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에서 편찬된 대장경을 가리키는 말.
[월:] 2016년 03월
지식기반으로 부(富)의 창출을
일전에 유네스코 활동의 일환으로 태국의 교사와 학생 20여명의 안내를 맡아 하루를 온통 해인사에서 보낸 적이 있다. 이들을 안내하는 동안 단장인 ‘몽콜’이라는 사람이 내게 한국의 스님들은 하루에 몇 번 식사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아침에는 죽이나 스프 등을 간단히 하고 점심에는 밥을, 저녁에는 과일 등으로 간단히 요기를 한다고 했더니 좀 의아해 하는 표정이었다.
나의 불교 상식으로도 그들의 남방불교와 우리와는 수행 방법에서 좀 차이가 있다고 알고 있기에 예사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그들 식의 수행이 옳다고 믿는 것 같았다. 민족이 다르고 국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데도 말이다.
이처럼 공간 경계에 의한 문화의 차이도 크지만 시간의 흐름에 의한 차이 또한 엄청나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 ‘부(富)의 미래’ 등의 역저에서 약 1만년 전 선사시대에 우리 인류가 사냥이나 식물을 채집해서 먹다가 최초로 씨앗을 심었을 때를 농업의 발생이라 보았다. 언제 닥칠지 모를 궂은 날씨에 대비하여 잉여생산을 해 두자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일컬어 ‘인류 최초의 부(富)창출시스템’이라 거창하게 이름 붙였다. 이후 농경시대를 제1의 물결시대로 보았고, 두 번째 부의 창출시스템을 17세기말 산업혁명과 더불어 일어난 제2의 물결 시대라고 했다. 이 산업사회는 선진경제의 원동력인 상공업도시와 산업엘리트를 배출하였지만 지구오염이나 식민주의, 전쟁과 빈부의 양극화 등 숱한 문제를 남기고 뒷걸음을 치고 있다. 여기에 산업생산의 전통적 요소가 붕괴되고 정교한 지식과 다양화, 수평화, 네트워크구조 등으로 변신이 시도되는 제3의 물결시대가 열렸다.
제1의 물결시대가 ‘키우는 것〔growing〕’이 중심이라면, 제2의 물결시대는 ’만드는 것〔making〕’이 중심이었고, 제3의 물결시대는 ‘서비스하는〔serving〕, 생각하는〔thinking〕, 아는〔knowing〕, 경험하는〔experiencing〕’것 등이 중심이 되었다.
이 시대 문화의 심층기반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지식이라 할 수 있다. 미래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고 새로운 부를 축적하고자 한다면 시간의 빠르기를 조정하는 문제와, 공간의 확장을 하는 문제와 누가 지식기반사회를 선도하고 활용하는가에 달렸다고 하겠다. 산업사회의 관료주의는 선진 지식기반시스템의 발전을 방해하고 혁신의 시도가 덜할 뿐아니라 시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기업이나 NGO가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가 하면 교육이나 행정관료조직과 정치조직은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어 재조정과 조화가 불가피하다.
다음은 장소와 공간경계의 상실이다. 이미 우리 사회도 공간개념이 무너지고 있다. 인터넷과 IT산업의 성장은 공간의 의미를 무색케 하여 누가 더 빨리 값싼 노동력으로 다른 사람과 경쟁하느냐에 달려 있다. 연간 국경을 넘는 사람이 5억 명으로 세계 인구의 8%나 된다고 하니 인터넷이 아니라도 삶의 공간이 확대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여기에다 지식경제라는 새로운 부의 창출시스템 이 벌써부터 설치고 있다. 하나 하나의 ‘데이터’가 모여서 ‘정보’가 되고, 그 정보는 정리되고 해석되어 ‘지식’이 된다. 이 지식이란 자원의 가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급신장 된다. 지식의 성격 자체가 원래 비 경쟁적이므로 많은 사람이 사용해도 감소하지 않고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으며 사용자가 많을수록 확대재생산 될 수 있다. 형태가 없지만 조종할 수 있고, 어떤 상품보다 이동이 편리하다. 요즈음 국내 대기업이 계속 메모리 용량이 큰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을 보면 점점 더 작은 공간에 저장할 수도 있다. 부의 창출에서 지식의 중요성은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할 것이고 지속적으로 커지면서 변신을 거듭할 것이다.
앞으로 선진국의 경제는 어쩔 수 없이 두뇌중심의 지식경제로의 전환이 불가피할 것이고,. 따라서 범 지구차원의 두뇌은행(brain bank)은 부와 직결되므로 보다 많은 국가들이 접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휘청거리고 있는 우리 경제도 눈앞의 문제에 급급해 해서는 안 된다. 부의 혁명을 촉발하는 세 가지 핵심 원동력인 시간, 공간, 지식과 우리 사이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변화를 논의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장기적 안목에서 교육을 생각하고 인재를 육성하여 지식기반사회에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형춘 香岩 글. 월간반야 2006년 11월 제72호
지도자의 말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회에서의 삶의 성패는 이승에 와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하는 것과, 이 사람들과의 만남을 ‘어떤 관계로 승화시키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원만하게 이어주는데는 그 도구라 할 수 있는 말이 주된 역할을 하는데, 이 말은 사람뿐만 아니라 주문(呪文, 呪術文)을 통해 신과도 관계를 맺게 하였고 이것이 발달하여 문학의 기원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이러한 말[言語]을 잘 이용하는 사람들은 종종 남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집단의 지도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아니 대개의 경우 큰 조직의 지도자들은 말로써 그 구성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물론 그 말의 이면에는 생각이 깃들어 있으니까 내면의 뜻이 말을 통해 상대방에 전달되어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러니까 지도자와 말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고, 한 사회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말을 잘 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기도 한다.
요즈음 한국사회도 지도자의 말 때문에 말이 많다. 한때는 대통령의 말이 너무 솔직하고 간단명료하여 지도자로서의 말이 ‘정제(精製)’되지 않았다고 시비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쉬운 말과 꾸미지 않은 말이 특징이었다. 쉬운 말과 진솔한 표현이 대통령의 화법의 중심이었다. 가성을 쓰지 않고 구어체(말하듯이)로 연설하여 한글세대다운 대통령이라는 평도 있었다.
사실 말하기에서 가장 주요한 요체는 맞춤법과 표준어에 맞게 ‘바른말을 쓰는 것’과, 난해한 한자어나 외국어 외래어보다는 ‘쉬운 우리말을 찾아 쓰는 것’과, 은어나 속어 비어 등을 버리고 ‘곱고 아름다운 토박이말을 가려 쓰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의 지도자는 말하기에서는 별로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우리 대통령의 화법이 달라졌다. 갑자기 말이 어려워졌다. 간단명료하던 화법이 복잡 다기해 지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을 계속하고 있다. ‘권력을 통째로 내놓는 것도 검토하겠다’는 등 보통사람의 상식적인 수준으로 이해가 안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수십 년 한국어를 강의해 온 필자도 그 말의 참뜻을 이해할 수 없으니 답답하다.
말하기의 기본은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보다 잘 표현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보다 잘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쉬운 말은 모든 사람이 이해하기 쉽고, 진실을 바탕으로 하여 설득력을 가진다. 듣는 이로 하여금 탈 권위적이어서 친밀감을 느끼는가 하면 생산적이고 경쟁력을 높여준다. 그러나 어려운 말은 말에 복선이 깔려 있고 다른 노림수가 있을 수 있다. 권위적이고 고압적이며, 가식적이고 독선적이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개를 돌리게 한다.
이제 돌려진 고개가 다시 바로 돌아오도록 대통령의 화법이 본래대로 돌아오면 어떨까.
김형춘 (반야거사회 회장 /창원 문성고 교장) 글. 월간반야 2005년 10월 제 5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