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21) 일승에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싫어하지 말라.

욕취일승(欲趣一乘)인대 물오육진(勿惡六塵)하라

일승에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싫어하지 말라.

일승(一乘)이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궁극적 진리의 세계인 부처님의 경지, 즉 무상대도를 말한다. 무상대도의 경지는 일체의 거부가 없다. 그러므로 속제俗諦를 버리고 진제(眞諦)를 구하는 것도 아니며, 진속불이(眞俗不二)이므로 있는 그대로가 모두 도의 세계이다.

육진(六塵)은 범부들이 항상 상대하는 객관의 경계이며, 이로 인해 갖가지의 분별망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육진도 진여가 작용을 일으켜 나타나는 것이다. 두두(頭頭)가 비로(毘盧)요, 물물(物物)이 화장(華藏)이라는 말처럼 대도를 성취한 분상에서는 삼라만상이 모든 것이 부처님이요 또한 부처님의 세계라는 것이다.

자신이 도(道) 속에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을 도안(道眼)으로 보게 된다. 그러므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모두 도(道)로 보이기 때문에 어느 것도 버릴 것이 없다. “불법이 단지 세간 속에 있으니 세간을 떠나 부처를 찾는 것은 토끼 뿔을 찾는 것과 같다(佛法只在世間中 離世覓佛求兎角).”는 말처럼. 생활의 현장 속에 진리가 내재해 있는 법이다.

육진불오(六塵不惡)하면 환동정각(還同正覺)이라

육진을 싫어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같다.

육진(六塵)을 진여(眞如)의 작용인 줄 알아 싫어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른 깨달음의 경계와 같다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생활합니까?”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느니라.”

깨달은 사람의 일상도 범부의 일상 경계와 똑같은 것으로, 초인적인 신통력을 발휘하면서 특별한 위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는 평범한 생활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 분별에 번뇌로 사는 세계와 절대무(絶對無)에 들어간 무위의 세계는 그 차원이 다르다. 정인(正人)이 정법을 말하면 정법이 사법이 된다고 하였다.

신심명(20)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을 어겨 혼침해져 좋지를 못하니라.

계념괴진繫念乖眞하여 혼침불호昏沈不好니라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을 어겨 혼침해져 좋지를 못하니라.

생각에 얽매이면 진여자성, 즉 도를 어기는 것이 되며, 또한 마음이 혼침에 빠지면 구름 낀 날씨는 좋은 날씨가 아니듯이 마음의 참모습이 사라져 좋은 것이 못 된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생각은 일반적인 객진 번뇌가 아니라 부처며 도라고 하는 공부분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목적의식의 생각을 말한다. 즉, 수행을 하는 사람은 수행을 한다는 생각을 앞세워 두지 말하는 것으로, 도는 능소能所의 마음이 끊어져야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의 사념을 통한 분별의식이 있어서는 안 되며, 성성적적惺惺寂寂하여 초롱초롱한 맑은 마음 상태가 유지되어야 도에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 없다고 하여 목석처럼 바보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참선 수행에 있어서도 선정을 방해하는 것은 혼침과 산란인데 정신이 흐려진 것은 혼침이고, 온갖 생각이 어지러워진 것은 산란이다.

불호노신不好勞神커든 하용소친何用疎親가

정신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 어찌 성글고 친함을 쓰랴.

도란 무위심無爲心에서 얻어지는 것이므로 억지로 마음을 내어 정신을 쓴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신을 써서 생각을 앞세울수록 점점 더 멀어진다. 마음에 친밀하거나 사이가 뜬 친소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도심道心이다. 말하자면 좋아할 것도 없고 싫어할 것도 없는 무심無心이라야 도에 합치되는 마음이며,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한다든가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려 하면 양변兩邊에 떨어지는 것이다.

‘한래한현 호래호현漢來漢現 胡來胡現’ 이라는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의 어록語錄에 나오는 말이 있다. 즉, 붉은 것이 오면 붉게 나타내 주고 검은 것이 오면 검게 나타내 준다는 말인데, 원래 한漢과 호胡는 인종人種에 따른 사람의 피부색을 뜻하는 말이다. 거울이 모양과 색깔 그대로 물체를 비추어 주면서 일체의 분별이 없는 것처럼, 무분별심으로 객관의 경계를 있는 그대로 응한다는 뜻이다.

지안 스님 글

신심명(19) 놓아 버리면 자연히 본래 그대로라

방지자연(放之自然)이니 체무거주(體無去住)라

놓아 버리면 자연히 본래 그대로라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느니라.

집착을 놓아 버리면 본래대로 되어 도에 합해 질 수 있다. 본래 도의 바탕인 본체는 가고 머무는 것도 없다. ‘수궁삼제(竪窮三際) 횡변시방(橫匯十方)’이라는 말이 있는데, 시간적으로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을 다하고 공간적으로 시방의 허공에 없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도의 본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고금古今과 동서(東西)가 없다.

그런데 마음에 한 생각이 일어나 집착이 생기면, 언제 어디였다는 시공의 개념에 묶여 버리며 변견에 떨어져 관념적 고집에 속박됨으로써 시제는 물론 여기저기에 걸리어 본체를 떠나버리는 것이다.

임성합도(任性合道)하야 소요절뇌(逍遙絶惱)하고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 슬슬 노닐면서 번뇌가 끊기고

집착이 없으면 자신의 본래 성품자리로 돌아가 도에 합해지며, 마음에 아무런 걸림이 남아 있지 않아 여유자적하여 일체의 번뇌가 사라진다. 일찍이 중국의 방거사(龐居士)가 설한 게송(偈頌)이 있다.

十方同聚會(시방동취회) 온 곳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모여

箇箇學無爲(개개학무위) 낱낱이 무위를 배우니

此是選佛場(차시선불장) 여기가 부처를 뽑는 과거장이라

心空及第歸( 심공급제귀) 마음이 공해지면 급제해 돌아가네

이 4구 중 “마음이 공해지면 급제하여 돌아간다.”라는 말이 중요한데, 부처에 합격하려면 마음이 공해진 사람이어야 가능하다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는 묘하다. 공해진 사람은 걸림이 없어 일체 객관의 경계에서 오는 장애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허공이 만상을 포함하되 장애를 받지 않는 것처럼,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사람, 즉 대자유인(大自由人)인 사람이 부처에 뽑힌다.

원효스님이 즐겨 쓴 말 중에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사람이라야, 곧장 자기 운명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원래 이것은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得人 一道出生死)’라는 구절을 의역한 말인데, 초기 경전인 숫다니파타에도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라.”는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