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佛) 법(法) 승(僧)

불(佛) 법(法) 승(僧)

마음 청정이 부처요

마음 광명이 불법이요

청정하고 광명하여 거리낌없는 것이 스님이다.

心淸淨是佛

心光明是法

淨光無 是僧

이것은 임제스님 법문인데, 실제로 심청정이 되고, 심광명이 되고, 정광무애가 되어야 바로 깨친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정하다, 깨끗하다 하면 어느 정도로 깨끗한 것인가? 구름 한 점 없는 허공, 그 허공이 참 깨끗합니다만 그것은 마음이 깨끗하다고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래서 허공이 깨끗하다는 그것도 또 한 방망이 맞아야 한다[虛空也須喫棒]고 말합니다. 마음 깨끗한 것에 비하면 허공도 깨끗한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것을 명경에 비유합니다. 먼지 한 점 없는 그 명경이 얼마나 깨끗하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명경이 깨끗하다는 그런 유(類)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스님이 말했습니다.

명경을 부수고 오라

너와 서로 보리라.

打破鏡來

與汝相見

그렇다면 불교에서 수행해 가는 차제(次第)로 보아서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참으로 깨끗한 마음, 청정한 마음인가?

구경각을 성취하기 전에는 십지등각(十地等覺)도 심청정(心淸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지등각은 아주 거친 망상[ 重妄想]은 떨어졌지만 자신도 모르게 아라야의 미세한 망상[微細妄想]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의식세계인 제8 아라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떨어져야만 이것이 참다운 청정입니다. 그러면 허공보다 더 깨끗하고 거울보다 더 깨끗합니다. 이 자리는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무심경계로 진여자성이니, 성불, 견성이니 하는데, 이것은 말로써가 아니고 실제 경험에서 그 경지를 체득(體得)해야 됩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무심(無心)경계가 나타나면 목석과 같은 무심인가, 아닙니다. 거기에서, 그 깨끗한 마음에서 큰 광명이 나타납니다. 이 광명을 예전 스님들은 천일병조(千日 照)라고 말했습니다. 천일병조! 해가 하나만 떠도 온 세계가 이렇게 환히 밝은데 하나, 둘, 셋도 아니고 천 개의 해가 일시에 두루 비추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오히려 유한입니다. ‘천(千)’이라는 숫자가 있으니까.

마음이 청정한 여기에 생기는 광명은 천 개의 해가 한꺼번에 비추인다 해도 오히려 적당하지 않은 광명이니 불가설(不可說), 말로써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방제불이 일시에 출현하여 하루 이틀도 아니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이 광명을 설명하려 해도 다하지 못하는 참다운 광명이다, 이 말입니다. 이제 심광명이라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광무애(淨光無碍), 즉 청정과 광명이 서로서로 거리낌이 없다,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이 있으면 빛이 있고 빛이 있으면 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청정은 불에다 비유할 수 있고 광명은 빛에다 비유할 수 있어서 불이 즉 빛이고 빛이 즉 불입니다. 빛 여읜 불이 따로 없고 불 여읜 빛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 둘이 될 수 없는 이것을 무애(無碍)라 합니다. 육조스님도 정과 혜를 말할 때 불과 빛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근본요점은 어디 있느냐 하면 심청정, 심광명을 성취하여 참으로 허공보다 더 깨끗하고 명경보다 더 깨끗한 무심경계만 증득하면 자연히 거기서 천 개의 해가 일시에 비추는, 비유할 수 없는 그런 대지혜 광명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정광무애라 합니다. 빛 따로 있고 불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빛이 즉 불이고 불이 즉 빛이다, 이런 말입니다.

이리하여 청정은 부처님[佛]이라 하고, 광명은 법(法)이라 하고, 무애는 스님[僧]이라 하여 불법승 삼보(佛法僧 三 )가 되는데 세 가지가 각각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불[火]이라 말할 때는 부처님을 표현하고, 빛이라 말할 때는 불법을 표현하고, 불이 즉 빛이고 빛이 즉 불이다 말할 때는 스님을 표현하는 것이니, 표현은 각각 달라도 내용은 똑같습니다. 불이 빛이고 빛이 불이지 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법승 삼보, 청정, 광명, 무애가 하나인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셋이 즉 하나이고, 하나가 즉 셋이다[三卽一 一卽三]고 합니다. 이 근본법을 바로 깨쳐서 실제로 증득할 것 같으면 그때에야 비로소 불법을 아는 동시에 모든 속박을 다 벗어나서 자유자재한 대해탈을 성취한 때입니다.

그러면 모든 속박은 왜 생기느냐? 번뇌망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으면 우리가 자유롭게 다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번뇌망상이 다 떨어지고 무심을 증득하여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경지를 성취할 것 같으면 모든 속박을 다 벗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진정한 자유라고 합니다.

눈감은 봉사에게 무슨 자유가 있습니까? 이리 가도 엎어지고 저리 가도 엎어지고 조금도 자유가 없지만 자기가 눈을 뜨면 온 천지를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를 봉사라 하는가? 크게는 산도 보고 작게는 먼지도 다 보는데 어째서 우리를 두고 눈감았다고 하는가?”

한 가지 비유를 말하자면 우리가 깨쳤다는 것은 꿈을 깨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그 꿈속에서는 모든 활동이 자유자재하고 아무 거리낌이 없는 것 같지만 그것이 꿈인 줄 모릅니다. 일단 꿈을 턱 깨고 나면 “아하! 내가 참으로 꿈속에서 헤매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중생들이 세상을 살면서 그것이 꿈인 줄을 모릅니다. 꿈속에 사는 줄을 모릅니다. 실제 그 꿈을 깨고 나야 비로소 여태까지 꿈속에서 살았구나 하는 것을 참으로 알 수 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 아니면 꿈을 모르는 것과 같이, 깨쳤다는 것은 실지 마음의 눈을 떠서 깨어나기 전에는 이해하기가 참으로 곤란합니다. 예전 장자(莊子)도

“크게 깨고 보면 큰 꿈을 알 수 있다[大覺然後知大夢]”고 하였습니다.

중생이 번뇌망상의 유심(有心) 속에 사는 동안은 전체가 꿈입니다. 그래서 십지등각도 꿈속에 사는 줄 알아야 됩니다. 오직 제8 아라야 근본무명이 완전히 끊어져서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그때에야 꿈을 바로 깨친 사람, 즉 부처입니다.

성불하기 전에는 꿈을 바로 깬 사람이 아니고 동시에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중생의 자유라 하는 것은 꿈속 자유이고 깨친 사람의 자유라 하는 것은 꿈을 깬 뒤의 자유이니, 꿈속에서의 자유를 어떻게 ‘자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꿈과 생시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말한 깨쳤다는 것을 대강은 짐작할 것입니다. 깨쳤다는 내용이, 성불했다는 내용이 무심에 있는데 무심을 증하면 거기에서 대지혜 광명이 생기고 대자유가 생깁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꿈을 깬 사람,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이 되어 대자유자재한 활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부처도 필요 없고, 조사(祖師)도 필요 없고, 팔만대장경도 다 필요 없습니다. 부처다, 조사다 하는 것은 다 중생이 꿈을 깨우기 위한 약에 지나지 않습니다. 약! 중생의 근본병인 꿈을 완전히 깨우고 나면 약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병이 있을 때 약이 필요하지 병이 다 낫고 나면 약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꿈을 완전히 깨워서 참다운 해탈을 성취하면 그때 가서는 부처도 필요 없고 조사도 필요 없는 참다운 대자유입니다.

장부가 스스로 하늘 찌르는 기운 있거니

부처가 가는 길은 가지 않는도다.

丈夫自有沖天氣

不向如來行處行

내 길, 내가 갈 길이 분명히 다 있는데 무엇 한다고 부처니 조사니 하여 딴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가느냐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참다운 대자유자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 일반에 대해 조금 이야기 하겠습니다.

종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개 초월신(超越神)을 주장합니다. 이 현상계(現象界)를 떠난 저 천상에 있는 초월신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을 그 초월신에 맡기고 그 밑에 무조건 절대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그 초월신의 뜻대로 되게 해주시오, 이런 식입니다. 이리하여 죽고 나면 그 초월신이 사는 곳에 가서 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초월신을 섬기면서. 그러나 자기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일거일동이 초월신의 지배하에서 초월신의 뜻대로 살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초월신의 속박을 받는 것이니, 그런 사상은 노예도 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초월신은 주인이 되고 모든 사람은 종같이 되어 그 지배를 받아야 되니 자기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기침도 한번 크게 못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의 주장은 다릅니다. 본시 인간이란 불성(佛性)이 다 있어서 자성(自性)이 청정하고 깨끗하여 거기에는 부처님도 설 수 없고 조사도 설 수 없습니다. ‘심청정’하여 깨끗하다고 한 거기에서는 부처도 때[垢]고, 조사도 때입니다. 팔만대장경은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고!

그토록 깨끗한 곳,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곳에서는 부처의 지배도 받지 않고 조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어떤 지배도 받지 않는 대자유 대해탈 경계입니다. 어떤 속박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외부의 상대적인 무슨 지배를 받고 무슨 속박을 받고 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대 금기(禁忌)입니다. 이것이 대해탈인 동시에 성불이며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도 자유에 대해 많이들 말합니다. 인간은 자유이며 평등이라고. 그러나 참다운 자유는 심청정을 실제로 증하고 심광명을 증해서 청정과 광명이 거리낌없이 무애한 그 속에서 놀아야만 비로소 참으로 대자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고 무조건 복종하고, 이렇게 되면 자유가 어디 있습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해탈되어 있습니다. 해탈되어 있는데 번뇌망상 때문에 여러 가지 구속이 생겨났습니다. 번뇌망상만 완전히 끊어 버리고 무심을 증하여 본래의 대자유를 회복할 것 같으면, 그러면 천상천하에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입니다. 내가 가장 높다 그 말입니다. ‘나’라는 것도 설 수 없는 것인데, 부처님께서 말로 표현하자니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다운 자유를 얻으려면 심청정, 심광명, 정광무애를 성취한 대해탈 경계를 성취하면 천상천하에 무애자재합니다. 그런 자유자재한 생활을 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목표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신론}에서 말하듯이 모든 고통을 벗어나서 구경락을 얻습니다[離一切苦 得究竟樂].

설사 초월신을 숭배하여 그 세계에 가서 난다고 해도 거기에서도 신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그런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일체고(離一切苦)가 안 됩니다. 이일체고라 하는 것은 부처님의 속박도 받지 않고 어떠한 속박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대자유입니다. 이런 대자유는 우리 불교 이외에는 없다고 나는 단정합니다.

불교에서 해탈이다, 자유다 하는 것에는 어느 종교 어느 사상에서도 따라올 수 없는 큰 자유자재가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내 물건이지만 이것이 진금(眞金)인가 잡철(雜鐵)인가, 그것도 구별 못 해서 되겠습니까. 실제 진금을 잡철로 착각해서는 큰일납니다.

이 대자유를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불교부터 버려야 합니다. 자꾸 부처님 믿고 조사를 의지하고 하면 결국은 거기에 구애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법을 성취하려면 자기 마음이 본시 부처라는 것, 이것 이외에는 전부 다 안 믿어야 됩니다. 마음이 부처다[卽心是佛] 이것만이 바른 믿음[正信]이고, 이것 이외에 딴 것을 무엇이든 믿으면 그것은 삿된 믿음[邪信]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만 믿고 팔만대장경도 버리라고 항상 말합니다.

고불고조(古佛古祖)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 법을 성취하려면 부처와 조사를 원수와 같이 보라[見佛祖如寃家相似人].”

부처와 조사를 원수와 같이 보라니!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자기 마음만 믿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이 부처고 자기 마음이 조사입니다. 자기 마음이 극락이며 자기 마음이 천당입니다. 자기 마음을 놓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처와 조사는 꿈 속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부처와 조사를 원수같이 보라고 하면 말 다한 것 아닙니까.

예수교를 공부하는 어떤 사람이 벽에 부딪쳤습니다. 더 나아갈 수 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참선을 해보겠다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면 참선을 해야 되는데, 당신이 참선을 하려면 근본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입니까?”

“스님네도 참선을 하려면 불교부터 버려야 되는데, 당신이 예수교를 버리지 않으면 이 공부는 못 해. 예수교라는 속박에서부터 벗어나야 돼!”

“스님, 가서 생각해 보고 오겠습니다.”

“허허, 생각해 보고 온다는 말은 안 온다는 말 아냐? 예수교 못 버리면 아예 오지 말아. 그래서는 백년 해봤자 참선(參禪)이 안돼.”

내가 처음에 ‘심청정’이란 한 것은 부처와 조사도 설 수 없는 그런 청정을 말한 것입니다. 팔만대장경도 여기 와서는 때[垢]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대중들도 이것을 깊이 믿고 오직 자기가 본시 부처라는 것, 자기 마음 이외에 불법(佛法)이 없고, 자기 마음 이외에 부처가 따로 없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믿고 오직 화두를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로만 깨치면 그 속에서 대자유자재한 부사의(不思議)해탈 경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요점은 어디 있느냐? 밥 이야기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실제로 밥을 먹느냐 안 먹느냐, 이것입니다. 공부 부지런히 해서, 화두(話頭) 부지런히 해서 내 말이 헛된 말이 안 되고 실제로 이것을 성취한 사람이 하나라도 생기도록 노력해야 안 되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만은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자기만을 믿으라’고 한다고 ‘옳지, 술 생각이 나는데 한번 가볼까?’ 이렇게 했다가는 큰일납니다. 그것은 자기가 아닙니다. 망상이고 도둑놈이란 말입니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자기’란 것은 ‘깨끗한 자기’를 말함이지 ‘거짓의 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을 성인인 공자(孔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70살이 되니 자기 생각나는 대로 한다[七十從心所欲 不踰矩]”고. 동으로 가고 싶으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고 싶으면 서쪽으로 가고, 앉고 싶으면 앉고, 무슨 짓을 해도 법도에서 어긋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쁜 짓 안 한다는 말입니다.

심청정(心淸淨), 허공보다 더 깨끗한 이 마음을 실제로 알고 보면, 직접 자기가 증득해 놓고 보면 이리 가도 대해탈 경계, 저리 가도 대해탈 경계, 부처님 행동 그대로입니다. 저 시방세계를 다 찾아봐도 술 먹고 싶어 날뛰는 그런 사람은 그 깨끗한 거울 속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태평양 한복판, 물이 깊고 깊어서 태풍이 불어 아무리 바닷물이 움직이고 움직여도 깨끗한 물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얕은 구정물을 보고서 “물은 꼭 같지?” 이렇게 나오면 그때는 깨끗한 물은 평생 못 보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참으로 허공보다 더 깨끗한 마음, 그것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일체의 선과 악이 다 떨어진 곳이고 부처와 조사도 설 수 없는 곳입니다. 청정한 자기를 바로 믿고, 청정한 자기를 바로 깨칩시다.

부처님같이 존경하라

부처님같이 존경하라

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

觀彼怨家

如己父母

이것은 {원각경(圓覺經)}에 있는 말씀입니다.

중생이 성불 못 하고 대도(大道)를 성취 못 하는 것은 마음속에 수많은 번뇌, 팔만 사천 가지 번뇌망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많은 번뇌 가운데서 무엇이 가장 근본 되는 것인가. 그것은 증애심(憎愛心),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선가(禪家)의 3조 승찬대사는 그가 지은 {신심명(信心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도다.

但莫憎愛

洞然明白

이 증애심이 실제로 완전히 떨어지려면 대오(大悟)해서 대무심경계를 성취해야 합니다. 무심삼매에 들어가기 전에는 경계에 따라서 계속 증애심이 발동하므로 이 병이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대도를 목표로 하므로 부처님 말씀을 표준삼아 이것이 생활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가장 크게 죄를 지은 사람을 부모와 같이 섬겨라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것입니다.

‘나쁜 사람을 용서하라’거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또 모르겠지만 원수를 부모같이 섬기라 하니, 이것은 부처님께서나 하실 수 있는 말이지 다른 사람은 감히 이런 말조차 못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불교에서는 ‘용서(容恕)’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용서라는 말이 없다고 잘못한 사람과 싸우라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잘했고 너는 잘못했다, 그러니 잘한 내가 잘못한 너를 용서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상대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하는 말입니다. 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의 불성은 꼭 같다[一切衆生 皆有佛性]’고 주장합니다. 성불해서 연화대 위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이나 죄를 많이 지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있는 중생이나 자성자리, 실상(實相)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겉을 보고 미워하거나 비방하거나 한층 더 나아가서 세속말의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고 나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부처님같이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실례로 들어도 그와 같습니다. 부처님을 일생 동안 따라다니면서 애를 먹이고 해치려고 수단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 ‘제바닷타[調達]’입니다.

보통 보면 제바닷타가 무간지옥에 떨어졌느니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느니[生陷地獄] 하는데 그것은 모두 방편입니다. 중생을 경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어찌 됐건 그러한 제바닷타가 부처님에게는 불공대천의 원수인데 부처님은 어떻게 원수를 갚았는가?

성불(成佛), 성불로써 갚았습니다.

죄와 복이 온 시방법계를

비춤을 깊이 통달했다.

深達罪福相

照於十方

착한 일 한 것이 시방세계를 비춘다고 하면 혹시 이해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악한 짓을 한 무간지옥의 중생이 큰 광명을 놓아서 온 시방법계를 비춘다고 하면 아무도 이해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가장 선한 것을 부처라 하고 가장 악한 것을 마귀라 하여 이 둘은 하늘과 땅 사이[天地懸隔]입니다마는, 사실 알고 보면 마귀와 부처는 몸은 하나인데 이름만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다 해도 그 사람의 자성(自性)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고, 아무리 성불했다 하여도 그 사람의 자성에는 조금도 더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와 부처는 한 몸뚱이이면서 이름만이 다를 뿐 동체이명(同體異名)입니다. 비유하자면 겉에 입은 옷과 같은 것입니다.

제바닷타가 아무리 나쁘다고 하지만 그 근본자성, 본모습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나중에 제바닷타가 성불하여 크게 불사(佛事)를 하고 중생을 제도한다고 했습니다. 제바닷타가 성불한다고 {법화경}에서 수기(授記)하였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 행동, 공부하는 근본지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불교에 들어오는 첫째 지침은 ‘모든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고 스승과 같이 섬겨라’입니다. 우리 불교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물론 소나 돼지나 짐승까지도 근본자성은 성불하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부처님과 같이 존경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불교 믿는 사람은 상대방이 떨어진 옷을 입었는지 좋은 옷을 입었는지 그것은 보지 말고 ‘사람’만 보자는 말입니다.

옛날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에 큰 잔치가 있어서 전국의 큰스님네들을 모두 초청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 한 분이 검박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잔치에 초청되었습니다. 본시의 생활 그대로 낡은 옷에 떨어진 신을 신고 대궐문을 지나려니 문지기가 못 들어가게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좋은 옷을 빌려 입고 다시 갔더니 문지기가 굽신굽신하면서 얼른 윗자리로 모셨지요. 다른 스님네들은 잘 차려진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이 스님은 음식을 자꾸 옷에 들이붓고 있습니다.

“스님, 왜 이러시오. 왜 음식을 자꾸 옷에다 붓습니까?”

“아니야, 이것은 날 보고 주는 게 아니야. 옷을 보고 주는 것이지!”

그리고는 전부 옷에다 붓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비유입니까. 허름한 옷 입고 올 때는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더니 좋은 옷 입고 오니 이렇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겉만 보고 사는 사람은 다 이렇습니다.

혹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법문하시면서 큰 짐을 지워 주시네. 그건 부처님이나 하실 수 있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나. 말 한마디만 잘못 해도 당장 주먹이 날아드는데 어쩌란 말인가’고 항의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나간 실례를 몇 가지 들겠습니다.

옛날에 현풍 곽씨 집안의 한 사람이 장가를 들었는데, 그 부인의 행실이 단정치 못했습니다. 시부모 앞에서도 함부로 행동하고, 의복도 바로 입지 않고, 언행이 전혀 공손치 않아 타이르고, 몽둥이로 때리기까지 하고, 별 수단을 다 해봐도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양반집에서 부인을 내쫓을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람이 {맹자(孟子)}를 펴놓고 읽다가 이런 구절에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한 것 없이 착하다.

악한 이고 착한 이고 간에 누구든지

그 본성은 다 착하여 모두가 요순과 똑같다.

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

여기에 이르러 그 사람은 다시금 깨닫고 생각했습니다.

‘본래 요순같이 어진 사람인데 내가 잘못 알았구나. 앞으로 우리 마누라를 참으로 존경하리라’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예전에 양반집에서는 아침 일찍 사당에 가서 자기 조상에게 절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다음날 아침 도포 입고 갓 쓰고 사당에 가서 절을 한 후에는 제일 먼저 자기 부인에게 넙죽 절을 했습니다. 부인이 자기 남편을 보니 미친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를 보고 욕하고 때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정색으로 정장을 하고 절을 하니 말입니다.

“당신이 참으로 거룩합니다”

하면서 남편이 또 절을 합니다. 막 쫓아내는데도 한사코 따라다니며 절을 하고는

“사람이란 본시 모두 착한 것이오. 당신도 본래 착한 사람인데 내가 잘못 보고 욕하고 때렸으니 앞으로는 당신의 착한 성품만 보고 존경을 하렵니다.”

이렇게 하기를 한달 두달이 지나다 보니 부인도 자기의 본래 성품이 돌아와서

“왜 자꾸 이러십니까. 이제는 나도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제발 절은 그만 하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요·순임금과 똑같소. 그런 당신을 보고 내가 어찌 절을 안 할 수 있겠소?”

하며 여전한 남편의 기색에, 결국 부인도 맞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날보고 요·순이라고 하는데 진짜 요순은 바로 당신입니다”

하면서 서로가 요·순이라고 존경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했듯이, 부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전 인도에서는 조석(朝夕)으로 예불시간에 반드시 지송(持誦)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지르제타’라는 스님이 지은 150찬불송(讚佛頌)이 그것입니다. 의정(義淨)법사의 {남해기귀전(南海寄歸傳)}에도 보면, 의정법사가 인도에 갔을 때 전국 각 사찰에서 150찬불송을 조석으로 외우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베푼 은혜 천지보다 깊어도

그걸 배반하고 깊은 원수 맺는다.

부처님은 그 원수를

가장 큰 은혜로 본다.

恩深過覆載

背德起深怨

尊觀怨極境

猶如極重恩

어떤 상대를 부모보다, 부처님보다 더 섬기고 받들고 하는데, 그는 나를 가장 큰 원수로 삼고 자꾸 해롭게 합니다. 이럴 때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그만큼 상대를 더 섬긴다는 말입니다.

원수는 부처님을 해롭게 해도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상대는 부처님 허물만 보는데

부처님은 그를 은혜로 갚는다.

怨於尊轉害

尊於怨轉親

彼恒求佛過

佛以彼爲恩

존어원전친!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근본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잘해 주는데 상대방은 내게 잘해 주는 것은 하나도 없이 다 내버리고 자꾸 나를 해롭게만 합니다. 그런데도 섬기기만 하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더욱더 상대를 받들고 섬긴다는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부처님 근본사상이고 불교의 근본입니다.

전에도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교 믿는 사람 몇이 삼천 배 절하러 왔길래

“절을 할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 반대하고 예수님 제일 욕하는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도록 기원하면서 절하시오” 이렇게 말했더니 참 좋겠다고 하면서 절 삼천배를 다 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부처님 제일 욕하고 스님네 제일 공격하는 그 사람이 극락 세계에 제일 먼저 가도록 축원하고 절합시다.”

이제는 우리 불자들에게도 이런 소리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는 말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게되면 일체 번뇌망상과 일체 중생의 병은 다 없어진다고 말입니다.

중생의 모든 병이 다 없어지면, 그것이 부처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불을 목표로 하고 사느니만큼 부처님 말씀을 표준삼아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그때 자기 감정에 치우쳐 살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한편으로는 또 이런 의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교에서는 치고 들어오는데 자꾸 절만 하고 있으면 불교는 어떻게 되나? 상대가 한 번 소리지르면 우리는 열 번 소리질러야 겁나서 도망갈 텐데, 가만히 있다가는 불교는 씨도 안 남겠다. 자! 일어나자.’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럴수록 자꾸 절하고, 그런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축원하는, 그런 사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전하고, 그런 사상으로 일상생활을 실천해 보십시오. 불교는 바닷물 밀듯 온 천하를 덮을 것입니다. 그것이 생활화되면 모든 사람이 감동하고 감복하여 ‘불교가 그런 것인가!’ 하여 불교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애는 어느 곳에 있는가? 저쪽에서 소리지른다고 이쪽에서 같이 소리지르면 안 됩니다. 저쪽에서 주먹 내민다고 이쪽에서도 같이 주먹 내놓아서는 안 됩니다. 불지른다고 같이 불을 지르면 함께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쪽에서 아무리 큰 불을 가져오더라도 이쪽에서 자꾸 물을 들이붓는다면 어찌 그 물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불은 물을 못 이길 것입니다. 나중의 성불(成佛)은 그만두고 전술(戰術), 이기는 전술로 말하더라도 불에는 물로써 막아야지 불로 달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근본은 어디 있느냐 하면, 모든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법문의 결론을 말하겠습니다.

실상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하니

귀천노유를 부처님으로 섬긴다.

지극한 죄인을 가장 존중하며

깊은 원한 있는 이를 깊이 애호하라.

實相無垢常淸淨

貴賤老幼事如佛

極重罪人極尊敬

深怨害者深愛護

모든 일체 만법의 참모습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합니다. 유정(有情)·무정(無情) 할 것 없이 전체가 본래(本來) 성불(成佛)입니다. 옷은 아무리 떨어졌어도 사람은 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귀한 이나 천한 이나, 늙은이나 어린이나 전부 다 부처님같이 섬기고, 극히 중한 죄를 지은 죄인까지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동시에 나를 가장 해롭게 하는 사람을 부모같이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자세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근본지침으로 삼고 표준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행동해야만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고, 법당에 들어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은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는 여기에 있느니만큼 우리 서로서로 노력합시다.

무심(無心)이 부처다

무심(無心)이 부처다

불교라고 하면 부처님이 근본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부처라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는 좀 곤란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원리 원칙을 생각한다면 곤란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번뇌망상 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의 망상을 떠난 것을 부처라고 합니다. 모든 망상을 떠났으므로 망심이 없는데 이것을 무심(無心)이라고 하고 무념이라고도 합니다. 중생이란 망상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생이라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저 미물인 곤충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비롯하여 십지등각(十地等覺)까지 모두가 중생입니다. 참다운 무심은 오직 제8 아라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은 구경각(究竟覺) 즉 묘각(妙覺)만이 참다운 무심입니다. 이것을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망상 속에서 사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니 망상이 어떤 것인지 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통 팔만 사천 번뇌망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구분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의식(意識)입니다. 생각이 왔다갔다,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이것이 의식입니다. 둘째는 무의식(無意識)입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을 떠난 아주 미세한 망상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을 제6식(第六識)이라 하고 무의식을 제8식(第八識:아라야식)이라고 하는데, 이 무의식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8지보살도 자기가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고 아라한(阿羅漢)도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며 오직 성불(成佛)한 분이라야만 근본 미세망상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곤충 미물에서 시작해서 십시, 등각까지 전체가 망상 속에서 사는데, 7지보살까지는 의식 속에 살고 8지 이상, 10지, 등각까지는 무의식 속에서 삽니다. 의식세계든 무의식세계든지 전부 유념(有念)인 동시에 모든 것이 망상입니다. 그러므로 제8 아라야 망상까지 완전히 끊어 버리면 그때가 구경각이며, 묘각이며, 무심입니다.

무심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본래의 마음자리를 흔히 거울에 비유합니다. 거울은 언제든지 항상 밝아 있습니다. 거기에 먼지가 쌓이면 거울의 환한 빛은 사라지고 깜깜해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망상은 맑은 거울 위의 먼지와 마찬가지이고, 무심이란 것은 거울 자체와 같습니다. 이 거울 자체를 불성(佛性)이니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망상을 다 버린다는 말은 모든 먼지를 다 닦아낸다는 말입니다. 거울에 끼인 먼지를 다 닦아내면 환한 거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동시에 말할 수 없이 맑고 밝은 광명이 나타나서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우리 마음도 이것과 똑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제8 아라야식까지 완전히 떨어지면 크나큰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구름 속의 태양과 같습니다. 구름 다 걷히면 태양이 드러나고 광명이 온 세계를 다 비춥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서 시방법계(十方法界)를 비추인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일체 망상이 모두 떨어지는 것을 ‘적(寂)’이라 하고,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조(照)’라고 합니다. 이것을 적조(寂照) 혹은 적광(寂光)이라고 하는데, 고요하면서 광명이 비치고 광명이 비치면서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해인사 큰 법당을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무심이라고 해서 저 바위처럼 아무 생각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무심은 바꾸어 말하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불생이란 일체 망상이 다 떨어졌다는 말이고, 불멸이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난다는 말이니, 즉 불생이란 적(寂)이고 불멸이란 조(照)입니다. 그러니 불생불멸이 무심입니다.

무심을 경(經)에서는 정혜(定慧)라고도 합니다. 정(定)이란 일체 망상이 모두 없어진 것을 말하고, 혜(慧)라는 것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정혜등지(定慧等持)를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이 무심을 완전히 성취하면 또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성불(成佛)인 동시에 열반인 것입니다. 육조(六祖)스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상 대열반이여!

두렷이 밝아 항상 고요히 비추는도다.

無上大涅槃

圓明常寂照

흔히 사람이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죽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열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서 동시에 광명이 온 법계를 비추는 적조가 완전히 구비되어야 참다운 열반입니다. 고요함[寂]만 있고 비춤[照]이 없는 것은 불교가 아니고 외도(外道)입니다. 일체 망상을 떠나서 참으로 견성(見性)을 하고 열반을 성취하면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는데, 이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해탈이란 결국 {기신론(起信論)}에서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한 대로 “일체 번뇌망상을 다 벗어나서 구경락인 대지혜 광명을 얻는다[離一切苦 得究竟樂]” 이 말입니다.

이상으로써 성불이 무엇인지 무심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불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근본이 성불에 있는 만큼 실제로 적조를 내용으로 하는 무심을 실증(實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근본은 누구든지 다 평등합니다. 평등할 뿐만 아니라 내가 항상 말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이지,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명경(明鏡)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것은 새삼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고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말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명경은 본래 청정합니다. 본래 먼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동시에 광명이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그러니 광명의 본체는 참다운 무심인 동시에 적조, 적광, 정혜등지(定慧等持)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 그대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중생이 참으로 청정하고 적조한 명경 자체를 상실한 것처럼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무리 깨끗한 명경이라도 먼지가 앉을 것 같으면 명경이 제 구실을 못합니다. 그러나 본래의 명경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먼지가 앉아 있어서 모든 것을 비추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명경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습니다. 먼지만 싹 닦아 버리면 본래의 명경 그대로 아닙니까? 그래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명경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성(自性)이 본래 청정한데 어찌해서 중생이 되었나? 먼지가 앉아 명경의 광명을 가려 버려서 그런 것뿐이지 명경이 부서진 것도 아니고 흠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먼지가 앉아서 명경이 작용을 완전하게 못 한다 그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다운 명경을 구하려면 다시 새로운 명경을 만드는 게 아니고 먼지 낀 거울을 회복시키면 되는 것처럼 본래의 마음만 바로 찾으면 그만입니다.

내가 항상 “자기를 바로 봅시다” 하고 말하는데, 먼지를 완전히 닦아 버리고 본래 명경만 드러나면 자기를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라고 할 때 마음의 눈이란 것도 결국 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표현이 천 가지 만 가지 다르다고 해도 내용은 일체가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無心)은 세속의 사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예전의 고인들의 책이나 얘기를 들어볼 것 같으면 유교, 불교, 도교, 유불선 3교가 다르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유교라든가 도교 등은 망상을 근본으로 하는 중생세계에서 말하는 것으로 모든 이론, 모든 행동이 망상으로 근본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망상을 떠난 무심을 증득한 것이 우리 불교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먼지 앉은 그 명경으로써 말하는 것이고 불교는 먼지를 싹 닦은 명경에서 하는 소리인데, 먼지 덮인 명경과 먼지 싹 닦아 버린 명경이 어떻게 같습니까? 그런데도 유?불?선이 꼭 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무심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십지등각(十地等覺)도 중생의 경계인데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더 말할 것 있습니까?

중생의 경계, 그것이 진여자성을 증득한 대무심경계와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예전에는 유?불?선 3교만 말했지만 요즘은 문화가 발달되고 세계의 시야가 더 넓어지지 않았습니까. 온갖 종교가 다 있고 온갖 철학이 다 있는데 그것들과 불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동서고금을 통해서 어떤 종교, 어떤 철학 할 것 없이 불교와 같이 무심을 성취하여 거기서 철학을 구성하고 종교를 구성한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어떤 큰 철학자, 어떤 위대한 종교가, 어떤 훌륭한 과학자라고 해도 그 사람들은 모두가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에서 한 소리는 한마디도 없다, 그 말입니다.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불교에는 부처님이 근본인데 부처님이란 무심이란 말입니다. 모든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를 부처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심이 근본이니만큼 불교를 내놓고는 어떤 종교, 어떤 철학도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무심을 성취해서 말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혼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만큼 불교란 것은 어떤 철학이나 어떤 종교도 따라올 수 없는 참으로 특출하고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망상 속에서 하는 것하고 망상을 완전히 떠난 것하고를 비교해서 생각해 봅시다. 다시 명경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명경에 먼지가 앉으면 모든 것을 바로 비추지 못합니다. 먼지를 안 닦고 때가 앉아 있으면 무슨 물건을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모든 물건을 바로 비추려면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망상 속에서는 모든 사리(事理), 모든 원리,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망상이 눈을 가려서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진리를 알려면 망상을 벗어나서 무심을 증(證)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여 무심을 완전히 증득한 부처님 경계 이외에는 전부 다 삿된 지식이요, 삿된 견해[邪知邪見]입니다. 대신에 모든 번뇌망상을 완전히 떠나서 참다운 무심을 증득한 곳, 즉 먼지를 다 닦아낸 깨끗한 명경은 무엇이든지 바로 비추고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정지정견(正知正見)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은 망상 속에서 성립된 것인 만큼 사지사견이지 정지정견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정지정견은 오직 불교 하나뿐입니다.

결국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알지 못한다고 하면 행동도 바로 못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눈감은 사람이 어떻게 바로 걸을 수 있겠습니까? 먼지 앉은 명경이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망상이 마음을 덮고 있는데 어떻게 바로 알 수 있으며,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으며, 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른 행동이라 하는 것은 오직 참으로 무심을 증해서 적광적조(寂光寂照)를 증하기 전에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물었을 때 바로 앉고, 바로 보고, 바로 행하고, 바로 사는 것이 부처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다 바로 알고 싶고, 바로 보고 싶고, 바로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캄캄해서 눈감은 봉사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바로 살 수 있겠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바른 생활을 하자는 것이 불교인데 망상 속에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오직 무심을 증해야만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지등각도 봉사입니다. 왜냐,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십지등각이 저 해를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해를 보는 것과 같아서, 비단이 아무리 엷어도 해를 못 보는 것은 보통의 중생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십지등각이 사람을 지도하는 것도 봉사가 봉사를 이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바로 이끌려면 자기부터 눈을 바로 떠야 하고, 바로 알아, 바로 행동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추려 보면,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모든 망상을 벗어난 것을 부처라 합니다. 모든 망상이 없으니 무심입니다. 그러나 그 무심은 목석(木石)과 같은 무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울의 먼지를 완전히 다 닦아 버릴 것 같으면 모든 것을 비추는 것과 같으며, 구름이 걷히어 해가 드러나면 광명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나지 않는 것을 불생(不生)이라 하고, 대지혜 광명이 항상 온 우주를 비추는 것을 불멸(不滅)이라 하는데,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이 무심은 어떤 종교, 어떤 철학에도 없고 오직 불교밖에 없습니다. 또 세계적으로 종교도 많고 그 교주들의 안목도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마는 모두가 조각조각 한 부분밖에 보지 못했단 말입니다.

불교와 같이 전체적으로 눈을 뜨고 청천백일(靑天白日)같이 천지만물을 여실히 다 보고 말해 놓은 것은 실제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노력해서 실제 무심을 증해야 되겠습니다. 밥 이야기 천날 만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직접 밥을 떠먹어야지요. 그렇다고 해서 없는 무심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본래 무심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입장입니다. 내가 자꾸 “중생이 본래 부처다” 하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중생들밖에 없는데 중생이 본래 부처란 거짓말이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아까 명경의 비유는 좋은 비유가 아닙니까. 먼지가 앉은 중생의 명경이나 먼지가 다 닦인 부처님 명경이나 근본 명경은 똑같습니다. 본시 이 땅 속에 큰 금광맥이 있는 것입니다. 광맥이 있는 줄 알면 누구든지 호미라도 들고 달려들 것 아닙니까, 금덩이를 파려고.

우리가 ‘성불! 성불!’ 하는 것도 중생이 어떻게 성불하겠느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본래 부처입니다. 그러니 본래면목, 본래의 모습을 복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란 것을 확실히 자신하고 노력하면 본래 부처가 그대로 드러날 것이니 자기의 본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하여 우리의 참모습인 무심(無心)을 실증(實證)합시다.