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18) 좁은 소견으로 의심을 하여 급히 할수록 더욱 더디어진다.

小見狐疑(소견호의)하야 轉急轉遲(전급전지)로다

좁은 소견으로 의심을 하여 급히 할수록 더욱 더디어진다.

도는 무심(無心)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심을 배우는 것이 도에 나아가는 지름길이며, 생각을 앞세우거나 마음을 붙들고 있으면 도에 접근할 수 없다. 더구나 ‘이런가 저런가’ 궁리하면서 의심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생각만 급해질 뿐 도는 더욱 멀어지는 것이다.

유명한 조주趙州 스님의 방하착(放下着)이라는 공안(公案)이 있다. ‘놓아 버려라!’는 뜻의 이 공안은 마치 무거운 물건을 손에 들고 있다가 내려놓듯이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버려 무심에 돌아가라는 뜻을 갖고 있다.

조주 스님이 곧잘 방하착을 말한다는 소문이 났다. 어느 날 엄양(嚴陽)이 조주 스님을 찾아와 물었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놓아 버리게”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놓아 버리라는 것입니까?”

“놓아 버리지 않으려거든 짊어지고 가게”

이 말의 끝에 엄양은 깨달았다고 전한다.

執之失度(집지실도)라 必入邪路(필입사로)요.

집착하면 법도를 잃게 되어 반드시 틀린 길로 들어갈 것이요.

집착이란 마음이 어떤 객관의 대상에 붙어 있는 상태인데, 이에 주객(主客)이 나누어져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법도를 잃어 마음은 본래의 순수하고 참된 모습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미혹에 둘러싸여 잘못된 길로 빠져 들게 된다.

[금강경]에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구절이 있다.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이 말은, 어디에도 대이지 않는 즉 객관의 경계에 붙들리지 않는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본래 대도(大道)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머무는 데가 없으며, 방편상 언어의 개념으로 표현하는 중도와 공(空)에도 머물지 않는다.

신심명(17) 정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않거니

不見精駝(불견정추)어니 寧有偏黨(영유편당)가 허공

정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않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정밀하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으로 보기 좋은 것을 말하며, 거칠다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은 보기 싫은 것을 말한다. 이는 곧 객관 경계의 차별에서 일어나는 분별인데, 이 뜻은 분별이 없다는 말이다.

일체의 명상(名相)이 떨어져 나가 공空해진 자리에서 얻은 중도(中道)를 알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는 중도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사사무애(事事無碍)한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에 머물면서 걸림 없는 자유자재한 활용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인식의 기준을 세워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중도를 잃으며, 중도를 잃으면 역시 변견에 떨어질 뿐이다.

아무리 삼라만상이 차별되어도 거기에는 좋고 싫거나 아름답고 추한 것은 없다. 또한 산이 높은 것도 아니고 물이 깊은 것도 아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산도 아니고 물도 아니기 때문에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인 것이다. 동시에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기 때문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말들은 궤변처럼 들리지만 어디에도 고정된 관념의 말뚝을 박을 자리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大道體寬(대도체관)하야 無易無難(무이무난)이거늘

대도는 바탕이 넓어서 쉬운 것도 없고 어려운 것도 없거늘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도(道)이다. 이러한 도의 바탕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우주 전체를 다해도 그 영역을 채울 수 없다. ‘능엄경’에서는 “허공이 대각(大覺) 가운데서 생기는 것은 바다에서 한 거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空生大覺中 如海一發).” 하였고, [원각경]에서는 “가없는 허공은 각(覺)에서 나온 것이다(無邊虛空覺所顯發).”고 하였다. 대도가 대각이요 도가 각이다. 대도가 바다라면 허공은 한 거품이라는 비유는 대도의 체(體)를 비유하여 설명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