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스님─불교 공부에 대해서

고산큰스님을 찾아서

문: 타 종교와 다른, 불교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답: 모든 종교가 ‘사람을 선하게 만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흔히들 ‘종교는 다 똑같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는 자신의 행복을 구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전 인류를 구제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가르침 또한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할 수 있고, 그 가르침 속에서 향상의 길로 나아갈 수 있어야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행복해지고,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참되게 살아도 구제 될 수 없다”는 식의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유일.

절대권한의 신 앞에서 언제나 수용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면, 이는 인간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그럼 불교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불교는 믿어야 할 절대적인 대상이 없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어둡고 어리석은 사람을 밝고 슬기롭게 변화시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의 목표입니다.

따라서 객관적인 믿음의 대상이 꼭 있어야만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깊숙한 곳에 잠재된 불성을 찾기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둘째, 불교는 신 중심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 본위의 종교입니다.

신이 혜택을 주거나 삶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수행과 정진만이 행복을 좌우한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종교입니다.

유일신에 매달리는 자만이 선택받을 수 있다는 논리는 불교의 평등사상과 질적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종교가 어떠한 자격이나 전제 조건 없이 모두에게 평화와 향상의 길을 열어주는 종교인지를 되새겨 보고, 참된 진리를 일깨워주는 가르침이라는 확신 속에서 종교를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째, 불교는 평등한 종교이며, 타력신앙이 아니라 자력해탈(自力解脫)의 종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문수.

보현보살, 소나 개와 같은 축생, 나아가 산천초목까지도 하나 같이평등하여 그 생명이 존귀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곧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인간만이 아니라 일체 미물들까지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 석가모니처럼 될 수 있음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마음에 낀 때를 씻어내어 무명을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때를 씻고 해탈하면 행복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 일반인들은 불교를 알고 싶어도 한문 경전을 가까이 할 수가 없고, 어렵다고들 합니다.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답: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팔만대장경이 모두 한글로 번역되어 있고, 옛 고승들의 어록도 한글로 되어 있습니다.

또 불교서점에 가면 부처님 일대기를 비롯하여 알기 쉬운 불교 상식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 책들을 사서 마음을 모아 정독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읽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가까운 절에 계신 스님을 찾아가서 여쭈어 보기도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하십시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연히 깊게 들어가게 됩니다.

문: 수행의 요체(要諦)는 무엇입니까? 답: 흔히 수행이라고 하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염불.

참선.

주력.

경전연구 등의 공부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깨달음은 그 공부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업에 몰두하거나 밭을 매거나 밥을 짓거나 빨래를 하거나 모두가 수행이 될 수가 있습니다.

밭농사를 짓는 것을 예로 들어 봅시다.

‘비탈진 이 밭에는 무엇을 심을까? 이 씨앗을 얕게 심으면 까치가 까먹을 것이고 깊이 심으면 싹이 더디게 나지 않을까?…

’ 이렇게 농사짓는 모든 일에 심사숙고 할 때 실한 작물을 많이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밥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쌀을 씻어서 밥솥에 안치는 것 보다는 ‘몸에 좋은 잡곡을 섞어야지, 연로한 부모님을 위해 조금 진밥을 해야겠다.

’이렇게 바르고 좋은 마음으로 모든 일을 성심성의껏 하는 것이 수행의 요체요 기본입니다.

그래서 ‘불사문중 불사일법(佛事門中 不捨一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 되고자 하는 일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심에 이탈 되어서 하는 것은 외도요.

사도입니다.

불자를 자칭할지라도 양심을 져버리고 살면 외도요, 한 번도 절에 안 가본 사람이라 할지라도 제 양심을 속이지 않고 맡은 바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남의 힘든 일을 도와 주면서 사람답게 살면 불교를 잘 믿고 수행 잘 하는 불자인 것입니다.

문: 불교적인 삶에 있어 기준점이 될 만한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답: 육바라밀을 기준으로 삼으면 좋습니다.

불교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에서 육바라밀로, 육바라밀에서 십바라밀로, 나아가 보현보살의 만행을 닦고 실천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실천의 중심에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여섯 가지 덕목으로 구성된 육바라밀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보시는 베풀어라.

지계는 몸단속을 잘하라.

인욕은 참을줄 알아라.

정진은 시작하였거든 끝까지 밀고 나가라, 선정은 고요한 마음으로 잘 생각해서 하라, 그렇게 하면 지혜가 나서 무엇이든지 척척 잘 된다.

이것이 육바라밀입니다.

육바라밀의 첫째인 보시는 베푸는 것입니다.

남을 위하는 마음씨를 품고, 말 한마디 할 때에도 상대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좋은 말로 베풀고 살며, 돈도 나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 벌면 나누어 줄줄 아는 것입니다.

이 보시는 크게 법시.

재시.

무외시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법시는 진리를 가르치고 전하는 베풂을 말하고, 재시는 단순히 재물을 나누는 것 뿐만이 아니라 법시를 행할 수 있는 도량을 위하여 재화를 베푸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외시는 고통 받는 자를 위로하여 공포를 없애주고 평화를 얻게 하는 일체의 베풂을 말합니다.

진리나 좋은 법문을 주위에 알리려고 할 때에 먼저 좋은 음식이나 물질로 대접을 하여 서로의 신뢰감이 쌓여갈 때 불법을 전하고, 상대방의 두려움을 위로하며 평화를 얻게 할 때 무외시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 셋 모두가 갖추어진 것이 참된 보시입니다.

두 번째는 지계(持戒)입니다.

지계, 곧 계율을 지킨다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이 계율입니다.

부처님께서 당시의 제자들이 지켜야 할 사항으로 제정해 놓은 것이 계율이요 그 말씀을 모아 놓은 것이 율장(律藏)이 되었지만, 이 계율의 근본적인 생각은 ‘남을 나와 같이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의 인욕(忍辱)은 잘 참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표현하셨는데, 이 사바세계를 번역하면 ‘견딜 감(堪)’,‘참을 인(忍)’의 감인세계가 됩니다.

‘참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계’라는 뜻입니다.

이 혼탁한 세상에는 사리사욕에 눈을 반짝이며 다른 사람을 골탕 먹이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또 상대를 밟고 올라서거나 속이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이런 세계이기에 잘 참고 견디는 사람은 성공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패망하고 불행 해 집니다.

그래서 견디고 참은 감인세계라고 하신것이며, 잘 살기 위해서는 인욕이 꼭 필요한 세계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네 번째는 정진(精進)입니다.

어떤 공부나 일을 계속해서 열심히 하여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것이 정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거나 회사 일을 하다가보면 마음이 느슨해지고 게을러질 때가 옵니다.

바로 이럴 때 처음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입사 면접을 끝내 놓고 입사 여부를 기다릴 때는 대부분이, ‘입사만 시켜주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리를 잡고 나면 처음에 먹은 생각과는 달라집니다.

요령을 피우고 교만을 부립니다.

이때 입사할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잘 정진 할 수 있습니다.

학생도 ‘원하는 어느 학교에 입학하겠다’고 결심한 날의 각오를 상기시키면 열심히 공부하게 되고, 수도하는 사람도 처음 머리를 깎고 입산하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면 깨달음을 이루고 공부를 성취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근수정진은(勤修精進)은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정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진하면 갈등이나 회의 없이 물 흐르듯 순조롭게 정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총무원장으로 있을 때 ‘처음처럼’이라는 캠페인을 많이 보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다섯째의 선정(禪定)은 흔들림 없는 고요한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을 꾸준히 닦아 익히는 정진을 계속 하다보면 저절로 마음이 평화로운 선정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섯째의 지혜(智慧)는 목표를 이루어 내는 능력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목표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능히 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의 본체와 작용을 있는 그대로 볼수 있고 알기 때문에 성취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을 통하여 마음이 고요해지면 저절로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밝은 지혜가 샘솟게 됩니다.

또 지혜롭게 생각하려는 그 생각 자체가 지혜입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나오지 않지만 무엇이든지 하려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샘솟듯이 생겨납니다.

무엇이든지 노력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거기에서 지혜가 샘솟습니다.

이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구든 이 육바라밀을 삶과 수행의 기본 덕목으로 삼게 되면 틀림없이 좋은 결실을 이루고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문: 도인은 어떤 분입니까? 답: ‘도인’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신통력을 부리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한 번 만나 봤으면 합니다.

그런데 도인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왜 ‘길 도(道)’자를 써서 도인이라 했겠습니까? 학생에게는 학생이 해야 할 일을, 농부에게는 농사 잘 짓는 방법을, 아내에게는 아내의 길을, 남편에게는 남편의 올바른 길을, 그리고 누구에게나 직분에 맞게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일러 주는 사람이 도인이기 때문에 ‘길 도(道)’자를 쓰는 것입니다.

진짜 도인은 만유의 생주이멸과 성주괴공을 남김없이 알아서 모든 중생의 나아갈 바를 일러주는 분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런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새는 새의 소리만 듣고 가축은 가축의 소리만 듣듯이, 중생은 같은 인간이면서도 도인의 소리를 귀담아 듣지를 못하고 자신의 속에 갇혀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나아갈 길을 바르게 일러 주는 분! 그 분이 도인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고, ‘나’를 지운 채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문: 많고 불경 가운데 어떤 경전을 보는 것이 좋습니까? 답: 경은 부처님이 되는 길로 인도하는 구도의 지침서요, 온갖 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방법을 적어 놓은 책입니다.

자연, 경을 읽고 탐구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지식으로 쌓아 두기 위함이 아니라, 실천 수행을 하기 위함에 있습니다.

현존하는 경전을 크게 나누어 보면 참선하는 사람이 읽으면 좋은 경전, 공부에 좋은 경전, 중생교화에 효력이 큰 경전 등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자기성불을 위해 정진하는 사람에게는 선가구감.

선문촬요.

육조단경.

금강경오가해 등을 지송하라고 합니다.

경전 공부를 하는 이에게는 초발심자경문부터 시작하여 철학적인 능엄경.

금강경.

원각경.

법화경.

화엄경.

유마경.

해심밀경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중생을 포교하는데 있어서는 여러여러 경전을 가르치는 것 보다 천수경.

반야심경.

관음경 금강경.

법화경을 깨우쳐 주는 것이 적당한데, 이 경전들은 성불에도 좋지만 특히 염송을 하거나 사경을 하는 복덕도 대단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면 경을 봐도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경을 읽는 목적은 그것을 수행의 지침으로 삼아 일념으로 정진하여 열반의 길로 나아감에 있습니다.

마음을 반성하지 않은 채 경전을 본다는 것은 곧 더러운 걸레로 깨끗한 방을 다시 닦는 것과 같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세월만 허비할 뿐입니다.

선을 안이라고 한다면 교는 그 안을 감싸고 북돋워주는 밖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겉과 속이 일치할 때 진정한 공부가 됩니다.

문: 속인들에게 권할만한 염불을 일러 주십시오.

답: 염불은 지극한 마음으로 꾸준히 해야 합니다.

염불을 하는 그 순간에는 자신이 희구하는 그 일을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염하는 부처님만을 관하면서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야 진짜 염불입니다.

그런데 어떤이들은 속으로 계속 ‘~을 해달라’고 하면서 염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원은 처음과 마지막에 원하는 바를 마음속으로 축원하면 그 부처님과 자신은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저절로 전달됩니다.

그러므로 염불을 할 때는 부처님만 생각하십시오.

흔히들 조상천도를 위해선 지장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염하고, 자기 성불을 위해서는 석가모니불을, 학생들 학업성취를 위해서는 문수보살,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많을 때는 관세음보살이 최고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자기 형편을 이야기하면서 어느 부처님 명호를 불러야하는가를 많이 질문합니다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평소에 아미타불을, 관세음보살을 했으면 어떠한 경우에 처하든 계속 관세음보살을 하면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 성불 열반의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 답: 성불 열반의 경계는 본래 청정한 본심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찾으면 성불합니다.

또 그 자리를 찾으면 열반에 들지 말라고 하여도 열반에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열반의 경지는 어떠한 것인가? 열반에 들면 열반의 4덕인 상락아정에 머물게 됩니다.

늘 변함이 없으며, 괴로움이 없고 즐거움만 있으며, 가아(假我)아닌 진아(眞我)만 있으며, 더러운 것 없이 깨끗함만 있는 상태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러한 열반의 경계에 들려고 하면 일체 생각을 다 쉬어 버리고, 쉬었다는 생각도 쉬어버려야 합니다.

쉬고 쉬고 또 쉬어 쉬었다는 생각마저도 쉬어버려야 합니다.

그 자리는 깨달음도 없고, 깨달았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하나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을 이름 하여 열반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공부를 하든지 무념무상의 상태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행하여 열반의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래의 방에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열반묘락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광복 60주년의 기대

을유년 새해가 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밝았다. 올해가 2005년이니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는 해가 되었다. 해방동이가 환갑을 맞게 되었으니 여느 해와는 달리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가져 보고 싶다.

60년 전의 어려운 상황이야 가히 상상이 되지 않는가. 해방의 기쁨도 잠시, 분단의 이념적 갈등과 혼란을 겪었고 급기야 6.25 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나고 온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전쟁의 상처 위에 다시 일어선 나라가 순탄한 역사를 만드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비극의 소용돌이는 20세기 말까지 이어졌고 민주적 절차에 의한 민간 정부가 들어선지도 10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정치적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해 말 ‘교수 신문’에서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에서는 ‘당동벌이(黨同伐異)’가 뽑혔다고 한다. 최근 몇년동안에 선정된 어휘를 보면 오리무중(五里霧中), 이합집산(離合集散), 우왕좌왕(右往左往) 등이었는데, 이어서 ’당동벌이’가 뽑힌 것을 보면 최근의 우리 사회 현실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당동벌이(黨同伐異)’란 ‘후한서(後漢書)’의 ‘당고열전(黨錮列傳)’의 서문에 나오는 글귀인데 ‘같은 무리와는 당을 만들고 다른 자는 공격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자는 깨끗하고 정당하며,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부도덕하고 부정하다는 태도를 지닌 대표적 고사이다.

한나라가 쇠퇴할 무렵 학자들과 정치가들이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는 붕당을 만들어 단합하고,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공격하고 배척하여 당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 풍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사회가 통합하지 못하고 분파가 성행하더니 결국 한나라가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후한서’에는 이러한 뜻이 다시 ‘후한’ 시대에도 등장해 후한의 멸망을 촉진시켰다고 보았다.

지난해 한국은 누가 보아도 정치집단이 ‘당동벌이’의 추악한 태도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 결과 사회는 통합이 아니라 분열되고 분파 되어 많은 문제를 야기 시켰다. 결국 이러한 태도를 끝까지 버리지 못한 집단 모두가 자신들이 주장하는 사실의 정당성, 합리성과는 상관없이 국가와 사회를 심각하게 분열시키고 국가의 발전을 퇴행적으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인식이 이러한 고사성어로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리라. 비단 이런 현상은 정치권에서만 보이는 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일상화 된 풍경이었다. 인터넷 게시판 등의 댓글에 보면 언제나 ‘네편’ 아니면’내편’으로 갈리기 마련이었다.

올해는 어떨까. 제발 정치권의 입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워 또 이와 유사한 사자성어가 나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이따금씩 오르내리는 ‘사자성어’ 중에 이런 말들은 어떨까. ‘포동존이(抱同存異)’ – ‘같은 뜻을 지닌 이를 포용하되, 다른 뜻을 지닌 이도 인정하여 준다. 또는 ‘해원상생(解寃相生)’ – ‘원한을 풀고, 서로 더불어 산다’는 어떨까.

새봄과 함께 이 땅에도 희망과 상생의 기운이 깃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김형춘 香巖 (반야거사회 회장) 글. 월간반야 2005년 2월 제51호

고산스님─마음 잘 닦아 쓰면 모든 일이 이뤄져

마음 잘 닦아 쓰면 모든 일이 이뤄져

-고산스님-

점안하지 않은 부처님에게는 영험이 없습니다.

점안식이 끝나야 변성활불(變成活佛), 살아있고 영험 있는 부처님이 됩니다.

불상에 점을 찍으면 지혜가 생기고, 주장자로 3번 치면 불상이 산 부처님으로 화(化)합니다.

부처님을 조성해 점안하는 것은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던 일입니다.부처님이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법문하고자 도리천에 올라가 있는 동안, 부처님을 그리워한 우전국왕이 전단향으로 불상을 조성했습니다.

도리천에서 내려온 부처님이 불상을 보고는 ‘말세 중생들을 잘 교화하라’는 수기(授記)를 내립니다.

이것이 불상 조성의 시초입니다.

사실 말세 중생들은 근기가 약해 부처님 형상을 모시고 기도해야 기도가 잘 됩니다.

그리고 부처님 앞에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뤄집니다.

산승이 1975년 쌍계사에 들어가 보니 제 모습을 갖춘 전각이 거의 없었습니다.

무조건 기도부터 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자 안 오던 사람도 오기 시작했고, 불사도 순조롭게 이뤄졌습니다.

쌍계사를 찾아온 사람들이 불사에 보시도 하고, 그런 연유로 쌍계사는 순조롭게 복원됐습니다.

아자방으로 유명한 칠불사 복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주지스님에게 문수전을 먼저 짓고 기도부터 하라고 일렀습니다.

주지스님이 정성스럽게 기도하자 칠불사 복원 불사도 이뤄졌습니다.

부처님 잘 믿고 행하면 부처님이 모든 것을 다 성취케 해 줍니다.

부자 되고 싶은 사람은 부자 되게 하고, 병을 고치고 싶은 사람의 병을 치료해 주고, 어려운 일을 이겨내고 싶은 사람에게는 힘든 일을 이겨낼 힘과 지혜를 줍니다.

이래서 부처님 모시고 점안하면 ‘산 부처님’으로 화(化)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믿고 수행할 때는 속이는 마음으로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근본 4종심(種心)’을 가지고 믿고 수행해야 합니다.

첫째 양심(良心)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다음으로 마음을 잘 써야 합니다.

용심(用心)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잘 쓰면 원하는 대로 다 됩니다.

세 번째는 섭심(攝心)을 잘해야 합니다.

나쁜 마음이 일어나면 이를 잘 거둬들여 좋은 마음이 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네 번째는 수심(修心) 즉 마음을 잘 닦아야 합니다.

다시는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다시는 상대방을 괴롭히지 말아야지, 다시는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지 하는 등의 수심을 잘 해야 합니다.

근본 4종심에 의지해 수행하고 기도하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두 가지 즐거운 법문’(二種喜法門)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받는 기쁨’과 ‘베푸는 기쁨’이 그것입니다.

받는 기쁨은 ‘거지 복’이고, 베푸는 기쁨은 ‘보살 복’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보살 복을 지어야 합니다.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게 해 주사이다’ 하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모든 일이 잘 풀립니다.

보살 복을 지어야지 거지 복에 기대는 불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 불교신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