 해라 인천 용화선원장 송담 스님 오늘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 그 밖의 여러 존상들의 복장을 점안하는 법요식 날 입니다.

이 귀중한 법석에 산승이 여러분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우주법계에 가득 찬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친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단향 나무로 중생과 삼세의 여래와 보살의 모습을 조각해도, 각각의 얼굴 모습은 다르지만 냄새는 전단향으로 한 가지더라”하는 아름다운 게송이 있습니다.

게송의 의미는 삼라만상의 모습은 천차만별이지만 근본은 단 하나 진여불성(眞如佛性)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삼라만상 근본은 진여불성 첨언하자면 전단향 부처님과 관련해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재세 당시 부처님은 돌아가신 어머니 마야 부인을 위해 도리천에서 석 달 동안 법문을 하셨습니다.

당시 부처님이 계시던 코삼비국은 우진왕이라는 이가 다스렸는데, 어찌나 부처님을 존경했는지 하루도 뵙지 않고는 도무지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진왕은 고민 끝에 전단향 나무로 불상을 조성하고,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법문을 하시는 동안 이 불상을 부처님 대신 지극 정성으로 모셨습니다.

후에 부처님이 법문을 마치고 사바세계에 다시 오실 때 나무로 만든 전단향 부처님이 벌떡 일어나 부처님을 영접했는데, 너무나 비슷해 진짜 부처님이 어느 분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때 부처님은 전단향 부처님의 손을 잡고 말세의 교화를 부촉하셨는데, 이것이 최초로 불상이 모셔지게 된 연원입니다.

이런 장구한 역사가 흘러 오늘 세등선원에서 향을 사르고 합장을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될 것만 같은 참으로 거룩한 부처님을 모시게 됐으니 그 의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단향 부처님께 말세의 교화를 부탁했듯이 오늘날의 사바세계 더구나 이 말세에는 각양각색의 싸움이 많습니다.

명예, 권력, 재산, 사상, 종교에 대한 싸움이 하루도 쉴 날이 없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싸움들로 사바세계는 망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청정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파멸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삼독심이 사라지고 계정혜가 밝게 빛난다면 싸움 또한 사라지게 되겠지요.

어쩌면 지구도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만큼 좋은 세계가 되질도 모르겠습니다.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하면, 만약 색으로 혹은 색상, 모양으로써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려 하면,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라,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이 게송은 『금강경』에 나오는 유명한 게송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석가모니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을 정성을 다해 모셨습니다.

그러나 그 거룩함에서 부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중생의 소견일 뿐입니다.

바르지 못한 삿된 소견으로 참 부처님을 친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참 부처님을 뵐 수 있을까요.

경에는 8만4천 가지의 많은 방법을 설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방법 가운데서도 남녀 귀천도 필요 없고 유식 무식의 차별 없이 오직 참 부처님을 친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입니다.

참선은 글을 몰라도 할 수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도 상관없고, 나이가 어려도 관계없습니다.

돈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습니다.

법을 알아 열심히 하면 누구나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친견하는 방법이 참선 부처님은 우주법계에 꽉 차 있습니다.

그러나 꽉 차 있는 부처님 가운데 자기 안의 부처님 찾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자기 안의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면 다른 사람 속에 있는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고, 모든 중생들의 부처님을 바로 보게 됩니다.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산천초목(山川草木) 속에 있는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고 사람이나 사물이나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성주괴공(成住壞空)과 그 현상 속에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친견하게 됩니다.

앙굴리마라도 깨달았거늘 많은 사람들이 번뇌 망상 속에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번뇌 망상을 여의고 부처님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번뇌 망상이 일면 이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뭣고” 이렇게 참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을 빨리, 그리고 가장 쉽게 찾는 오묘한 수행법입니다.

999명의 사람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자기 엄마를 죽여 1000명을 채우려고 했던 앙굴리마라도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앙굴리마라처럼 포독하고 고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끊임없이 탐진치 삼독이 일어난다하더라도 우리는 앙굴리마라처럼 고약하지는 않습니다.

가끔은 착한 일도 하고 좋은 일도 하고 남도 돕고 하는 우리는 모두가 앙굴리마라보다는 훨씬 훌륭합니다.

이러니 우리가 깨닫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올바른 방법을 가지고, 옳게만 해 나가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몸속에 똥이 들어있고, 바늘로 찌르면 피가 나고, 탐진치 삼독이 부글부글 끓고 있어도.

탐진치가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 숨을 깊게 들어 마시고 내쉬면서 “이뭣고” 골이 나서 내장이 뒤집어 질지라도 그 순간에 “이뭣고” 탐심이 날 때도 “이뭣고” 화가 나도 “이뭣고” 어리석음이 나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일분일초도 여의지 않고 그 자리에 즉해서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가면 바로 그곳에서 참 나를 깨닫고 진여불성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법당에 거룩한 금색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법당에 와서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꽃을 올리고 절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 다 좋습니다.

지극정성으로 하면 소원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예배하는 참 뜻이 이것뿐이겠습니까.

부자가 되고, 아들·딸이 대학에 합격하고 좋은 며느리를 얻는 것만이 부처님을 예경하는 이유일까요.

마음속에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 마땅히 절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좋습니다.

지극 정성으로만 하십시오.

반드시 이루게 됩니다.

중생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그럴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해도 됩니다.

그러나 불상을 모시는 진정한 뜻은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 과일을 올리고 향을 올리는 것도 좋지만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초보 단계의 공양입니다.

참된 공양은 정성스런 마음으로 예배를 하되 “이뭣고” 이런 한 마음입니다.

이뭣고를 여의지 않는 화두에 대한 간절한 의심을 가지고 공양을 올리고 절을 해야 내 몸 속에 있는 진짜 부처님을 친견하게 됩니다.

화두를 여의지 않은 그 자리에 언제나 참 부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화두있는 자리에 부처도 있어 오늘 불상을 모시고 개금을 하고 복장 점안을 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여기 저기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들이 결제 중임에도 불구하고 참석하셨고, 또한 많은 청신사, 청신녀가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요, 도반들입니다.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남녀노소와 승속을 막론하고 모두가 부처님의 한 제자요, 딸이요, 아들입니다.

형제자매요, 도반입니다.

형제자매도반 여러분, 이제부터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이뭣고” 이렇게 자기 마음을 단속하십시오.

번뇌 망상 속에 있는 피와 오줌과 땀과 똥으로 뭉쳐져 있는 오대 색신 속의 참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색상을 의지해서 부처님을 보지 않고, 음성을 의지해 부처님을 구하지 않는, 참 부처님을 찾는 가깝고도 가장 빠른 길입니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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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 이 법문은 6월 13일 대전 탄방동 세등선원에서 열린 대웅전 삼존불 개금불사 회향 및 점안법회에서 인천 용화선원장 송담 스님이 ‘참 부처와 참선’을 주제로 대중들에게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송담 스님은 1929년 태어났으며, 전강 스님을 은사로 1945년과 1951년 사미계와 비구계를 수지했다.

10년간 묵언 정진 끝에 전강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용화선원과 인제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후학들에게 깨달음의 빛을 전하고 있다.

보산스님─원인과 결과는 한뿌리서 나온다

원인과 결과는 한뿌리서 나온다

-보산스님-

환경재앙을 바로보자 지난 겨울은 무척 춥고 폭설도 많이 내리고 구제역으로 인하여 많은 축산농민과 공무원 등이 방역활동 하느라 추운 겨울을 힘겹게 보내야 했고 아직도 구제역 방역은 계속되고 있다.

춘삼월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든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고 닫았던 문들을 열어 젖히며 지난 겨울 혹독한 추위와 폭설을 견디고 다시 돋아나는 생명들을 바라 볼 때면 생명의 경외감 마저 들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다들 걱정들을 한다.

이게 무슨 징조냐 면서 어찌하여 이런 기후 변화를 겪는지에 대해서 환경전문가 기후학자 등등 많은 전문가 그룹들의 의견 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환경전문가들은 환경적인 측면에서 분석할 것이고 기후학자 들은 기후과학적인 측면서 분석 할 것이며 신을 믿는 이들은 신의 뜻의 측면에서 볼 것이며 우연을 믿는 이들은 우연이란 측면에서 볼 것이고 인과를 믿는 그룹은 인과의 측면에서 볼려고 할 것이다.

온 우주가 나와 둘 아닌 하나임을 자각해야 해결 불자들은 이러한 환경재앙을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까? 환경(環境, environment)은 모든 생물들을 둘러싸는 외위(外圍)를 말하고 있다.

자연의 모든 것이 환경이라 말할 수 있다.

나를 중심으로 한다면 나를 포함한 모든 것 이 환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나와 나 아닌 생명체는 동일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인간이 저지르는 포악한 자연파괴는 나를 파괴하는 것이요 나에게 포악하게 하는 등식이 성립된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살피신 것이 연기의 법칙이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라는 말씀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든 물질이든 서로 인연에 의하여 화합하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 지는 것이 연기의 법이다.

그래서 불법을 다르마(Dharma, 法) 또는 법칙(法則)이라고 하고 있다.

우리들도 환경 속에 살고 환경 속에 죽고 있다.

환경이 죽고 우리가 살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환경이 죽는다면 우리의 삶이 어떨까.

이것이 죽으면 저것도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정복의 논리, 지배와 피지배의 논리가 아니라 평등의 논리이며 모두가 함께 사는 것이 붓다의 깨달음인 연기법이다.

우리들의 일상은 환경을 떠나서 이야기 할 수 없다.

삶을 생각할 땐 생활환경, 수행자들의 수행을 생각할 땐 수행환경, 교육을 생각할 땐 교육환경, 정치를 생각할 땐 정치 환경, 처녀 총각결혼할 땐 가정환경을 살피게 된다.

그것은 환경의 중요성을 대변한다고 할 수가 있다.

하물며 자연 환경이야 더 말 할 수 있으랴.

에너지 과소비로 대기오염, 폐수배출로 수질오염, 종합적 으로는 환경오염으로 우리들의 삶은 점점 고통스럽고 숨이 막혀 오고 질병은 늘어나고 환경을 정화하는데 값비싼 댓가를 지불하고 있다.

어릴 적에는 개울물을 마음대로 마셨지만 지금은 석유보다 비싼 것이 물값이다.

바다의 오염은 어족자원의 씨를 말리고 대기환경의 오염은 지구의 사막화를 재촉하고 있다.

환경 재앙은 결국 산업화하면서 스스로 뿌린 업보다.

온 우주가 나와 둘 아닌 하나임을 자각하고 자연과 나와 둘 아님을 자각하고 한 티끌에 시방세계가 있음을 알아서 작은 것 부터 소중히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이 환경을 지키고 재앙을 예방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환경과 생명이 하나임을 깨닫고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환경운동이야말로 수행 가운데 중요한 수행이 아닐까.

[불교신문]

무여스님─기도 요령과 그 가피

기도 요령과 가피

무여스님-

장엄염불(莊嚴念拂) 가운데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고려 말의 삼대 화상중의 한 분인 나옹(懶翁)스님께서 누님을 위해서 지었다는 게송입니다.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荷方) 아미타불은 어디 계신가 착득두심절망막(着得心頭切莫忘) 마음 끝에 꼭 붙들어 놓지 말고 생각하되 염도염궁무념귀(念到念窮無念處) 생각 생각 지극하여 생각 없는 곳이 이르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눈·귀·코·혀·몸·뜻에서 자금광을 발하리라.

아미타불은 어디 계실까?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에서 10만억 국토를 지나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아미타불을 잠시도 잊지 않고 오직 일념으로 생각하다가 생각 없는 곳에 이르면 바로 그곳에서 자금광(紫金光)을 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극락세계에 가지 않고도 바로 아미타불을 뵙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금광은 자마금색, 부처님의 몸 빛깔이 불그스레한 금빛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이 한 마음으로 똘똘 뭉치면 부처님도 보살님도 뵐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생각뿐인 한 마음이 되면 바로 그 자리는 부처님의 마음과 한 자리요, 바로 그 자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근본 자성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를 나옹스님은 ‘육문상방자금광’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기도 또한 진정으로 성취될 수가 있습니다.

기도는 이상과 같이 서원을 세우고, 깊은 신심을 가져서, 감사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해야 합니다.

흔히 ‘기도가 안 된다’, ‘기도에 영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네 가지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안 되는 사람이나 희망과 포부가 충천하여 성공을 바라는 사람, 또는 자기 인생에 어려움이나 괴로움이 많은 사람일수록 관세음보살님께 지극한 서원을 세워서 애써보십시오.

기도의 요령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확고부동한 반석 같은 믿음의 바탕에서 간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믿을 신(信)자와 간절할 절(切)자 두 자가 가장 요긴합니다.

오직 철저히 굳게 믿고 간절하게 끊임이 없도록 해보십시오.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언제 어디서나 ‘관세음보살’이 끊이지 않아야 하고, 기쁘거나 슬프거나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밥을 먹든 일을 하든 ‘관세음보살’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하다가 시간을 채웠다고 안 한다거나 마음을 놓지도 말고, 잘 된다고 들뜨고 좋아하지도 말고, 안 된다고 괴로워하고 안절부절 하지도 말고, 새벽에 눈뜨자마자 저녁에 잘 때까지 ‘관세음보살’을 떠나지 않도록 해 보십시오.

기도하다가 보면 잡된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잡념에는 일체 신경을 쓰지 말고 망상이 떠오를수록 더 지극하게 간절하게만 불러보십시오.

안 되는 것 같은 기도지만 ‘하면 된다’, ‘나도 해낼 수 있다’는 굳건한 신념으로 간절하게 성심성의껏 애쓰다가 보면 망상이 없어지며 집중이 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더 지극히 간절하게 정근하고 집중 하다보면 오직 ‘관세음보살 일념’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부터 기도공덕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기도가 관세음보살에 집중이 되고 빠지면 심하게 일어나던 번뇌와 망상도 저절로 없어지고, 마음은 고요해지고 편안해집니다.

더 집중이 되고 깊어지니 더 고요하고 평화스러워 집니다.

그러면 몸은 가볍고 마음은 맑아집니다.

어떤 때는 깃털처럼 가볍다가 몸의 존재조차도 의식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몇 시간씩 앉았어도 조금도 지루하거나 괴로운 줄 모르고, 법당에 계시는 등상불처럼 꼿꼿하게 딱 버티고 앉아서 깊은 삼매경에 들게 됩니다.

이런 날은 아침공양을 막 하고 앉은 것 같은데 잠깐 사이에 점심때가 되고, 저녁식사를 하고 기도 자세를 취한 것 같은데 벌써 밤 취침시간이 되어 시간가는 것이 눈 깜짝할 사이 같습니다.

심지어 내가 아파트에서 기도를 하는지 법당에서 정근을 하는지 조차 구분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기도에 빠져 시간과 공간까지도 초월하게 됩니다.

이렇게 몸은 가볍고 맑아지고 시공(時空)까지도 초월하게 되면 법열까지도 느끼게 됩니다.

기쁘다고 할 수도 있고 즐겁다고 할 수도 있는,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온몸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기분은 지금까지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느낌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 안락(安樂)을 한 번만 제대로 느껴도 두고두고 잊지 못합니다.

이 희열(喜悅)은 제대로만 체험하면 ‘오직 이것뿐이다’, ‘이 이상이 없다’고 하면서 이때부터는 기도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리고 말려도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부처님 앞에 가면 감사한 눈물이 절로 나오고 불교를 만나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복된 일인 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가고 머물고 앉고 누으며 항상 관세음보살을 염하고, 생각 생각에 관세음보살이 떠나지 않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기쁨을 선사하게 되고, 머무는 곳마다 편안한 세상, 괴로움이 없는 세상이 되며, 가는 곳마다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해 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대무심(大無心)의 경지에 이르러 관세음보살의 대비원력(大悲願力)과 어떠한 고난도 극복하고 소원을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기도자의 간절한 마음이 합일되어 기도가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의 자비광명(慈悲光明)이 기도자의 공덕으로 변하여 만 중생에게 뜨겁게 베풀어지게 됩니다.

관세음보살의 어진 말씀과 그 숭고한 뜻과 자비스런 행동처럼 기도자가 닦은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다른 중생들에게 이익을 돌리는 것입니다.

기도로서 얻은 정신세계뿐만 아니라 자기가 쌓아온 좋은 과보까지도 자기만을 위해서 쓰지 않고 관세음보살처럼 중생을 위해서 회향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관세음보살이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자(求願者)가 되고, 중생들의 영원한 안식처(安息處)가 되며, 진정한 귀의처(歸依處)가 되어 보십시오.

그렇게 기도공덕을 쌓지 못한 사람은 매일 관음정근을 삼만 번 이상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서 싫더라도 항상 웃는 얼굴로 남을 위해서 하루 한번 이상은 선행을 해보십시오.

천일기도 회향 무렵에는 관세음보살이 기도자를 모시고 수미산(須彌山) 정상을 올라가고 있을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에 목숨을 놓았더니 밝고 신령하고 안락하도다 한 물건이여 사물마다 그대로가 비로자나 법신이요 곳곳마다 금색세계(金色世界) 아닌 곳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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