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스님─나는 오늘도 길을 걷는다

나는 오늘도 길을 걷는다

-성전스님-

날마다 산길을 걷는다.

걷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바로 걷기다.

걷다 보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걸으며 발자국을 버리듯이 마음 속에 자리했던 상념까지도 나는 버린다.

버려 마음까지 가볍게 하는 것이 걷기라고 나는 정의한다.

걷기는 마음 안의 모든 것이 다 장난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걸으며 삶의 진리 하나 깨우친다면 나의 걷기는 행선이 된다.

걸으며 난 확실히 많이 변했다.

체중의 감소는 별로 없지만 마음은 엄청 날씬해졌다.

나는 이제 내 삶의 모든 문제를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걸으며 생각한다.

앉아서 생각하는 것과 걸으며 생각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앉아서 생각하는 것은 생각의 무게를 더하는 결과를 낳지만 걸으며 생각하는 것은 생각의 무게를 더는 결과를 낳는다.

생각의 무게가 덜어졌을 때의 그 상쾌함.

내 몸에 땀이 흐를 때마다 내 마음 속에서도 생각의 땀이 흘러 내린 것이다.

가만히 앉아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생명의 본성을 위배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걸으며 생각한다는 것은 생명의 본성에 충실한 삶의 행위라고 스스로 정의하고 있다.

길을 친구로 여길 수 있다면 길은 최고의 경청자가 된다.

마음을 담아 길을 대하다 보면 길은 어느새 친구가 되어 우리들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친구란 마음을 나누는 사이 아니던가.

그것이 꼭 사람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위로받을 상대가 많으면 많을 수록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세상 모든 것에서 위로받을 수 있다면 삶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 되겠는가.

삶이 날마다 기쁨일 수 있는 것은 세상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모두 다정한 것들이라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을 걸으며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게 되었고 길섶에 풀들이 꽃에 뒤지지 않는 매력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들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은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혼자 있어도 마음을 나눌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즐거운 가르침도 만나게 되었다.

내가 그 전에 알던 많은 인연들은 잃게 되었지만 잃음은 또 다른 만남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며 살아가고 있다.

좀 더 길을 걷다 보면 나는 잃음과 얻음에서 자유롭게 될 것만 같다.

길은 잃음과 얻음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회복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잃은 것은 이제는 멀어진 인연 속의 사람들이다.

가족도 물론 포함된다.

하지만 어떤가.

나는 길을 걸음으로써 더 큰 사랑과 자유를 만나고 있지 않은가.

인연이란 그렇게 깊은 골을 울리는 메아리와 같은 것이 아니던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잔다.

청산과 녹수에 마음대로 소요하고 어촌과 술집에서도 자유롭고 편안하다.

몇 년인지 몇 달인지 아예 몰라라.” 청허 휴정의 노래다.

나도 길 위에서 이런 노래를 하고 싶다.

길은 나를 휴정의 가슴 속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 날이 언제이련가.

길을 바라보며 나는 설레는 가슴으로 그 날을 그린다.

그 날이 오면 잃음과 얻음은 하나가 되고 승과 속은 아예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죽음과 삶의 경계는 화로에 떨어지는 눈발과 같으리라.

나는 오늘도 길을 걷는다.

오늘은 왠지 휴정의 가슴 속의 노래를 바람이 부르는 것만 같다.

능인스님─ 갚는 빚 쌓는 보시

갚는 빚 쌓는 보시/

능인스님

달마대사가 지은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는 “만일 수행자가 수행을 하다가 어렵고 괴로운 일을 당하면 “이는 내가 전생에 알게 모르게 지은 악업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여 빚을 갚으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이렇게 생각하라 하셨다.

세상을 살다보면 억울한 일이 누군들 없겠는가.

이런 일은 수행의 문에 들어온 사람이라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달마대사의 말씀처럼 생각한다면 아무리 억울하고 괴로운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내가 짓고 내가 받는다고 생각되니 덜 억울하고 괴로움도 덜할 것이다.

반면에 이유없이 괴로움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조그만 괴로움이라도 견디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모든 괴로움을 이렇게 생각한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도 들 것이다.

세상사는 모든 일이 다 빚을 갚는 일인가? 그렇다.

세상에 빚만 지고 사는 사람도 없고, 보시만 하며 사는 사람도 없듯이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빚을 갚는 것일 수도있고 보시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는 빚은 지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은혜를 베풀면 살기도 하는 것이리라.

또 오늘은 신세를 지지만 내일은 갚으며 사는 것이 인생살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중생의 마음이라 “내가 하는 것이 빚을 갚는 것인가, 아니면 공덕을 쌓는 보시를 한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빚을 갚는 것이냐 아니면 공덕을 쌓는 것이냐” 하는 것은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면 별 의미가 없다.

갚는 것이건 쌓는 것이건 모두가 다 인과(因果)의 법칙에 따르기에 받는 것도 베푸는 것도 내가 받고 내가 베푸는 것이다.

갚는 것이라 생각하건 공덕을 쌓는 보시행이라 생각하건 인과의 법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갚는 것이면 갚아지는 것일 것이고 보시한 것이면 공덕이 쌓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 갚으면 더 줄 일이 없을 것이요 보시했으면 쌓여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별해보고 싶은 것이 중생의 마음인지라 한번 구별해 보자.

부처님과 같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분은 삼세의 인과가 눈앞에 자연스럽게 보여진다.

이런 능력을 숙명통(宿命通)이라 한다.

이런 숙명통이 열리지 않은 중생들은 나타나는 형상을 보고 유추해서 알아보는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내가 하는 행위 중에 어떤 것이 빚 갚는 것이라고 알면 될 것인가?

첫째, 내가 고생하며 베풀어주고도 별로 고맙다는 인사도 받지 못하고, 때로는 오히려 부족하다는 질책을 받는다면 이는 빚을 갚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돈을 빌려준 사람은 돈을 받아가면서 고맙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은 돈이 있다면 나머지도 잘 갚으라고 다짐하고 가듯이 말이다.

또 은행에 가서 저축했던 돈을 찾아오면서 은행에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오지는 않듯이 말이다.

또 스스로는 괴롭지만 타인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 일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돈을 잃으면 돈을 주워서 이득을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 러나 혼자 길을 가다가 넘어져서 지독한 아픔을 느낀다면 누구에게도 이득은 되지 않으면서 자신은 괴로운 것이다.

이런 경우 스스로의 잘못으로 생긴 업을 갚는 것이라 생각해도 될 것이다.

둘째 공덕을 쌓은 경우는 어떤 것일까? 조그마한 공덕과 보시를 베풀어도 베푼 것 이상의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면 이는 내가 공덕을 쌓은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길에 서 있게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도와줬다.

그런데 도와준 사람이 자기가 예전에 이런 일로 도와준 사람이라면 덜 미안할 것이다.

그렇지만 전혀 면식이 없는 사람이 도와줬다면 훨씬 더 고맙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이처럼 차를 고쳐 준 것은 같아도 고마움의 정도가 다른 이유는 그 사람과 이전에 있었던 관계에 따라서 달라진다.

현재의 인과가 그렇듯이 전생을 포함한 삼세를 통해 일어나는 인과에 있어서도 똑 같은 결과를 보여준다.

그리고 만일 빚을 갚는 경우라 생각될 때 빚을 받아 가는 사람이 너무 당당하다고 해서 억울하다거나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면 옛날 빚은 갚으면서 새로운 업을 일으키는 것이 되어 미래의 괴로움의 원인을 심게된다.

이는 은혜를 베풀어주었던 사람에게 배은망덕하게도 화를 내는 것이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것이다.

또 공덕을 쌓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경우에도 너무 우쭐대거나 감사의 말에 너무 빠져버리면 이는 새로운 집착과 사람을 무시하는 나쁜 업을 새로이 짓게 된다.

조그만 선업을 짓고 교만한 마음을 내어 지은 공덕보다 더 큰 교만과 집착의 업을 지어서는 안되리라.

항상 마음을 살펴서 지은 공덕을 까먹는 어리석음을 짓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좀더 깊이 살펴보자면 갚는 것이건 쌓는 것이건 간에 다 한정이 있다.

아무리 쌓은들 쓰는데 당 할 것인가.

또 빌리고 갚는 일은 번거로울 수도 있다.

그러니

갚고 쌓는 일에 연연하지 말고 마음을 청정하고 평정히 하며 지혜를 밝혀나가는 큰 복업에 매진함이 가장 큰 행복의 업인(業因)이 될 것이다.

보성스님─ 부처님은 어떻게 살라고 하셨는가

부처님은 어떻게 살라고 하셨는가?

-보성 스님-

불어오는 바람을 움켜잡고 흘러가는 물을 멈추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올해도 벌써 반 가까이 지나갔습니다.

우리가 한 세상을 산다고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나 한 달이 되고, 한달 두달이 쌓여서 1년이 되며,

1년씩 흘려보내다 보면 문득 한 세상이

막을 내립니다.

한 번 손 끝으로 헤아려 보십시오.

‘나’의 나이가 얼마인지를? 그리고 어디쯤에 와 있는지를?

하지만 지금, 어느 누구도 이것을 문제로 삼는 이는 드뭅니다.

과연 우리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은 무엇일까요?

나이 일까요? 아닙니다.

부처님일까요? 아닙니다.

진리일까요?

아닙니다.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바로 이 생각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고생 덜하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

아들딸 좋은 학교에 보내고 좋은 직장에 취직 시킬 것인가?

관심은 오로지 나의 행복과 가족의 행복으로 모아집니다.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은 한정이 없습니다.

높고 크기로는 한라산이나 지리산 보다 더 크고,

넓기로는 동해바다보다 더 넓습니다.

그러나 내가 행복해지고 내 가족이 잘 되려면 ‘나’가 무엇인지.

어느 자리에 와 있는지부터 잘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가만히 돌이켜 보십시오.

내가 지금 어떠한 지점에 와 있는지?

내가 앉아 있는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지? 지금의 내가 어떠한 나인지?

도대체 나는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인지? 얕은 욕심을 부리며

사는 사람인지? 깊이 있게 행복을 구하는 사람인지? 등을 곰곰이

돌아보십시오.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아는 이는 참으로 드뭅니다.

누구에게 물어보아도‘나’에 대해 말해 주는 이는 극히 드뭅니다.

그럼 나는 ‘나’를 알까요? 모두가 나를 위해 살고, 잔뜩 힘을 주어

“나, 나”하면서 큰소리를 치고는 있지만, ‘진짜 나에 대해 말해 보라’고 하면

입을 꽉 다문 채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어떤 이는 말할 것입니다.

“나요? 내가 왜 나를 몰라요? 잘 알지요.”

그러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며 생년월일 등, 외형적인 사항들만

열심히 늘어 놓을 뿐,

진짜 나에 대한 설명은 잘하지를 못합니다.

이렇듯 나도 잘 모르고 내가 있는 자리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나의 행복’을 가꾸고 그 행복을 이루어 낼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지금의 ‘나’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잘 점검할 줄 모르면

참된 행복은 나에게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야망이 있다한들, 그 야망은

나를 힘들게만 만들 뿐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여야 하루하루를 헛되지 않게,

안락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을 잘 다듬으며 살아야 가능합니다.

오늘을 알뜰하게 다듬는 노력이 있어야만

내일을 바람직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제대로 다듬는 노력이 없으면 한평생이 막막해집니다.

물론 살다가 보면 방향을 잃고 표류할 때가 가끔씩 있습니다.

이것이 누구 탓입니까? 내탓입니다.

‘나’를 버리고 누가 있습니까?

또 방향을 잃고 표류할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갈 길을 잃어버린 ‘나’를 꾸짖고, 정신을 차려 길을 찾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남을 탓하고 주변을 원망합니다.

살아온 환경을 원망하고 여기저기에 핑계를 대면서,

이런 저런 생각만 굴리다가 주저앉아

버립니다.

그리하여 더 큰 불행의 수렁 속에 빠져듭니다.

내 탓인데 주저앉아 있으면 어떡합니까?

위기를 벗어날 생각은 않고 근심걱정에 빠져만 있으면 누가 구해줍니까?

이러한 때가 찾아들면 스스로 용기를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용기를 불러 일으켜야 기운이 생겨나고 지금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살다보면 근심걱정은 늘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업보중생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근심걱정에 잠기고 불안 속에 빠져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어지간한 근심걱정은 모두 내려놓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 할 바를 잘 실천하며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일상의 의식을 바꾸어 나에 대한 집착을 조금씩 비우고,

나에게 찾아든 근심걱정 등을 자꾸자꾸 내려놓고자 하십시오.

의식이 깨어나고 의식이 바뀌어야 삶에 변화가 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불교가 무엇입니까?

‘나’ 곧 나의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도록 깨우치는 종교입니다.

부처님은 그 길을 보이신 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발견하여 그 길을

사람들에게 전하신 분입니다.

그 길을 다듬어 모든 사람들이

갈 수 있게 하신 분입니다.

인간 정신의 황무지에서 탐욕을 갈아엎고 성냄을 잠재우고

어리석음을 뽑아내어, 씨뿌릴 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하신 분입니다.

물론 이 황폐한 대지를 경작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비와

햇볕과 거름도 필요하고 제초작업도

해주어야 합니다.

인간 정신의 경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하루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보면서, 불필요한

근심걱정을 내려놓고 나를 향상시키는,

선하고도 바람직한 일들을 오늘 이 자리에서 해나가야 합니다.

결코 나에게 맞고 좋은 것만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싫든 좋든 오늘을 기꺼이 맞이하여,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 곧 무더운 여름이 됩니다.

덥기 때문에 견디기가 힘들고,

덥기 때문에 활동하는 것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무더위가 없어 보십시오.

우선 쌀밥을 먹지 못합니다.

여러 가지 곡식이며 과일이며 채소 등을 먹을 수 없습니다.

덥고 비가 많은 여름 덕분에, 생존에 필요한 곡식 등을

잘 재배 할 수 있습니다.

그 더운 땡볕을 이용하지 않으면 결실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더위가 싫다고 게을리 살면 어떻게 됩니까?

논밭은 잡초에 지배당하여 황폐해져 버리고, 수확은 아득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름의 더위를 고맙게 생각하여 잘 받아들이고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수확이 있고 성공이 있고 겨울이 편안해 집니다.

더운 여름만이 아닙니다.

신선한 가을도 필요하고, 따스한 봄과 추운 겨울도 필요합니다 .

이 모두가 있어야 이 지구가, 이 자연이, 이 인간의 세계가 건전해 집니다.

우리 인생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계절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어느 것 하나, 거부하거나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어느 계절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지만,

그 계절마다 취해야 할 것은 분명히 취해야 하고, 그 계절에 해야 할 것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왜? 봄, 여름, 가을, 겨울과인간은 늘 함께 해야할 인연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봄에는 따스한 기운으로 모든 것을

소생시키고, 여름에는 땀을 흘리고,

가을에는 풍요로움과 신선함을 누릴 줄 알아야 하며,

삭막한 겨울에는 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반야의 실천입니다.

깊이 있게 반야를 실천하여 바라밀에 이르는

‘행심반야바라밀(行深般若波羅蜜)의 삶입니다.

반야의 실천, 지혜롭게 사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을 알뜰하게, 간절하게, 성실하게, 깊이 있게 가꾸면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반야바라밀을 성취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제대로 노력해 보겠다’는 의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나를 밝은 쪽으로 가꾸어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강조하신 가르침은 행심반야바라밀이요

극락의 삶입니다.

반야바라밀을 깊이 있게 실천하여 극락 같은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밝은 쪽으로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조금 덥고 조금 춥다고 하여 나태해지거나 움츠러 들어서도 아니 되고,

조금 배가 고프다고 하여 허겁지겁 살아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고 배부를 때도 있고

배고플 때도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이러한 곳일진대, 싫어한들 별 수가 있겠습니까?

싫은 그 속에서 잘 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잘 다루고 지키고 밝은 쪽으로 가꾸어 나가면서,

적절하게 대처하면 됩니다.

내가 나를 적절하게 다루고 지키고

가꾸어 나가는 것.

이것이 행심반야바라밀입니다.

내가 나와 내 주위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보고, 나와 남을 적절하게

다루고 지키고 가꾸면서 함께 살리는 삶은 사는 것.

이것이 극락 같은 삶이요 행심반야바라밀의 삶입니다.

요즘 많은 불자들이 기도를 합니다.

왜 기도를 합니까?

극락 같은 삶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이 때 적절한 원을 세워

바른 방법으로 기도를 하면 기도 성취가

되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욕심으로 기도를 하거나

요행을 바라고 기도를 하면 절대로 기도는 성취되지 않습니다.

욕심과 요행수를 떠나 알뜰하고 성실하게 깊이 있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왜? 알뜰하고 성실하고 깊이 있는

이 마음 자세가 바로 진짜 기도요,

내가 알뜰하고 성실하고 깊이 있게 행하는 그 기도자체가

바로 나를 밝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행심반야바라밀, 곧 깊은 반야바라밀의 실천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행복을 바란다면 나와 가족과 이웃을 향해

허욕과 집착을 버리고 늘 행심반야바라밀로 임하십시오.

알뜰하고 성실하고 깊이 있게 임하십시오.

이렇게 살면 모든 것이

다 원만하게 해결됩니다.

실로 불자의 기도는 ‘나’의 그릇된

집착을 벗어버리는 기도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

그릇된 집착이라 함은 ‘나’의 허욕입니다.

가령 가족을 향한

허욕을 예를 들면 자식에 대한 그릇된 욕심,

내 자식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그릇된 집착과 기대심리 등입니다.

이것부터 놓아버려야 합니다.

가족에 대한 ‘나’ 의 그릇된 집착을 버리고 헛된 욕심을 죽이면,

남편, 아내, 아들, 딸 들은 차츰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야 이 그릇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아주 간단합니다.

‘잘못했습니다’로 기도를 시작하면 됩니다.

참회의 마음을 품고, 참회의 절을 하고, 참회의 염불을 하면 됩니다.

지극하고 성실하고 깊이 있게 ‘잘못했습니다.

’ 하면서

참회를 하면, 나의 허욕과 집착은 여름철에 얼음 녹듯이 녹아내립니다.

그 다음에 축원을 하십시오.

‘성실하게 일하는 남편의

승진이나 성공’을 축원하고, ‘고3인 우리 아들딸 원하는 대학에

잘 가게 해주십사’ 축원하고, ‘가족 모두의 건강과 집안의 평안’을

축원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공부와 향상, 곧 행심반야바라밀에 대해서도

축원 하십시오.

모든 축원이 잘 이루어 질 것입니다.

절대로 허욕에 찌들고 집착에 찌든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허욕에서 비롯된 기도의 결과는 자명합니다.

만사불성(萬事不成)입니다.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반대로 ‘나’의 욕심과 집착을 참회하고,

알뜰함과 정성을 담아 기도하면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다 자비를 더하면 그야말로

참된 불자가 됩니다.

자비(慈悲)! 자비가 무엇입니까? 주위를 잘 살피고 돌아보고

가꾸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정의하면, 나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의 삶을 사는 것이 자비로운 삶입니다.

그러나 내 이롭기를 앞세우면 남을 이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이기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늘 ‘남을 돌아보고

살피고 베풀며 살 것’을 강조하고,

이를 일컬어 자비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이 자비에 대해서는 참으로 할 말이 많지만 내가 좋아하는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라마의 이야기로 대신 하고자 합니다.

나는 달라이라마를 참 좋아합니다.

달라이라마는 나라를 잃고

조국을 떠난 상황에서도 세상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으며,

자신들을 박해한 사람들을 용서 했습니다.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행동으로 보여준 그는 참으로 용기 있는 분입니다.

달라이라마는 정직한 분입니다.

그이 말에는 가식이 없습니다.

그럴듯하게 꾸민 말이나 어려운 말을 쓰는 법이 없습니다.

평범한 말과 일상의 언어로 많은 사람들을 평화로움과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또한 달라이라마는 유쾌한 분입니다.

남의 나라에 기대어 살면서도 자신들을 그곳으로 내친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사랑으로 돌려 인류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어른 노릇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용서와 정직과 유쾌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바로 자비심으로부터 나옵니다.

자비심이 깊기 때문에 늘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달라이라마를 처음 만난 것은 20여 년 전인 1991년이며,

첫 만남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라싸에서 참으로 잘 쫓겨나셨습니다.

아니었으면 당신의 놀이터가

어떻게 전 세계로 넓어졌겠습니까?

모영감(모택동)의 은혜가 큽니다” 달라이라마는 박장대소를 하였고,

나는 또 물었습니다.

“모영감이 죽었을 때 조전은 보냈는지요?”

“예, 바로 보냈습니다.”

사실 도의 차원에서 보면 은인과 원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농담을 나누었습니다.

인자하고 마음씨 좋은 달라이라마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만남이 이어졌습니다.

달라이라마는 세계인과

대화를 나눌 때, 일상적인 대화의 방법으로 상대방이 그 너머의 세계를

스스로 깨닫게 합니다.

종교의 우열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훌륭한 자질과 품성을 갖추고 있다고 가르치며,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믿게 합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자비심입니다.

달라이라마는 사람들에게 인과의 도리를 일러주고 세계의 본질과 현상을

이야기하여 스스로 깨치도록 도와줍니다.

깨달음의 길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일러주고 스스로가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불교의 본질은 자비입니다.

어떻게

실천하는 것이 자비일까요?

달라이라마는 198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

상금의 대부분을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나병 환자의 치료에 쓰라며 테레사 수녀에게 보시하였고,

거액을 굶주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그 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당신네들에게도 참으로 많은 난민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잘 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왜 아프리카에 그 소중한 상금을 줍니까?”

달라이라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가난합니다.

난민의 수도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못 먹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배고픈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아프리카에 보낸 상금으로,

다만 얼마의 배고픈 사람이라도 허기를 면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굶주린 사람을 먹여 살리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은 없습니다.

아프리카는 지금 이 시간에도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 입니다.”

얼마나 멋진 마음가짐입니까? 얼마나 큰 자비심입니까?

부처님도 달라이라마도 분명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도 인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서로를 쪼개고 나누고

시기하고 다투는 일일랑은 내려놓고, 부처님께서 깨우쳐주신

가르침을 따라 인간의 기본을

새롭게 하고 의식을 새롭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이 참된 기도요, 행심반야바라밀의 삶이요 진정한 자비임을

잊지 마시고, 헛된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 쉬임없이 흘러가는

이 인생을 멋있게 가꾸어,

영원한 행복을 증득하시기를 두 손 모아 축원 드립니다.

나무사생자부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