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을 쳐부수니

격쇄허공무내외 擊碎虛空無內外 허공을 쳐부수니 안팎이 없고

일진불입로당당 一塵不立露堂堂 티끌 하나 없는 자리 당당히 드러났네.

번신직투위음후 飜身直透威音後 몸을 뒤쳐 위음의 뒤를 뚫으니

만월한광조파상 滿月寒光照破床 보름달 찬 빛이 낡은 상을 비추네.

고려 때 나옹스님(1320~1378)이 지은 이 시는 오도송(悟道頌)이라 할 수 있는 매우 격조 높은 시이다. 허공을 쳐부수니 안팎이 없다는 1구에서부터 대단한 한 소식을 한 느낌이다. 허공이 부셔지는 대상은 아니지만 이는 마음이 머물 수 있는 경계를 모두 부수었다는 말이다. 시공을 초월해 있는 마음의 성품자리를 파악해, 주객이 끊어진 절대의 본성이 당당히 드러나 현상의 모든 세계를 관통하고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위음이란 말은 최초의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인데 위음의 뒤란 천지만물이 시작된 이후라는 뜻이다. 초시간적 자리에서 시간적 상황 속으로 들어온 이후를 말한다. 보름달은 자기 심월이요 낡은 상이란 오름 육신을 상징하고 있다.

나옹스님은 고려 말기의 스님으로 일찍이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20살 때 출가해서, 요연(了然)에게 의탁해 득도(得度)하였다. 그 뒤 5년 후 양주 회암사에서 밤낮없이 정진하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1347년에는 중국 원나라로 들어가 연도(燕都)의 법원사(法源寺)에 머물고 있던 인도출신인 지공(指空)스님을 만나 법을 들은 뒤 다시 정자사(淨慈寺)로 가서 평산처림(平山處林)의 법을 전해 받고 불자(拂子)를 받는다. 1358년에 다시 지공을 만난 뒤 고려로 귀국한다. 1361년에는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궁중에 들어가 내전에서 왕을 위하여 설법하고 왕과 왕비로부터 가사와 불자를 하사 받고 왕사가 된다. 여주 신륵사에서 우왕 2년(1376)에 세수 57세 법랍 37세로 입적하였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6월 제67호

햇빛소나기 – 청령포

절벽과 물로 사방이 막힌 이곳에 와서

그 때 그 어린 임금처럼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나를 보았어요

나무계단 돌계단 간신히 올라

천 길 낭떠러지 앞에 발 돋우고 서서

서강 물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햇빛소나기를 보았어요

햇빛소나기 따라

빨려 들어가는

내 몸뚱이, 그 몸뚱이의 살과 피를 보았어요

그 물빛 감옥 속에 나를 버리고서야

관음송 맨 꼭대기 연약한 가지 끝에

자울자울 졸던 가을햇살이

잠시, 아주 잠시

아직도 낭떠러지에 서 있는

내 마음 속으로 쑤욱 들어가

집 한 채 짓는 것을 보았어요

아주 잠깐, 또 다른 적막의 집 한 채를 보았어요

아, 적멸보궁이었어요

하 영 文殊華(시인, 반야불교학당) 글. 월간반야 2008년 5월 제9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