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와 상식

옛 성현의 말씀에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살아남을 것이요,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자는 망하리라(順天者存 逆天者亡)’고 하였다. 이게 어찌 꼭 하늘의 뜻이라고만 하겠는가. 사물의 이치에 순응하라는 삶의 지혜를 강조한 말씀이리라.

이처럼 ‘이치에 순응하는 것’을 우리는 ‘순리(順理)’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거나 순리대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순리대로 사는 것일까. 먼저 사람으로서의 ‘도리(道理)’를 다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에 충실한 삶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매한 인격과 심오한 학식에 바탕을 둔 삶이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상식에 입각한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천리(天理)’를 따르는 것이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본다. ‘천리’란 하늘의 이치이기도 하지만 자연계의 이치라고 하겠다. 우리가 인지하는 자연계의 모든 현상에는 원리나 법칙을 벗어난 것이 단 한가지도 없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떠가고, 눈보라가 치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익어가는 등 그 어느 하나도 자연계의 법칙을 벗어난 것은 없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보라. 쏟아지는 폭우를 막아 보라. 자연의 이치를 거역하며 산다는 것이 진실로 가능한지를.

끝으로, 신의 ‘섭리(攝理)’를 따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 중에 중요한 하나가 인간능력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영원과 한계상황에 부딪쳤을 때에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 또한 많다. 신의 섭리란 신이 이 세계를 지배·소유하면서 인간 구제의 목적으로 영원한 계획에 의하여 인도하는 질서를 말함이니, 영원의 차원에서 이 질서를 거역할 수 있는 명분 또한 찾기 어렵다.

그러나 도리(道理)도, 천리(天理)도, 섭리(攝理)도 가장 인간적인 바탕 위에서 상식의 한계에서 따를 수 있으리라.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1년 1월 (제2호)

가피력(加被力)

가피는 불보살이 불가사의한 힘으로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이나 보살이 사 람들에게 주는 힘.

수재민과 북한주민

지난 밤 텔레비전 뉴스에서 이번 여름 수재민을 돕기 위한 국민성금이1,259억원 이라고 자랑스레 소식을 전하는가 하면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고 전했다. 신문도 연일 성금 기탁자 명단과 금액을 보도하고, 방송도 뉴스 끝에는 성금을 낸 사람들을 일일이 알려준다. 이웃이 어려움을 겪을 때에 우리 옛말처럼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여럿이 힘을 합쳐 한 사람을 돕는 격으로 보면 대단히 흐뭇한 일이고, 미풍양속이라고 다른 민족에게 자랑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일단은 긍정적으로 찬사를 보내는 듯하면서도(IMF 때의 금모으기 등) 고개를 갸우뚱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참으로 정치하기 좋은 나라’라는 것이다. 천재지변 등 자연재난을 당하든지, IMF 같은 인재를 당하든지 하면 곧바로 언론을 앞세워 국민정서와 민족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본래 정이 많은 민족이라 앞뒤 가리지 않고 저금통을 털고, 주머니를 털고, 장롱을 뒤진다. 웬만한 재해나 위기는 국민성금으로 해결되고 위정자나 담당 공무원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실정이나 과실도 따라서 묻혀버리게 마련이다. 적당히 두루뭉실하게 넘어 가고 국민들은 이 사실을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엄연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세계 200여 국가 중에서 경제력이나 교역량에서 10위 권에 들어 있고, IT산업을 비롯한 첨단분야에서도 선두권을 유지하는가 하면 국민 교육수준을 보면 다른 나라에 뒤쳐질 이유가 없다. 이런 나라에서 재앙이 나면 추경예산과 국민성금으로 땜질식 처방이나 해서야 되겠는가. 정부와 지방자치 단체에서 해마다 적립하여야 할 재해 기금은 한푼도 없다니 무슨 말인가.

수재와 태풍 후에 재해지역을 취재한 기사를 보면서 얼마나 가슴아파 했는가.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는 ‘산불에 당하고 물에 당하고…’, ‘성한 구석 한 곳 없는…’등 처참한 모습 투성이가 아니었는가. 우리 선조들의 가르침대로 통치자가 ‘치산치수(治山治水)’라도 제대로 했더라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지금 우리 이웃은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고 가슴아파 하는데, 정부는 북한동포를 돕고 대북관계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인상을 주니 더욱 한심스럽다는 것이다. ‘수재의연금’으로는 수재민을 돕고, ‘국고’로는 북한주민을 돕는 격이 되어 버렸다. 당장 끼니 때우기도 어려운 수재민을 지척에 두고, 북한 동포를 돕는다고 쌀 30만톤을 북한에 보내는 선적작업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으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쌀 30만톤이면 얼마나 될까. 10톤짜리 트럭으로 3천대니 경부고속도로에 늘어서면 족히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될게다. 그 양이 문제가 아니다. 북에 대한 지원도 중요하다. 거시적인 대북 지원사업이 통일비용을 얼마나 줄여 줄 것인지도 안다. 그러나 우리를 서운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 정책의 우선순위가 되는가 하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내 나라 내 이웃이 중요한가. 아니면 북한주민이 더 소중한가.

이번 기회에 우리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얼마나 자국민의 보호와 지역주민의 권익을 위해 정책을 펴고 행정을 하는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국민이 제 나라에서 적극적인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지구상에서 어디 가서 하소연하겠는가. 최근 미군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우리 여학생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말로만 국민을 위하고 국민을 두려워하고, 서민 복지향상에 노력한다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왜 수재민을 비롯한 우리 국민들이 국가나 자치단체, 관계 기관을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하면서 항변하고 있는 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내 나라를 등지고 이민간 동포들이 다시 되돌아오고 싶은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2년 10월 (제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