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산스님─독성(獨聖)기도

독성(獨聖)기도

이법산 스님/ 동국대학교 교수 독성(獨聖)기도는 나반존자(那畔尊者)를 칭념하는 기도다.

독성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은 성자가 아니라 혼자 수행하며 깨달아 성인이 되었다는 뜻이며, 아라한(阿羅漢)의 과위(果位)를 증득한 경지로서 연각승(緣覺乘) 또는 벽지불승(隻支佛乘)이라고 한다.

독성기도는 나한기도와 같은 의미로 생각하면 된다.

독성님께 귀의하는 명칭에는 다음과 같다.

천태산상에서 혼자 선정을 닦으시는 나반존자님께 귀의합니다.

삼명을 이미 증득하시고 이리가 원만하신 나반존자님께 귀의합니다.

응당 복전을 이루시고 용화미륵을 기다리시는 나반존자님께 귀의합니다.

南無 天台山上 獨修禪定 那畔尊者 南無 三明已證 二利圓成 那畔尊者 南無 應供福田 待 龍華 那畔尊者 여기서 보면 나반존자님은 천태산(天台山)에서 오직 홀로 언제나 선정에 들어 수행하시는 성자로서 이미 삼명통(三明通), 즉 과거 세상의 일을 모두 아는 숙명명(宿命明)과 모든 미래의 일을 다 볼 수 있고 천안명(天眼明)과 성스러운 지혜로서 일체의 번뇌가 완전히 없으신 누진명(漏盡明 등의 세 가지 신비스러운 지혜광명을 갖추었다.

또한 이리(二利), 즉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원이 구족하시며, 모든 이로부터 존경과 공양을 받을 수 있는 복전(福田)을 이루시고 용화회상(龍華會上)의 미륵부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모든 중생을 다 교화하여 성불하도록 하시겠다는 나반존자님께 기도 드리며, 이 기도는 곧 이러한 원력과 광명의 지혜를 갖추신 나반존자님을 닮겠다는 약속이다.

나무(南無)는 귀의한다는 뜻이며 이는 곧 약속이다.

마음에 새겨진 원력은 꼭 성취하겠다는 굳은 약속이다.

이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다짐하는 것이 기도이다.

독성님을 청하는 〔유치(由致)〕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우러러 지극한 마음으로 청하옵건대 독성님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입멸(入滅)하신 뒤로부터 자씨(慈氏) 미륵부처님이 오실 때까지 세속의 객진 구역에서 떠나지 않으시고 숨거나 나타남이 자유롭고 걸림이 없으십니다.

어떤 때는 층층이 높은 곳에서 고요히 앉아 선정에 드시고 어떤 때는 낙락장송 사이에서 뜻 쫓아오고 가시니, 산이 은은(隱隱)하고 물이 잔잔(潺潺)하여 한 칸 짜리 난야(蘭若)에서 앉거나 기대어 노닐며, 꽃이 화려하고, 새가 노래하는 소리와 빛깔 어우러진 곳에서 자재로히 거니시지요.

하늘하늘한 어깨에 반쯤 걸치고 도(道)를 즐기며 눈 같은 눈썹 눈을 덮은 듯 공(空)을 관(觀)하시며, 현재는 선정에 머물며 한량없는 공양에 순응하시지요.

만약 공양의 예의를 드리오면 반드시 신통의 거울로 보아주시고 구하는 것 있으면 다 뜻 쫓아 소원 따라주지 않음이 없으시지요.

그러므로 저희가 금월 금일에 조촐하게 향단(香壇)을 열고 미묘한 공양구를 갖추고 차와 향을 공양 올리나이다.

천태산에서 홀로 선정을 닦으시는 성현과 여러 권속들을 우러러 청하옵니다.

받들어 기원하는 자 엎드려 예배하며 깨끗한 손으로 향 사르고 응진(應眞)에 공경예배 드리오니 맑은 소리 들으시고, 현관에 납시어 잠시 보배거처를 떠나시어 향단에 강림하시어 공양을 받아주시기를 마음 가득히 원하옵니다.

(나반존자)님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 인연을 쫓아 깨달아 성자가 되신 분으로 용화회상(龍華會上)에 미륵부처님이 태어나실 때까지 열반에 드시지 않고 천태산에서 한적한 것 같으면서도 삼영을 신통묘용을 놓으시고 불지(佛地)를 향하여 많은 중생을 인도하시는 거룩한 독성님이시다.

독성전(獨聖殿)은 법당 뒤에 따로 모셔진 곳도 있지만 법당의 한쪽 구석에 칠성, 산신과 함께 〔삼성전(三聖殿)〕에 모셔져 있다.

우리 나라 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정도로 독성신앙은 특이하다.

중국에서는 나한신앙에 속해 있으나 우리 한국 불교에서는 (나반존자)만 따로 모시고 연각승(緣覺乘)의 신앙을 상징하고 있다.

독성기도로 유명한 곳은 경북 청도 호거산 운문사(雲門寺) 산 내에 있는 사리암이 가장 영험이 있다고 하며, 삼각산 화개사 위에 있는 삼성암의 독성전을 비롯하여 전국 가지에 절마다 독성님이 모셔져 있다.

독성기도는 나한기도와 같이 청결한 몸과 마음으로 비교적 까다롭고 깨끗하고 정확해야 하며, 기도 성취가 빠르다고 하여 독성기도를 많이 한다.

독성도 역시 보살지위에 있는 성자로서 중생 교화를 위한 부처님과 보살의 화신임을 잘 알고 삿되거나 맹신하지 말고 의미를 잘 알아 깨달음의 길로 정진하면 모든 일이 뜻과 같이 될 것이다.

(나반존자)의 노래를 불러보자.

나반존자 신통은 세상에 희귀하나 숨은 듯 드러나며 자재로히 베푸시네 소나무 바위에 자취 감추고 몇 천 년 지나도 중생계에 모습 감춘 듯 사방에 두루하네 那畔神通世所稀 行藏現化任施爲 松巖隱跡經千劫 生界潛形入四維

지명스님─우리는 행복 속에 있다

우리는 행복 속에 있다

-지명스님-

사람들은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육체적인 면이나 정신적인 면을 막론하고 괴로움보다는 즐거움을 누리려고 한다.

그러나 행복을 찾아헤매는 인간에게는 행복을 계속해서 느낄 수 없는 마취성이라는 것이 있다.

향내음은 처음 맡을 때만 느낄 수 있다.

계속해서 동일한 냄새와 같이 있으면 그 냄새에 마취되어서 느낄 수 없게 된다.

얼마 전에 오대산에 사는 도반스님 한 분이 산더덕 수십 뿌리를 선사했다.

한 개를 꺼내어 껍질을 벗기니 그 향기가 방 뿐만 아니라 마당까지 진동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었지만 몇 분 지나서는 향기를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향기를 계속 해서 맛보려면 방 밖에 나가서 한참 지난 후에 다시 들어와야만 했다.

사람은 향기에만 마취되지 않는다.

모든 면에서 마취된다.

돈에도 마취되고 사랑에도 마취된다.

감옥에서 나온 장영자씨가 생활비가 부족해서 다시 감옥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돈에 마취되어서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연애시절에는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던져버릴 듯하던 사람들이 결혼 후에 성격이나 이상의 차이 등을 내세워서 이혼하는 것은 그들에게 사랑이 없어서 가 아니다.

사랑에 마취되어서 사랑을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복, 기쁨, 즐거움 등을 누리기 위해서 불행, 슬픔, 괴로움 등에 계속해서 드나들어야 하는 역설적인 운명에 처해 있다.

행복에 젖는 순간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행복감과 불행감 사이를 왕복해야 한다.

괴로움 속에서 다듬어진 사람이 아니면 즐거움을 알아볼 수 없다.

“당신은 행복합니까?” 하고 물을 경우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있게 “예”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완전히 행복 하기보다는 비교적 행복하거나 비교적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불행한가.

그러지 않다.

우리는 행복 속에 있다.

단지 그것에 마취되어서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유마경의 서두는 이 문제를 이렇게 다룬다.

불타가 제자들에게 “마음이 청정하면 온 세계가 청정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제자가 불타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일찍부터 마음이 청정하셨을 터인데 어째서 이 세계가 청정하지 못합니까?” 그러자 불타는 대답했다.

“해가 떠 있는데도 소경이 해를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해의 허물이 아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행복을 알아보지 못할 따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복을 알아볼 수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행복해지려면 불행을 피하지 않아야 한다.

기쁨을 얻으려면 슬픔에 잠겨야 한다.

즐거움을 얻으려고 고통을 곁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석가는 왕궁을 떠났고 예수는 십자가를 짊어졌다.

평범한 시민인 우리가 그들의 길을 그대로 답습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행복해지는 비결은 실천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