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21) – 중송분 3

<경문>

내 널리 삼세 모든 부처님을 따라 배워 속히 보리 이루게 하소서.

시방에 있는 모든 세계가 넓고 크고 미묘하게 장엄되고

모든 여래 대중들에 둘러싸여 보리수나무 아래 계시며

시방에 있는 모든 중생이 일체 우환 모두 떠나 항상 즐겁고

깊고 깊은 바른 법의 이익 얻으며 번뇌 없애 남김 없게 하소서.

내가 보리 위해 수행할 때에 일체중생 갈래 중에 숙명 이루고

항상 출가하여 청정한 계를 닦되 더럽히고 부수는 일 없게 하소서.

하늘이며 용과 야차 구반다들과 사람이며 사람 아닌 무리들에게

세상에 있는 중생들의 모든 말들을 모두모두 소리내어 설법하게 하 소서.

청정한 바라밀을 부지런히 닦고 보리심을 언제나 잊지 않으며

업장의 때를 죄다 모두 없애 버리고 일체 모든 미묘한 행 이루게 하 소서.

모든 혹업 및 마의 경계를 세간의 길 가운데 해탈을 얻어

마치 연꽃이 물이 묻지 않듯이 해와 달이 허공에서 머물지 않듯이 해

일체 악도 괴로움을 제거해 주고 일체중생 즐거움을 고루 주어서

티끌 같은 많은 수의 겁을 지내며 다함없이 시방에 이익 주리다.

<풀이>

보현의 행원이 이타의 원력이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대승의 자리(自利)는 소승의 자리와 다르다. 그것은 ‘이타’(利他)를 먼저 해서 그 이타를 통해서 자리가 내게 돌아온다는 점이다. ‘자미득도선도타’(自未得度先度他)라는 대승의 기치를 천명한 화엄경의 말은 자리보다 이타를 우선한다는 것을 명시해 놓은 것이다. “스스로를 제도하지 못했더라도 남을 먼저 제도하자.”는 기치, 이 기치 하나로 세상의 평화와 안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남을 제도하려할 때 내가 제도된다는 말이다. 사실 이기적 독선을 추구하는 기도는 대승의 기도가 될 수 없다. 또한 대승의 기도가 아닌 것은 진정한 기도가 아니다. 자신의 행운만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사행심이다. 사행심으로 행원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보다 내가 남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더 차원 높은 기도다.

티끌 같은 많은 수의 겁을 지나도록 온 세상에 이익을 주겠다는 광대한 원력이 바로 사람의 마음속에 본래 갖추어진 공덕의 양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갖추어진 무한한 공덕의 양을 누가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사느냐에 따라 보살이 되는 것이다. 보현과 같은 ‘원의 왕’이 마음속의 공덕주임을 자각해야 한다. 공덕의 주인공이 ‘원의 왕’이다. 본래 내 마음의 진실하고 한결같은 진여심(眞如心)이 그대로 공덕주였고, ‘원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업의 장애 때문에 탐․진․치 삼독 때문에 공덕주의 지위인 ‘원의 왕’의 지위를 잃어버린 것이다.

불교의 사상을 ‘복귀 사상’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복귀’란 본래대로 회복하여 돌아간다는 뜻이다. 본래는 나쁜 업에 물들지 않았는데 어쩌다 물이 들었으니 오염되지 않았던 본래대로 돌려놓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염된 마음을 정화하자는 것이다. 또 이런 비유가 경전 속에 자주 등장한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유랑하면서 온갖 고생을 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고향에 돌아가기만 하면 그는 매우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가 있는 입장이었다. 그것은 고향에 있는 그의 부모가 큰 재력과 세도를 지녔기 때문에, 부모의 덕으로 아무 고생 없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그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귀향하면 해결되는 문제를 돌아가지 못해 해결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원효 스님은 《기신론 소》에 서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넉넉히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 불교라 하였다. 어떤 경계에 집착하거나 불안하여 쫓기는 상태가 되면, 마음이 마음의 자리를 잃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넉넉하던 정신 공간이 좁아져 여유가 없어진다. 번뇌와 망상을 따라 움직일 뿐, 자기 마음을 바로 보지 못하여 마음이 공덕의 주인 노릇을 못하는 것이다. 주인이 주인 역할을 못하면 집안 일에 지장이 생기고 다른 이의 침해를 받는 수가 생기는 것이다.

보현의 거룩한 행원을 다시 우러러 보자. 원하는 바 하나하나가 온 중생을 위해서고 온 세상을 위해서다. 뜻이 큰 사람은 자기 거처 공간이 넓어진다. 행원을 실천하는 사람은 온 우주 공간이 자기 집 안방에 불과한 것이다. 《채근담》에 ‘뜻이 큰 사람은 한 칸의 방도 넓다’는 말이 있다. 내가 사는 가옥의 평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뜻이 얼마나 큰가가 중요하다. 가장 큰 뜻을 가지고 사람이 보현의 행자이다. 뜻이 작은 사람들은 언제나 사리사욕에 어두워 공간의 평수만 크게 차지하러 다투기 일쑤다. 내가 남에게 은혜를 베풀지 못하면 내 존재의 의미는 그만큼 감소되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1월

보현행원품 (20) – 중송분 2

<경문>

내 옛적에 지은 모든 악업은 모두가 탐․ 진․치 때문이었네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지은 악업들, 내 이제 그 모두를 참회하리라.

시방 일체중생들, 이승의 유학 및 무학, 일체 여래와 보살들,

그들 가진 공덕을 모두 따라 기뻐하리라.

시방에 있는 세상의 등불, 최초로 보리를 성취한 자여!

내 이제 모두께 권청하오니 위없는 묘한 법륜 굴러주소서,

부처님 만약 열반을 보이시려 하면 내 모두 지성으로 권청하리다.

원하오니 오래오래 티끌 수 겁에 머무시어

일체 모든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소서.

부처님을 예경하고 찬탄하고 공양한 것과

세상에 계시어 법륜을 굴리시길 청하며

기뻐하고 참회한 모든 선근을 중생과 불도에 회향하리라.

내 일체 여래를 따라 배워 보현의 원만행을 닦아 익혀서

과거 모든 여래와 현재 시방의 부처님

그리고 미래 일체 천상과 인간의 스승께 공양 하오니

모든 뜻과 기쁨 원만케 하소서.

<풀이>

사람이 나쁜 업을 짓게 되는 근본 원인이 탐․ 진․치 삼독에 있다. 욕심, 성냄, 어리석음의 독소에 의해 악업을 지으므로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수행이다. 사리불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당신이 추구하는 열반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탐․진․치 삼독이 사라진 것이 열반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참회게로 알려진 사구게가 보현행원품 응송에 나온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잘못된 행위를 한 것은 모두 탐․진․ 치 때문이었고 이로 인해 그릇된 행동, 그릇된 말, 그릇된 생각이 함부로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 점을 참회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참회하면 좋을 일을 참회하지 않는 것은 병이 깊은 환자가 좋은 약을 마다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승의 수행자들을 아직 배우는 당계에 있는 이를 유학이라 하고, 다 배워 마친 이를 무학이라 한다. 중생들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수행의 공덕을 언제나 좋아하겠다는 마음이야말로 수행의 가치를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부처님은 세상의 등불이시다. 어둠을 밝혀 주는 등불처럼 중생들의 마음속에 지혜의 빛과 자비의 빛을 살려내는 분이시다. 그의 설법은 감로수로 목마른 사람의 갈증을 풀어주듯이, 모든 의혹을 풀어 주고 답답함을 없애 주는 탁월한 감화력이 있다. 듣고 싶은 노래를 청하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듯,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그 법문을 외워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법의 재산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의 일생이 법의 재산으로 채워져야 삶의 진정한 보람이 남는 것이다. 불교를 신행하는 것은 부처님으로부터 법의 재산을 상속받는 일이다. 세속의 부귀가 법재를 능가할 수 없는 것이다. 법의 가치와 법의 존엄성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아나야 부처님의 세상이 만들어진다. 법을 보고 살아야 한다. 부처님이《아함경》에 서 이르기를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고 하였다. 따라서 법을 보고 사는 것이 부처님을 보고 사는 것이다. 불교라는 종교 단체는 부처님을 보고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요, 법을 보고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법을 가까이 하는 것이 부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고 부처님을 가까이 할 때 인생을 바르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전국의 사찰을 중심으로 봉축행사가 이루어진다. 해마다 우리는 이 날을 맞이하여 부처님 오신 뜻을 생각해 본다. 부처님께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이 일대사인연을 위하여 이 세상에 출현하셨다고 한다. 큰일을 하기 위한 인연이 있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다. 그것을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를 중생들에게 부처의 지견을 열어 주고, 보여 주고, 깨닫게 해 주고, 들어오게 해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부처님의 지견이란 부처님이 알고 보는 깨달음을 통해 얻은 진리를 말한다. 마치 지식이 없으면 알지 못하고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하다가 지식을 얻어서 알고 눈이 있어 보게 되는 것처럼 중생들의 식견의 차원을 높여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결국 불교는 마음의 눈을 뜨자는 취지다. 마음의 눈을 뜨는 자만이 부처님을 볼 수 있다.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의 마음속에 부처님이 오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공간의 장소로 오는 것이 아니고, 교통을 이용하여 오는 것도 아니다. 옴이 없이 오시고, 감이 없이 가시는 부처님의 현주소는 바로 중생의 마음속이다. 내 마음이 부처님 계시는 곳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살아야 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12월 제61호

보현행원품 (2) – 서분

<경문> 그때 보현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수승한 공덕을 찬탄하고 나서 여러 보살들과 선재에게 말했다. 선남자여, 여래의 공덕은 시방의 일체 부처님들이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국토의 가장 작은 먼지 수만큼 많은 겁을 지나오면서, 서로 계속하여 말씀하여도 다 말할 수 없느니라. 만약에 누구든지 이 부처님 공덕의 문을 성취하려면 응당 열가지 광대한 행원을 닦아야 하나니, 그 열가지 행원이란 첫째 모든 부처님께 예경 드리고, 둘째 부처님을 칭찬하고, 셋째 널리 공양을 닦고 넷째, 업장을 참회하고 다섯째, 공덕을 기뻐하고, 여섯째 법륜굴리기를 청하고, 일곱째 부처님이 세상에 머무시기를 청하고, 여덟째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고, 아홉째 항상 중생들을 보살피고, 열째 널리 모두 회향하는 것이니라. <풀이> 보현보살은 행원을 상징하는보살이다. 원래 범어 사만타바드라(Samantabadra)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보살로, ‘보현’ 혹은 ‘변길(遍吉)’이라 번역되기도 한다. 『화엄경』에서는 문수보살과 함께 법신불 비로자나의 협시불로 등장한다. 문수보살이 여래의 왼편에 서서 부처님의 지덕(智德)을 맡는 반면, 보현은 오른쪽에 서서 행덕(行德)을 맡는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문수·보현을 화엄삼성(華嚴三聖)이라 한다. 특히 보현의 역할은 불도를 수행·실천하는 중생들의 근기를 성숙시키기 위해 교(敎)를 설하는 교기인분(敎起因分)을 관장한다. 모든 언어와 사량(思量)이 끊어진 부처님의 깨달은 세계를 성해과분(性海果分)이라 하고, 이를 비로자나(毘盧遮那)의 법문이라 한다. 반면에 중생들의 기연(機緣)에 응해서 법을 설하기 시작하는 교기인분을 보현의 법문이라고 한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서 구도행각을 하는 일련의 과정을 설해 놓은 것이 「입법계품」이다. 선재동자가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만난 후 보현보살의 모공찰(毛空刹)로 들어가는 것이 입법계이다. 깨달음을 완성하는 것이 곧 행원의 완성이므로 실천적 행동력이 보현을 통해 완성됨을 보여주고 있다. 흔히 대승불교를 보살승불교라 하여, 보살승의 실천을 통해 부처의 과위(果位)를 증득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보살도는 이타원력(利他願力)인 행원인데, 보현보살이 이 행원을 열 가지로 나누어 설하는 것이 「보현행원품」의 내용이다. 행원(行願)이라고 할 때, ‘행’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신체적 활동을, ‘원’은 마음 속으로 항상 구제하겠다는 생각을 잊지 않는 정신적인 의지를 가리킨다. 물론 신구의(身口意) 삼업의 업행이 대비원력에 의해 일어날 때가 행원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또 대승불교에서는, 대표적 보살행의 특징을 세 가지 혹은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이를테면 예불문에 나오는 4대보살의 명호가 있는데 ‘문수·보현·관음·지장’으로 문수는 지혜를 의인화하여 나오는 보살이고, 보현은 행원을, 관음은 자비를, 그리고 지장은 악도중생 구원을 위한 특별한 비(悲)를 띄고 나오는 것을 의인화한 보살이다. ‘문수·보현·관음’을 3대보살이라 하고, ‘지장’을 합하여 4대보살이라고 한다. 사람의 신체에 비유해 말한다면 문수는 눈이고, 관음은 손이며, 보현은 발이다. 지장은 대비천제로 애끓는 모정과 같은 마음으로 아픈 중생을 자식처럼 불쌍히 여겨 흘리는 눈물과 같은 보살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전신을 움직이는 활동을 상징하는 것은 역시 보현보살이다. 이는 대승적인 실천력에 의해 부처님의 과덕(果德)이 성취되고 동시에 부처님의 법이 살아있는 활동의 상태가 되어야 법의 가치가 중생들에게 입혀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보현행원을 고려시대 균여대사는 노래로 지어 일반사람들이 부르며 외우게 했다. 향가문학으로 간주되는 국문학사상 유명한 가요다. 「보현십원가」라는 이 노래는 십종행원 하나하나에 붙인 가사 10수와 총결무진가(總結無盡歌) 1수를 더해 모두 11수로 되어 있다. 보현의 10종행원은 결국 부처님의 공덕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는 동기를 밝히면서 말할 수없고 말할 수없는 부처님 국토의 작은 먼지 수만큼 많은 겁을 지나면서 설해도 다 말할 수 없는 부처님의 공덕이 보현의 10종 행원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밝혀 놓은 것이 서두의 이야기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5월 제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